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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미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타오른 지도 2년이 됐습니다. 진보와 보수할 것 없이 모든 언론들이 '촛불 2년'을 조명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 등 일부 보수언론은 촛불 참가자들의 발언을 왜곡 보도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인터넷카페, 동호회 회원과 지역촛불 주인공들, 촛불 소녀,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사람들과의 3차례 방담을 통해 '촛불 2년'의 진정한 의미와 '촛불, 그 후'의 삶을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우리는 지금도 계속 끓고 있는 것 같아요. 촛불 때는 미국산 쇠고기라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가 있어 광장에서 끓는 모습이 가시적으로 보였던 거죠. 지금은 끓는 모습을 광장에서 볼 수 없지만 트위터나 인터넷에서 '왜 내가 가진 상식에 따라 어떤 일을 할 수 없는가'에 대해 서로 대화할 때, 끓고 있다는 걸 느껴요." (모리)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 시청으로 '출근'하며 촛불을 들었던 여성 3인. 왠지 비장함이 넘칠 것 같았지만, 만나 본 이들은 자유롭고 편안한 '보통사람'들이었다.

 

'촛불이 끝난 뒤 기분'을 묻자 "촛불이 끝났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으는 세 명의 촛불 하토르(31·개념찬 언니들), 내추럴(31·전 구로 금천 지역 촛불), 모리(28·8·15 평화행동단)를 지난 4월 29일 낮 12시 신도림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울컥하면 KTX 타고 서울로... 춤추러 촛불 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매일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이들은 당시 평범한 학생이었고 직장인이었다. 누군가는 직장을 마친 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으며 다른 누군가는 집회 방송을 보다 울컥하는 마음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 어떤 계기로 촛불 집회에 참여하게 됐나?

모리 : "그때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프리카'로 방송을 보다가 울컥하면 KTX를 타고 서울로 왔다. 일주일에 3~4번씩 온 적도 있다. KTX 타고 왔다가 밤새고 아침에 다시 KTX를 타고 가는 거다. 집은 광명시 철산동에 있었지만 거기 들어가면 부모님이 의심하니까 학교로 바로 돌아갔다."

내추럴 : "미국산 쇠고기로도 내 가족이 피해를 입지만 내가 제일 큰 문제로 본 것은 의료 민영화였다. 우리 엄마가 아파서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의료뿐만 아니라 수도 등 각종 민영화로 나는 물론 다음 세대들도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토르 : "나는 대운하에 민감했다. 지금 4대강 사업을 꼭 하겠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처하는 방식이 지도자답지 않았다. 솔직히 그 정도로 폭력적이지 않게 대처하는, 좀 더 세련된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이렇게 문제제기가 안 됐을 것 같다."

 

이들이 심각한 이유만으로 집회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촛불집회가 "재미있어 보였다"는 이색적인 이유도 있었다.

 

모리 : "맨 처음 나오게 된 건 재미있어 보여서였다.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사람들 발언이 너무 재미있었고 사람들이 대의제를 뛰어넘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대의제 안에서 어떤 의견을 내면 묻히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촛불 집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고라에서 하는 말과 거기에서 이뤄지는 것들이 직접적이고 동시성 있게 연결 되더라. 새로운 체험이고 오락이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책 제목처럼 촛불은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모습 같았다. 나는 거기에 춤추러 들어갔던 거다."

 

"물 맞은 사람들에게 국 끓여다 준 주민, 천사 같았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2008년 5월 31일과 8월 15일 이야기로 흘러가자 세 사람은 앞 다퉈 그 날의 기억을 쏟아냈다.

 

'촛불집회 중 인상적이었던 날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셋이 답한 기억도 모두 그 이틀에 집중돼 있었다. 5월 31일은 촛불집회 진압에 물대포가 처음 사용된 날이고, 8월 15일은 '파란 물대포'가 등장한 날이다.

 

내추럴 : "물대포가 나온 5월 31일, 내 옆에서 여기자가 날아가는 걸 봤다. 덩치 좋은 남자도 못 이기던 물대포였는데, 카메라 들고 서 있던 여기자가 그걸 맞고 날아가 쓰러졌다. 그 날 물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모르는 사람끼리 우산도 같이 쓰고…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무조건 물대포를 쏴 댔다."

하토르 : "그날 물대포가 정말 심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날 못 나왔는데 전화 통화한 사람이 '사람들 얼굴이 파래질 정도로 너무너무 춥고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앞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이 국을 끓여 갖고 나와서 퍼 줬는데 그 분이 천사처럼 보였다고 하더라."

모리 : "어떤 사람은 봉고차 뒤에 헌 옷을 싣고 나와서 나눠 줬다. 과자, 물 등을 나눠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도대체 누가 이걸 알고 갖다 주나 싶었다."

