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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책읽기란 삶읽기

 

<숲 속 수의사의 동물일기>를 쓴 일본사람 다케타쓰 미노루 님은 <아기 여우 헬렌>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일본땅 훗카이도에서 짐승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 만큼 당신 삶을 글과 사진으로 적바림하면 고스란히 고운 책으로 태어납니다. 삶이 곧바로 책입니다.

 

사진쟁이 노익상 님이 써낸 <가난한 이의 살림집>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펼치는 내내 마음이 거북했습니다. 대학 교수님이나 학자님이란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고 푸념하면서 쓴 이 책인데, 노익상 님이 쓴 이 책을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을 만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으면 저절로 사진이든 글이든 쏟아져나오면서 고스란히 어여쁜 책으로 태어나는 줄을 모르고 있을까요.

 

200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사람 프랑소아즈 사강 님은 젊은 날에 당신 술버릇을 다스리려고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느끼고 겪고 생각한 이야기를 짤막한 글로 남겼고, 이 글조각은 <사강의 환각일기, 독약>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딱히 내세우려고 쓰는 글이 아니요, 부끄럽거나 쑥스럽다 할 이야기를 버젓이 보여주는 글이 아닙니다. 프랑소아즈 사강이란 한 사람이 어떠한 목숨이고 어떠한 결로 삶을 꾸리는가를 꾸밈없이 담는 글입니다.

 

제리 핑크니 님 그림책 <사자와 생쥐>는 글 한 줄 없이 그림으로만 엮었습니다.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을 읽히려면 어버이 되는 분은 스스로 이야기를 짜며 말을 새롭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느껴도 좋습니다. 이 그림은 무엇이고 이 대목은 무엇을 뜻한다는 이야기를 꼬치꼬치 따지면서 말로 옮겨야 하지 않습니다.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점으로 얼마나 숱한 이야기를 담아내는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책읽기란 다름아닌 삶읽기임을 깨닫습니다.

 

북녘땅을 떠나 남녘땅으로 들어온 푸름이들 이야기를 담은 <꽃이 펴야 봄이 온다>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을 오롯이 푸름이들 여린 목소리로만 담았으면 한결 좋았으리라고. 북녘을 떠난 푸름이들을 반드시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눈길로 어줍잖게 보듬으려는 남녘 어른들 어설픈 글과 생각이 곳곳에 끼어들면서 북녘 푸름이들 맑은 넋이 자꾸자꾸 움츠러든다고 느낍니다. 예쁜 옷을 입히면 사람이 예뻐 보일 수 있다지만, 예쁜 옷이라는 잣대는 무엇이고 예쁘지 않은 옷을 입히면 사람이 안 예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한 사람이고 한 목숨이며 한 푸름이입니다. 스스럼없이 마주하여 즐거이 손을 맞잡으며 땀흘려 놀고 일하면 넉넉합니다.

 

책 하나란 이 책 하나에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채워 넣는 사람 삶을 담습니다. 잘난 삶이건 못난 삶이건 따로 살피지 않습니다. 책으로 엮어 나눌 만한 삶이냐 아니냐만을 살핍니다. 이에 따라 잘 팔아치울 삶이야기라 여길 수 있고, 안 팔리더라도 나눌 만한 뜻있는 삶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우리들 또한 돈 몇 푼짜리 이야깃거리를 얻는 책으로 삼을 수 있는 한편, 이웃사람 삶을 들여다보는 이음고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책을 쓰든 책을 읽든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삶을 꾸리고 삶을 읽습니다. 삶이 있기에 책이 있고, 삶에 따라 책 빛깔이 사뭇 달라집니다.

 

ㄴ. 삶읽기란 책읽기

 

지난 2003년에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 이야기>(디새집)라는 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할머님 삶을 다룬 책으로, 할머님 한 분 한 분 이야기란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는 속뜻과 줄거리를 책이름이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으로 나오고 그쳤습니다. 틀림없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할머님 이야기요 삶이라 한다면 작은 책 하나로 그칠 노릇이 아니라 꾸준하게 하나씩 내는 한편, 숱한 할머님 삶을 잡지로든 책으로든 담아낼 노릇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해 나라 안팎에서 수많은 잡지가 나옵니다. 여성잡지라는 이름으로 여성한테 물건을 팔아치우려는 광고 가득하고 두툼한 책이 꽤나 많이 나옵니다. 이 여성잡지에는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 이야기'란 하나도 안 실리며, 오로지 연예인 앞이야기와 뒷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둘레에서 아이를 두셋 키우는 어머님을 마주할 때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셋넷을 키우거나 너덧을 키운다면 더없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예닐곱 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낳아 키웠다고 하는데, 아이 하나 키우는 몸으로 돌아보자니 참으로 등허리가 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 여러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서 살아가셨을까요. 오늘은 아침부터 집안을 쓸고 닦은 다음에 아이 기저귀와 옷가지 빨래를 하면서 아이를 씻기고 이불 한 채를 빤 다음 밥과 찌개를 해서 아이한테 먹이고, 밥을 제대로 안 먹는 아이한테 땅콩을 씹어서 먹입니다. 아이는 집안에만 머물 수 없어 이제 곧 옷을 입히고 바깥마실을 다녀와야 합니다. 아이도 아이이지만 아침부터 아이하고 씨름을 하는 애 아빠도 바깥바람을 쐬고 싶습니다. 며칠 날이 잔뜩 찌푸렸다가 오늘은 아주 말끔히 개고 따뜻하기에 더더욱 집에 틀어박히기보다 사진기 들고 아이를 걸리며 동네 골목마실을 하고 싶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나갈까 싶을 때 아이가 포대기를 들고 와서 아빠한테 내밉니다. 업어 달라고 합니다. 졸린가? 아이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감쌉니다. 아이는 아빠 등에 볼따구를 댄 채 가만히 있다가 웃다가 아빠 등을 손으로 치다가 합니다. 하기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새벽 여섯 시 조금 넘어 깨어난 아이는 낮 열두 시가 다가오도록 졸린 눈으로 잠을 안 자고 물놀이를 하고 밥장난을 했으며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이제라도 한숨 돌리며 아침잠을 자 줄 만합니다. 아니, 이렇게 자 준다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이 나라 애 아빠 되는 분들이 얼마나 아이를 보살피면서 하루 삶을 보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 아빠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더러 보기는 하지만, '육아일기'라 하면 으레 애 엄마만 쓰는 줄 압니다. 애 엄마가 쓴 아이 키우는 이야기는 가끔 책으로 나오지만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여자 이야기'로 다가서지는 못하고 '육아 지식 백과'에 가 닿으려고만 할 뿐입니다.  숱한 실용처세 책 가운데 하나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쓸 뿐입니다.

 

소설쟁이나 학자 한 분이 온삶을 걸쳐 책 백 권을 쓴다면, 애 엄마 된 분들은 온삶을 걸쳐 책 천 권을 써낼 수 있습니다. 아이 보고 살림 꾸리랴 글 쓸 겨를이 없어 그렇지, 이웃과 나누는 이야기(수다)가 바로 책이요 삶이며 웃음과 눈물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태그:#책읽기, #삶읽기, #책으로 보는 눈, #책이야기,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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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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