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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의 외출' 닷새째인 9일(금요일)은 몸을 둘로 나눠 움직여야 할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딸과 함께했던 신 변호사와 점심. 남산 한옥마을 관람. 조카 아파트 방문 등 정신없이 돌아다녔는데, 모두 초행길이어서 더했을 것이다.

한글 예서체로 음각한 ‘남산골한옥마을’ 현판
 한글 예서체로 음각한 ‘남산골한옥마을’ 현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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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조금 넘어 신 변호사와 헤어져 매형이 만나자는 남산 한옥마을에 가려고 강남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충무로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 골목길로 들어가니까 남산 한옥마을이었다.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지옥철'이라고 부른다. 공감을 하면서도 10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는 딸과 동행하면서 세상을 얘기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재미는 또 다른 감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행복감을 맛보기도 했는데, 각자 처한 상황과 생각에 따라 '지옥철'도 되고 '행복철'도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71년 1월에 자그만 가게를 개업해서 운영하다가 72년 4월에 규모가 큰 가게를 인수하면서 서울에 자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가는 곳이 한정돼 있다 보니 문화시설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해서 시간이 허락하면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욕심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남산 한옥마을에서

천우각 앞 호수에서 노니는 금붕어들. 물은 탁했지만, 꼬리치며 오가는 금붕어들 모습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였다.
 천우각 앞 호수에서 노니는 금붕어들. 물은 탁했지만, 꼬리치며 오가는 금붕어들 모습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였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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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에 도착하니까, 막내 매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한옥들과 선조들이 유유자적하던 정자, 호수에서 노니는 금붕어들을 보니까 나 자신이 한량이라도 된 것처럼 육자배기든 유행가든 한 곡 부르고 싶었다.

딸이 누님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니까 객지에서 친딸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먼저 둘러본 누님 일행은 조선시대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였던 '천우각'에서 쉬기로 하고, 나는 딸과 함께 고풍스러운 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전통정원 남쪽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이 지하 15m 지점에 매설돼 있다고 하는데,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와 윤 황후의 친정아버지 해풍 부원군 윤택영댁 재실을 둘러보고, 굴렁쇠 놀이를 하는 등 시간여행을 즐겼다. 

# 순정효황후 친가  

순정효황후 친가 앞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전경, 서울에도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있다니 놀라웠다.
 순정효황후 친가 앞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전경, 서울에도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있다니 놀라웠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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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 윤씨(尹氏)가 출가하기 전까지 살았던 이 집은 본래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는데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 본떠 이곳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ㄷ'자형 몸채 안쪽에 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구조와 건축방법 및 사용된 재료를 사용해 별궁처럼 보이기도 하는 당시 최상류층 저택으로 지어졌다.

순정효왕후 친가 내실과 부엌 내부 모습. 내실이나 부엌이나 어렸을 때 많이 봤던 풍경이었다.
 순정효왕후 친가 내실과 부엌 내부 모습. 내실이나 부엌이나 어렸을 때 많이 봤던 풍경이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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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황후는 고종 31년(1894년)에 윤택영의 딸로 태어났다. 순종의 첫 번째 황태자비 순명효황후 민씨가 광무 8년(1904년) 33세로 승하하자, 1906년 13세의 나이로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윤 황후는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 조약에 도장을 찍을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내시가 들고 오는 국새를 가로채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망국 후 일제의 침탈행위를 경험했으며, 소생 없이 살면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말년에는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귀의해서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66년 71세 때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기품을 잃지 않았으며 순종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유릉에 묻혔다.

# 윤택영(순종의 장인)의 재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24호) 해풍부원군 윤택영(순종의 장인)의 본가
 서울특별시 민속자료(24호) 해풍부원군 윤택영(순종의 장인)의 본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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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 부원군 윤택영(순종의 장인) 재실은 주인마님이 거처하는 안채, 바깥주인이 생활하는 사랑채, 노비와 사역인이 거처하는 행랑채,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 사당으로 통하는 사주문으로 되어 있었으며 역시 복원한 가옥이라고 한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순종의 장인) 재실
 해풍부원군 윤택영(순종의 장인)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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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민속자료(24호)인 윤 부원군 재실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는 동대문구 재기동에 있었는데,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며 옮겨졌다고. 건물 배치는 으뜸 원(元)자 모양이며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대칭되게 만들면서도 내부 공간 쓰임은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윤 부원군 본채는 1고주 5량 가에, 앞채는 3량 가이며, 집터보다 한 층 높이 쌓은 장대석 기단과 네 모 반듯한 모양의 초석이 위엄 있게 보였고, 일부는 둥글게 만든 굴도리를 사용해서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남산골 한옥마을 '리플릿' 참고).