내추럴 : "8월에 제일 많이 봤던 건 파란 물이다. 7월에 집안 사정 때문에 집회에 못 나갔다가 8월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온 사방이 파란 물이었다."

하토르 : "그게 8월 15일이었다. 그날이 잊혀지지도 않는데 사진도 많지 않나. 사람들이 앞에 연좌해 있고 거기로 파란 물을 쫙 쏘는 장면을 담은…."

모리 : "그날 앞에 연좌해 있던 사람들 중 한명이었는데 파란색 물대포가 어떻게 보면 웃기기도 하다. 사람들을 파랗게 물들여 잡아간다는 발상 자체가. (길에서)떡볶이 먹다가 (파란물이)튀어서 잡혀간 사람도 있지 않았나."

 

 

"TV도 안 보고 살던 내가 '정치적'으로 변했다"

 

촛불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이들은 원래부터 사회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촛불 이전엔 이런 활동들 안 하고 얌전히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니고 했다"(하토르), "나도 신문, 뉴스를 안 보고 살았다, 자취방에 TV까지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모리), "나도 마찬가지다"(내추럴) 그러나 촛불 이후 이들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 촛불로 인해 어떤 변화가 있었나?

모리 : "인생의 극적인 변화 같은 것보다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이 조금씩 변했다. 삶이 '정치적'이게 됐다고 할까. 누구를 지지한다는 식의 정치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때에도 '이게 옳은가, 이렇게 사는 게 사회에 옳은 건가'하는 생각들이 많아졌다. 머리가 아파진 건데.(웃음) 채식주의자 친구를 만나서 채식에 대해서 생각하는 등 고민할수록 내가 사회와 얼마나 연결돼 있는지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내추럴 : "옛날에는 언론사에서 얘기하면 그런가 보다하고 수긍했다. 그런데 촛불을 들고,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내가 좋아하는 신문들에 대해서도 이 신문을 100%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토르 : "촛불을 경험한 뒤 내 자신에 대한 자신이 생겼다. 사실 나는 이런 데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나는 겁이 많다. 내가 전경들이나 구조적 폭력 같은 데 맞서서 뜻을 지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 있었는데, 지금은 한 번 그랬으니까 그 다음에 옳지 못한 것을 봤을 때 다시 의견 표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다."

 

이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촛불집회였지만 집회 참여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촛불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자신들 사이에 생긴 갈등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내추럴 : "내가 미치도록 나섰는데 우리 가족들한테 인정도 못 받고… 작은 언니는 '또 소몰이 하러 가냐'고 그러더라, 큰언니와는 '너 하나가 나가서 바뀌는 게 뭐냐, 나 하나라도 나가서 바뀌는 거다'하면서 많이도 싸웠다."

하토르 : "나는 아버지한테 '나는 저 꼴 보고 못 산다'고 말씀드렸다."

모리 : "나는 집에 숨기고 다니다가 8·15 연좌로 연행되면서 들켜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집회에서 맞거나 끌려가는 건 굉장히 큰 상처인데 집안에서까지 압박을 받는다는 건 이런 육체적·심리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곳이 없다는 거다. 그래도 촛불을 들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큰 힘이 됐다. 서로 얘기하고 그림 그리면서 치료하고 '그때 누가 내 옆에 있었다,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면서 서로 치료가 됐던 것 같다."

 

"병원 청소 할머니 오물 처리실 옆에서 식사 하더라"

 

이야기는 2년이란 시간을 지나 2010년에 까지 와 닿았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를 모시며 2008년 당시 의료 민영화에 반대해 촛불을 들었던 내추럴씨와 의대 출신으로 지난 1년 동안 인턴 생활을 했던 모리씨는 병원 청소를 하는 할머니들의 열악한 환경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추럴 : "엄마가 병원에 있어서 나도 한양대 병원에서 좀 지냈다. 병실 청소를 60~70대 할머니들이 하는데 하루는 우리 병실에 오는 할머니가 '우리 내일부터 못 나와요'하더라. 왜냐고 물었더니 회사가 구조조정을 한다고 갑자기 잘랐다고 했다. 운영상 해고 했다는데 그 다음부터 다른 할머니들 일이 늘어났다. 일은 늘어나는데 사람은 줄어드니 그 뒤 병실이 더 지저분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분들은 쉴 수 있는 공간도 없다. 환자들 대소변 버리는 곳 바로 옆에 박스를 쌓아 놓는데 거기에서 쉬더라. 지금도 그분들에 대한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모리 : "작년 한 해 인턴으로 일했다, 수술실에 일하는 '여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오물도 치우시고 피도 닦고 하신다. 우리 병원이 일하는 직원들한텐 점심 식사를 공짜로 제공했다. 나는 일하는 사람한테 다 제공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청소하시는 분들은 용역업체 직원이라고 아예 그런 게 없고 따로 점심시간도 없었다. 틈 날 때 밥을 먹는 데, 장소가 따로 없어서 오물처리실 옆에 식염수 쌓아놓는 곳 박스 위에서 밥을 드시더라."

