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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육종학자가 유럽의 데이지와 동양의 국화를 교배시켜 탄생시켰다는 샤스타데이지,샤스타는 인디언 용어로 뽀얀 흰색이라고.
 미국의 육종학자가 유럽의 데이지와 동양의 국화를 교배시켜 탄생시켰다는 샤스타데이지,샤스타는 인디언 용어로 뽀얀 흰색이라고.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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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찾아온 친구 딸아이

멀리서 오랜 친구의 딸아이가 왔다. 뜻밖이다. 얼마 전부터 한 번 온다, 온다 하면서도 코빼기 한 번 안 비춰준 친구 녀석이 딸아이를 보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뜻밖이다. 여기에 뭔가 있다, 싶었지만 캐묻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는 어쩌고 이리 한가하게 돌아다니는가, 궁금 정도가 아닌 의구심이 크게 들었지만 역시 묻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심한 듯이 그냥 국화차나 끓여서 따랐다.

"밥은 먹었냐?"
 "어른들은 왜 사람을 보면 밥 먹었냐고 묻는지 모르겠어요."
 "허헛 참, 그래? 아저씨가 한 방 맞은 거네?"
 "아프세요?"
 "모기 다리처럼 빼빼 말라가지고, 그거 어디 간지럽기나 하겠냐."
 "칫."

이것저것 자꾸 캐묻지 않기를 참 잘했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다. 가벼운 듯 무거운 듯 톡톡 튀는 농담이나 주고받고 가끔은 꿀밤이나 한 대씩 먹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 친구 부인의 강압적인 부탁으로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였다. 구제금융 직후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 채로 절명한 엄마를 보고는 그만 뇌에 이상이 생겨 오랜 기간 치료를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이름만 들어도 내 가슴에 벌써 면도날이 들어와서 아릿아릿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은, 그런 아이였다.

"너 남친 있어?"
 "심심해요."
 "남자가 심심해? 소금 줄까?"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 연세에 그런 썰렁 멘트를 날릴 수가 있죠?"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그런 식의 썰렁한 농담을 날렸다. 녀석은 어깃어깃 하면서도 넘어지거나 돌아서지 않고 잘 따라와 주었다. 그나저나 밥을 먹여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속에서는 그런 걱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오후 5시. 무조건 일어나서 밥을 안쳤다. 밥솥에 밥이 꽤 있었지만 새로 지은 뜨거운 밥이 있어야 했다. 국 하나에 반찬 두 가지, 어머니와 늘 먹는 그런 식탁을 차려놓고 권하기는 미안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녀석이 구경해보지 않은 별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너 밥맛이 없어?
봄이라서? 아니면 사춘기라서?
밥을 안 먹으니 '맥아리'도 없지? '맥아리'가 없으니 매사에 흥미도 없고, 연애도 못하지?

이런 질문들을 잇달아 속사포처럼 날렸다. 녀석은 드디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왜 웃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웃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나는 다시 일방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별식을 만들어 드리지. 이건 뭐 나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누구나 할 수 있어. 우선 작은 바구니 하나 들고 마당으로 나가자. 마당에 뭐가 있나. 풀이 있지. 나무도 있고. 이 계절의 풀과 나뭇잎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괜찮다. 미나리랑 이것저것 순하게 잘 섞으면 독초도 보약으로 변신을 하니까. 이게 바로 연금술이지, 그럼, 연금술이고 말고.

         지금은 사라진 고인돌 마을 본댁에서 뿌리 하나 캐다가 심은 흰민들레가 지금은 마당에 쫙 깔렸다.
 지금은 사라진 고인돌 마을 본댁에서 뿌리 하나 캐다가 심은 흰민들레가 지금은 마당에 쫙 깔렸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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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잎 몇 개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민들레는 왜 뿌리를 수직으로 깊이 내리는지 너는 알까? 이런 질문과 함께.

       미나리는 성질이 참 무던하다. 습기만 있으면 어디라도 내 집이다 하고 잘 자란다.
 미나리는 성질이 참 무던하다. 습기만 있으면 어디라도 내 집이다 하고 잘 자란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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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서 자라는 미나리도 몇 개 뜯어서 바구니에 담았다. 미나리는 왜 물에서 자라는지 너 혹시 알어? 이런 질문과 함께.

