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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 위에는 방금 읽고 덮은 책, 읽고 다시 읽을 책, 곧 읽을 책 등이 노트북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책과 가까이 있을 때 나는 가장 편하다. 잠깐 외출을 할 때도 옆에 책이 없으면 허전하다. 책은 나의 최고의 친구다.

 

자매가 많은 집에서 자라다보니 언니와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낸 까닭도 있었겠지만 어려서부터 마음을 주고받을 만한 친구가 내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인 까닭도 있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사람과 사람사이엔 애증이 교차하고 갈등으로 힘들어한다. 친구라 생각했던 우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좋은 친구로 오래오래 남기란 쉽지 않은 것임을 실감한다. 특히 가치관과 사상이 다른 사람과는 잠깐 교제할 순 있어도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가기란 어렵다.

 

생각해보면, 책을 알고 책에 눈 뜨면서부터 지금까지 책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는 것 같다. 궁벽한 시골에서 자란 까닭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잦은 이사로 책과 사귈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의 유년엔 책은 멀고 자연은 가까웠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몇 권의 책 외엔 읽은 기억이 없다. 책은 이따금 스쳐지나가는 풍경이었다.

 

책과의 우정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언니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한국문학단편전집을 책장 가득 진열해 놓기 시작했고 톨스토이, 쇼펜하우어 등 철학서적들도 책꽂이에 꽂히기 시작하면서 한낱 풍경이었던 책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책을 많이 사볼 수 없었던 고교시절엔 학교에 가면 학생증을 들고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것이 맨 먼저 하는 일이었다. 시집을 빌려 대학노트 한권 가득 시를 베꼈고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소개하는 책을 메모했다가 꼭 빌려보곤 했다. 문학소녀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책과의 만남이 더 깊어간 것은 오히려 학창시절보다 결혼을 한 후부터였다. 책임은 많은데 나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은 절박함과 숨 막힐 듯한 현실 앞에서 나는 책을 붙잡았다.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 속에서 내 안의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옷 하나, 책 한 권 내가 나를 위한 선물을 해 주지 못하고 살면서 나는 대신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을 때가 많았다.

 

나는 너무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면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런 날엔 책의 숲을 거닐면서 그동안 내가 사고 싶어도 사지 못했던 책들을 몇 권 사 버렸고 그때 그렇게 사 모은 책들이 하나 둘씩 책장을 채워갔던 시절이 있었다. 책사기는 유일한 나의 사치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책의 향기가 그리울 땐 책의 숲, 서점으로 향한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점 가득 빼곡히 들어찬 책들은 화석처럼 핏기 없이 깊은 침묵에 싸여 있다가 부산하게 몸을 일으키는 소리를 낸다. 오랜 시간동안 사람 눈길, 손길 닿지 않았던 책들은 죽은 시체들처럼 깊은 침묵으로 쓰러져 있었다. 내 시선이 닿고 내 눈길 한 번 부딪치면 마른 뼈들이 연결되는 소리, 형체를 갖추고 근육이 붙고 피가 돌고 생기를 입어 살아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의 손에 닿고 그것이 선택되어졌을 때,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하고 피가 돌고 맥박이 뛴다. 그 수많은 책 속의 사연 사연과 그것들의 생애와 역사가 오래 참았던 숨을 훅~크게 내쉬며 말을 쏟아내는 것 같다. 나는 책들 사이를 천천히 배회하며 그것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서점(혹은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하고 있는 책들의 마음이 읽혀지는 듯 하다. 책은 기다림에 익숙하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오른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네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을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책의 숲, 책의 바다로 간다. 책의 숲에서 마음껏 책 향기에 취한다.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주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발품 팔아 서점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것들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 인기척, 숨소리를 감지라도 하듯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듯 하다. 일제히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듯 하다. 나는 그것들의 역사, 그 모든 책들의 사연과 사연을 다 들을 수는 없기에 내 마음에 와 닿는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날 때에도 곁에 있었던 것은 책이었다. 내 인생의 깜깜한 밤에도, 잠 못 드는 깊은 밤에도 변함없이 내 곁에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길 위에서 길을 잃었을 때, 지워진 듯 한 길 위에서 책을 통해 숨을 쉬었고 가만가만히 숨 고르며 견뎠다. 현실의 각박함과 고달픔 속에서 책은 나의 도피처요 위로였다.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듯한 일상을 환기시켜주는 그 무엇이었고 산소였으며 향기였다.

 

책을 펼치면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책 속에서 내가 알지 못한 세계로 확장된다. 깊어진다. 책은 가장 오랜 지기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기쁜 친구, 책과 함께라면 오리든 십리든 평생길이든 즐겁다. 오늘도 우린 함께 해서 좋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 그 향기로운 친구와 기쁘게 동행한다.


태그:#책,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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