 

의료민영화에 있어서도 둘은 의견을 같이 했다.

 

내추럴 : "의료민영화가 되면 보험도 사람을 가려서 들게 할 거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보험회사에서 거부한다. 건강보험이 있어서 그걸로 하는 거지, 민영화가 되면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게 뻔하다. 지금도 보험회사는 의료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게 하려고 머리를 쓰는데 민영화 되면 정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게 된다는 거다."

모리 : "의료민영화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국민의료보험이 확대되고 보장되는 쪽으로 가야하는데 의료민영화 얘기가 나오고 사기업 배를 채우기 위해 국민 건강을 희생하는 쪽으로 가려는 게 보이기도 한다. 의대 다닐 때 조사·발표를 하면서 더 잘 알게 된 면들도 있는데 의료민영화가 됐을 때 얼마다 더 비참한 일이 일어날지 걱정스럽다."

 

"끓을 준비가 돼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끓고 있다"

 

촛불집회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촛불집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하토르 : "일종의 68혁명이라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시발점이고 시민들이 사회와 시민단체 등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메시지 같다. 그동안의 일을 통해 그런 것 느끼지 않았나? '진보, 좌파 그런 종류의 얘기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잘못된 시위라 해도 전경이 우리를 때릴 수 없고, 분향소를 차린다 해도 저렇게까지 할 수 없는데 저런 비상식적인 일이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그런 느낌. 나만 해도 끓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이 지금 상황이 좋아서 있는 게 아니다. 우리한테 다시 공감할 의제를 주면 다른 어떤 것이 또 나올 거라 생각 한다."

 

모리 : "나는 조금 틀어서 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 끓을 준비가 돼 있는 99℃가 아니라 계속 끓고 있는 것 같다. 촛불 때는 미 쇠고기라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가 있어 광장에서 끓는 모습이 가시적으로 보였던 거다. 지금은 끓는 모습을 광장에서 볼 수 없지만 트위터나 인터넷에서 '왜 내가 가진 상식에 따라 어떤 일을 할 수 없는가'에 대해 서로 대화할 때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끓고 있는 걸 느낀다. 지금은 우리 삶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권리에 대해 다들 인식해 가고 있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촛불보고 반성하라? 이 대통령은 참이슬 불며 촛불 구경했나 보다"

 

천안함 추모 촛불이 탄압당하고(모리), MBC가 공영 방송의 자리를 위협받는 것을 볼 때(하토르, 내추럴) 다시 촛불을 들고 싶었다는 3인. 그들을 만나고 나서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10일부터 <조선일보>에서 촛불 2주년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해당 보도들은 지금 왜곡 논란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다.

 

방담에 참여했던 3인방에게 <조선일보> 보도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12일, 기자가 다시 연락해보니 하토르, 내추럴, 모리 등은 <조선일보> 기사에 대해 '어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내추럴은 "<조선일보>는 전 정권 때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논조의 기사를 내보내더니 현 정권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논조의 기사가 가득했다"며 <조선>의 태도 변화를 꼬집었다.

 

"<조선일보>는 기사의 일관성이라는 원칙조차 저버렸다. 우리는 선동이나 광기가 아닌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건강한 먹을거리 보장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거짓 기사로 촛불을 모독하는 일은 그만둬야 한다."

 

하토르 역시 '너 예전엔 그렇게 LA갈비를 좋아하고 많이 먹었으면서 왜 지금 그러느냐'는 <조선일보> 기사 구절에 대해 "LA갈비는 미국산이란 뜻이 아니라 갈비 써는 방향에 따라 붙는 이름"이라고 말하며 "퍼센트를 가지고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을 보다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도 나왔다. 모리는 "이 대통령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은게 아니라 참이슬을 나발로 불며 촛불 구경을 했나 보다"며 "촛불더러 반성하라니 필름이 끊겨서 그때 사과한 건 기억이 안 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해당 기사는 결국 '촛불의 회개'를 강요하는 것 같다"면서 "이것이 성공하면 '좌빨'에 홀렸던 과거를 참회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겠지만 실패한다면 이들의 왜곡에 발끈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말의 통로들을 메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거짓말 하지 말 것, 남한테 반성하라고 하지 말 것, 함부로 촛불 건드리지 말 것' 이 세 가지가 멍청한 이들이 자꾸 까먹는 교훈"이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촛불 2주년, 저질스런 촛불 담론을 저들이 먼저 열었지만, 그 잠잠할 것 같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을 저들은 곧 후회하게 될 지 모른다."


태그:#촛불, #쇠고기 ,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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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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