           꽃이 피면 여름밤이 너무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당귀, 꽃이나 잎이나 뿌리나 그 향기가 그만이다
 꽃이 피면 여름밤이 너무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당귀, 꽃이나 잎이나 뿌리나 그 향기가 그만이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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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 잎을 서너 개 뜯어서 바구니에 담았다. 당귀는 엄마들의 피를 보해주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네가 관심이 있어지면 그때 메일로 알려줄게, 하는 말과 함께.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녀석은 왜 자꾸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기를 쓰려고 찍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일기에 무슨 사진까지 넣느냐고 되물었다. "너는 싸이도 안 하냐?" "아저씨 싸이 하세요? 에이 시시해. 전 중딩 때 하다가 졸업했거든요" "하다가 졸업하는 게 어딨어. 그냥 그만둔 것일 뿐이겠구만." 말과 함께 녀석의 이마에 꿀밤 하나를 먹였다. 녀석은 앗, 씨, 하고 혀 짧은 소리를 냈다.

"너도 한 장 찍을까? 그러자, 하나만 찍자."
 "찍기만 해봐요, 그냥 칵 죽어버릴 거니깐."
 "어쿠 무서워라. 너는 아직 어린 숙녀거든. 어린 숙녀께서 싸이도 안 하다니, 슬프다, 아저씨가 너무 슬퍼."
 "저희 아빠가 말이에요.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라고 하셨거든요."
 "그거 사실은 내가 한 말이야."
 "언제요?"
 "옛날에, 너희 아빠가 아직 철이 안 들었을 적에."
 "칫."

         이 계절의 마늘은 전체를 먹을 만하다
 이 계절의 마늘은 전체를 먹을 만하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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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멋대로 자라는 마늘도 두 뿌리 뽑아서 바구니에 담았다. 마늘은 왜 겨울 한파에도 죽지 않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살짝 데쳐서 무치면 시금와 쑥갓을 섞은 듯한 맛이 나는 꽃양귀비.마약성분이 전혀 없는 개량종이다
 살짝 데쳐서 무치면 시금와 쑥갓을 섞은 듯한 맛이 나는 꽃양귀비.마약성분이 전혀 없는 개량종이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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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예요?" 녀석이 양귀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양귀비? 마약?" "아니야. 마약 성분은 없어. 사람의 지능이 대단해서 꽃만 피는 것을 만들어낸 거야.""으응, 이것도 먹어요?" "응, 그게 제일로 맛난 거야." "근데 왜 이건 안 따요?" "아까우니까, 너 가면 나 혼자 먹을 거야." "귀여워." "뭐?" "귀엽다고요, 아저씨가."

잠시 뒤에 녀석이 "근데 꽃이 이상해." 하면서 잎과 꽃을 뜯었다. "그래서 양귀비지. 넌 꽃 안 좋아하지?"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이놈아, 네 이름을 지은 사람이야." "이름 지으면 그런 것도 알아요?" "네 사주를 다 알고 있다니깐." "저는 점 같은 것도 안 믿어요."

그래, 그럴 것이다. 그 어떤 미혹에도 너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 가끔 엄마가 보고 싶지? 그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아저씨 같으니라고,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녀석의 명료한 이목구비는 제 엄마를 닮았다. 성격은 아마 아빠의 그것을 물려받은 것 같다.

       어린 새순이 부드러운 가시오갈피
 어린 새순이 부드러운 가시오갈피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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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오갈피 잎도 서너 개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가시오갈피는 왜 가시를 온 몸에 달고 있어야만 하는지 나는 영 모르겠단 말이야, 하는 혼잣말과 함께. 뒤를 졸졸 따르던 녀석이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여름에 닭백숙으로 인기  높은 엄나무. 어린 새순은 상추 만큼이나 연하다
 여름에 닭백숙으로 인기 높은 엄나무. 어린 새순은 상추 만큼이나 연하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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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나무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녀석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이것도 딸 거죠?"하면서 잎 하나를 뚝 따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뻗쳐서 안 돼. 가운데 우듬지께의 연두색 나는 거 있지? 그걸로 두 개만 따."

         상추와 쑥갓, 아욱, 부르클린 등을 섞어서 뿌렸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상추와 쑥갓, 아욱, 부르클린 등을 섞어서 뿌렸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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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랑 아욱이랑 쑥갓을 섞어서 뿌려놓은 텃밭에서 나는 어린 상추를 뿌리째 몇 개 뽑았고, 녀석은 쑥갓 그리고 아욱을 몇 개 뽑았다. "이만할 때는 뿌리까지 먹는 게 좋아"하고 내가 말했다. 녀석은 "저도 들었어요"했다.

       뿌리 못지않게 독특한 맛을 지닌 더덕잎
 뿌리 못지않게 독특한 맛을 지닌 더덕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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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아래로 뿌리를 내린 더덕 잎을 나도 따고 녀석도 따고 둘이서 한참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녀석의 하얀 손가락에 더덕 잎에서 나온 뽀얀 진액이 묻었다. "너 손가락이 참 길구나. 피아노 잘 쳐?" "야상곡만 죽어라고 쳐댔는데, 아직도 잘 안 나와요." "음, 그렇구나. 죽어라고 치니까 안 나오는 거 아닐까?" 그 말을 하고 이어서 살자고 쳐야 나오지 않을까, 그 말을 하고자 했지만 녀석이 먼저 해 버렸다. 그 말을 하고는 통쾌하다는 듯 크게 꾀꼬리 같은 소리로 웃어대었다.