# 굴렁쇠 놀이

한참 돌아다녔더니 발바닥이 아팠다. 해서 잠시 쉬는데 꼬마들이 마당에서 굴렁쇠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닥이 평평함에도 1분을 넘기지 못하고 굴렁쇠가 바닥으로 뒹굴었고, 꼬마들은 그래도 재미있는지 계속 굴리기를 시도했다.

금방 넘어져도 재미있어하며 굴렁쇠 놀이를 하는 꼬마들
 금방 넘어져도 재미있어하며 굴렁쇠 놀이를 하는 꼬마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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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동했는데, 굴렁쇠는 어렸을 때 길동무나 다름없는 놀이기구였다. 특히 자전거 바퀴로 만든 굴렁쇠는 중앙이 옴폭 패어 잘 넘어지지 않고 막대로도 굴릴 수 있어 배우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자갈길이든 골목길이든 심부름을 갈 때 굴렁쇠를 굴리고 가면 먼 거리도 언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철사를 'ㄷ'자로 구부려 만든 손잡이가 닳아 끊어지면 또 만들었으니 굴렁쇠를 얼마나 굴리고 다녔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지나가던 외국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꼬마들이 굴렁쇠 하는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저것이 무엇 하는 거냐고 묻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옆에 있던 딸이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느냐고 묻기에 설명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마에게 다가가 "어디 아저씨도 한 번 해보자!" 하고 굴렁쇠를 넘겨받으면서도 혹시나 했다. 그런데 50년 전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굴리고 다니다 보니 좋아하며 따라다니던 꼬마들과 어느새 굴렁쇠 친구가 되어 버렸다.

처음엔 조금만 해보려고 하다가 재미가 붙으니까 꼬마들에게 굴렁쇠 하는 요령을 알려주면서 더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운동이라고 조금 하니까 땀이 나고 숨이 차올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처음 방문했던 조카 아파트

오후 5시가 되어가기에 한옥마을에서 나와 누님들과 함께 조카(셋째누님 딸)가 사는 상가아파트에 들렀다. 그런데 조카는 인쇄물 배달을 나가고 조카사위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좁은 집에서 작업도 하고 네 식구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조금 있으니까 조카가 꼬들꼬들하게 말린 과메기와 막걸리 몇 병을 가슴에 품고 활짝 웃으면서 들어왔다. 조카는 "오시려면 언제 온다고 연락을 해야 음식도 준비하고 다들(사촌들) 오라고 명령을 내리든가 하지요!"라며 나에게 책망 아닌 책망을 해댔다.

먹음직스러운 족발. 족발에 막걸리를 마시다보니 라면이 먹고 싶어 이날 저녁은 라면으로 해결했다.
 먹음직스러운 족발. 족발에 막걸리를 마시다보니 라면이 먹고 싶어 이날 저녁은 라면으로 해결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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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상에 오른 과메기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며 다가앉아 김과 다시마에 싸먹었다. 맛있다며 연거푸 싸먹은 딸이 처음 보는 거라며 무슨 생선이냐고 묻기에 "아니, 대학 나온 사람이 과메기가 무슨 생선인지도 모르느냐!"고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과메기는 금방 바닥이 났고, 돼지족발을 사 와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카가 저녁을 먹자고 하기에 라면이나 삶아달라고 해서 먹고 나왔다. 조카는 따라나오며 다음엔 사촌들을 소집해서 막걸리 한 잔 마시자며 꼭 전화해달라고 당부했다. 

딸과는 사당 전철역에서 헤어졌다. 다음 주와 다음다음 주에 올릴 작품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침에 나올 때는 평택 막내 누님 집으로 가서 하룻밤 함께 지내려고 생각했는데 서운했다. 

딸과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고, 지하철 소음조차도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도 지하철은 달리고 달려 밤 8시 조금 넘어 평택역에 도착했고, 막내 누님 집에 들어가니까 뻐꾸기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까 피곤이 밀려오면서 아무것도 먹기가 싫었다. 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양말과 내복을 세탁하고 들어와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 가을 이후 6년 만에 이루어진 외출에서 의왕 철도 박물관, 서울대공원, 옛 친구와의 만남, 남산 한옥마을 탐방, 강정구 교수 강의 참석, 수원 화성 시티투어 등을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6-7회 정도로 나눠 담아보려고 합니다.



태그:#여행, #남산한옥마을, #조카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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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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