장난감 중에서도 유독 실로폰이나 손풍금 같은 것들을 좋아하던 녀석의 어린 시절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녀석의 엄마가 소프라노 기질이 있었다. 가정 형편상 음악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한 성악가 못지않게 잘 불렀다.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공부를 딸이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었을 것이다. 친구 녀석의 말에 따르면 죽기 하루 전까지도 빌려온 악보를 손수 필사하고 있었다고 했다.

         뒤뜰 언덕배기에 지천인 머위, 여름에는 보양탕 집에서 허락도 없이 듣어가곤 한다.
 뒤뜰 언덕배기에 지천인 머위, 여름에는 보양탕 집에서 허락도 없이 듣어가곤 한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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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배기에 무성한 머위 잎 어린 것들을 몇 개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녀석은 개망초를 보더니 그것을 뜯고 있었다. "이것도 먹는 거죠?" "못 먹는 것 없다니까" 밥 냄새가 났다. 벌써 밥이 되었네, 서둘러야겠다. 안으로 들어와서 그동안 따고 뽑은 것들을 물에 씻고 칼로 종종종 썰어서 커다란 양푼에 담았다.

냉장고에서 당근도 한쪽 꺼내 잘게 썰어서 고명으로 얹었다. 이어서 참기름을 듬뿍 치고, 매실 효소 낸 것을 반 숟가락쯤 넣고, 시뻘건 고추장 두 숟갈을 넣은 뒤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을 주걱으로 퍽퍽 퍼서 얹은 다음 숟가락 두 개로 쓱쓱 비볐다.

           드디어 준비 끝
 드디어 준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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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떠하냐, 맛나게 보이지 않으냐? 입안에 가득 침이 절로 고이지 않으냐. 거봐.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꼴깍 내 귀에까지 들리네 뭘.

       마침내 완성. 잘 먹어줘서 고마웠다고, 생각을 하고자 하니 새삼 눈물이 나오려 하더라
 마침내 완성. 잘 먹어줘서 고마웠다고, 생각을 하고자 하니 새삼 눈물이 나오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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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꼴로 죽어간 그 아이의 엄마가 생시인 듯 다가와

녀석은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만족하고, 또 만족할 만큼 먹어주었다. 고맙게도 칭찬까지 해주었다. "아저씨표 제품 오래 기억할게요." 그러고는 한참 뒤에, "아저씨 저 데려다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뭐? 해도 져서 어두워지는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물었더니 원래 그럴 예정이었다고 했다. 기차표도 꺼내서 보여주었다.

"아무 데서도 집에서는 잠을 안 자고 기차나 버스에서 잠깐씩 해결하는 게 이번 제 여행의 콘셉트거든요."
"으음, 그래? 하는 수 없지 뭐. 그러고 보니 너를 믿어도 되겠다. 충분히."
"뭘 믿어요?"
"다른 뜻 없어. 너를 어른으로 본다는 것일뿐."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녀석이 뜻밖에 싸이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집에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아예 안 한다고 했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집도 있다는 것이 나는 참 새로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녀석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피아노와 컴퓨터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하자는 아빠의 제안을 자신이 받아들인 까닭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마치 헤어지기 전의 선물처럼 들려주고 나서 녀석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친구 녀석은 아직도 제 이름으로는 통장 하나 만들 수 없으니까. 세계경영을 자임하던 그룹과 거래했던 몇몇 사람들이 아직도 그날의 대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이었던 사람은 오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전용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지만.

녀석을 정읍역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친구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 그랬어?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약간의 설명을 보태주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문득 아빠는 왜 친구가 없느냐 물어서 친구 많다고 했더니 그 친구들의 목록을 죄다 내놓으라 해서 내주었다고, 아마 그 목록을 보고 찾아다니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한 마디 했다. "너도, 네 딸도, 존경할 만하다 야."

애가 학교는 어쩌고 저러고 다니느냐 묻고 싶었지만, 묻고 싶은 그 순간 그 애는 어쩌면 자기에게 맞는 학교를 이미 발견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처참한 꼴로 죽어간 그 아이의 엄마가 생시인 것처럼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친구 녀석도 아마 딸아이 여행 나선 뒤로 줄곧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달려가서 그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아마 그럴 것이다. 만나면 술병 가운데 놓고 눈물을 비쳐야 하는 친구라는 것을, 그래, 그와 나는 지금 어쩌면 그 만남을 아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저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태그:#친구 딸, #아련한 슬픔, #여행, #비빔밥, #귀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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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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