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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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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지금 어디를 만지는 거예요."
"아니, 만진 게 아니라 막은 겁니다."
"막긴 뭘 막아요? 아까부터 내 엉덩이 힐끔거렸잖아요. 변태 같은.… 아저씨, 경찰서로 가주세요!"

MBC 수목드라마 <개인의 취향> 1회에서 전진호(이민호 분)가 '버스 변태'로 오해받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건축모형이 부서지는 걸 막기 위해 넘어지는 박개인(손예진 분)의 엉덩이를 양 손으로 막았던 것. 박개인은 "경찰서로 가자"고 목청을 높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전진호의 엉덩이를 만지며 똑같이 '복수'하는 걸로 끝낸다.

물론 전진호가 진짜 변태는 아니었지만 성추행 당했다고 느끼는 박개인 입장에선 통쾌한 복수였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에서 '진짜 변태'와 맞닥뜨렸을 때 박개인처럼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내 경우가 그랬다.

그놈 본색, 알아차릴 땐 이미 늦었다

대표적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 사람들이 많이 탄 버스에선 종종 불쾌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표적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 사람들이 많이 탄 버스에선 종종 불쾌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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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어느 겨울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과 겹친 탓인지 버스 안에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사람들 틈에 서서 간 지 10분 쯤 지났을까. 느낌이 이상했다. 뒤에 선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내 곁에 바짝 붙은 기분이 들었던 것.

버스 안이 붐비긴 했지만 다른 이와 그렇게 밀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공간이 없진 않았다. 분명 '불순한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 내 등 뒤로 가까이 붙어 선 그 사람은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이 꽤나 드신 양반이 딸뻘 되는 학생한테 그러고 싶으세요?'

마음 속으로 이 말이 100번은 메아리 쳤지만 정작 입에서는 한 마디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 뒤에 바짝 붙어 '변태짓'을 해대는 그 남자에게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불결한 접촉을 피해 오른쪽, 왼쪽으로 간신히 비켜서던 나는 몇 정거장 뒤, 유유히 버스에서 내리는 40대 후반의 그 남자를 빤히 지켜보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따라 내려가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마디로 '멍' 때리고 있었다.

'변태를 만나면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혼쭐을 내줘야지'라고 친구들에게 훈수를 뒀던 그 잘나고 당찬 나는 어디로 갔는지. 생각과 실제는 많이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졌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들어서니 눈물부터 났다. '놀라서'가 아니라 '분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왜 바보 같이 아무 말도 못하고' 하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다시는 그렇게 바보 같이 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해 봐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그 전의 내가 아니었다. 만원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긴장했다. 버스가 정차하고 하차할 무렵 사람들이 쏠릴 때마다 등 쪽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처럼 무슨 일이 또 생기진 않았다. 3년 동안은. 3년 후 비로소 '버스 변태'에 대한 한을 풀 기회가 왔다. 그날이 왔다.

엉덩이에 스친 낯선 감촉, 너냐? 잘 만났다

ⓒ 막돼먹은 영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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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 시절, 나는 여느 졸업 예정자들처럼 몇 개 안 되는 수업을 마치고 이른 하교를 하고 있었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는데 학교에서 역까지의 거리가 애매해 종종 마을버스를 이용하곤 했다.

그날도 마침 학교 앞 정류장에 버스 한 대가 서 있어 아무 주저 없이 올라탔다. 버스는 그야말로 '만차'였다. 검정색 크로스백을 대각선으로 메고 동생과 통화를 하고 있던 나는 잊었던 기억이, 잊었던 감촉이 되살아나는 걸 직감했다. 엉덩이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젠장, 또 그분인가?'

그러나 3년 전, 처음 만났던 변태와 달리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원체 많으니까 다른 이의 가방이 엉덩이에 닿았나 보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옆으로 비켜설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유난 떠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말았다.

신호등 두 개를 지나고 역을 100m 정도 남겨뒀을까. 뒤에 서 있던 그 남자는 버스 종점인 역이 가까워오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행동'에 들어갔다. 이건 100%다. 그 순간, 나는 동생과의 전화를 끊고 뒤돌아 그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나의 돌발 행동에 나도 놀랐다. 호신술 하나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놀란 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토끼 눈이 되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버스가 역에 도착했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 손을 뿌리치고 뒷문으로 황급히 내리려는 그 남자에게 나는 옆차기를 날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뒷문으로 허겁지겁 내리던 남자를 쫓아 급히 앞 문으로 내렸지만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골목 사이사이를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유쾌·상쾌·통쾌한 변태 퇴치 사례를 들려주세요

'버스 변태'를 아깝게 놓친 나는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학교에 다녔다. 아마도 내게 혼쭐난 덕분에 당분간 변태 짓은 삼갔을 테지만, 역 앞 경찰서에 넘기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다.

변태를 만난 대다수의 여자들은 일단 피하고 본다. 그들에게 '비겁하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처음 그런 상황을 마주한 공포가 어떤 것인지 나 역시도 절실히 체험했으니. 그런데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상황은 반복된다. 그래서 조금 용기가 필요하다, 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그 상황에서 내 주먹이, 내 발이 먼저 반응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처음 변태를 만났을 때처럼 그냥 참고 말았다면 또 분노의 눈물을 흘렸을 거다. 그리고 아무 잘못한 것 없이 이전보다 버스 안에서 더 위축된 나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 남자는 '즐기며, 웃고 넘겼을' 그 일 때문에.

물론 당장은 창피하고 부끄럽게 생각되지만, 나같은 여자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인도 여행 길에서 뻔뻔한 변태 퇴치에 성공한 지인의 경험담을 전한다. 나보다, 이보다 더 유쾌·상쾌·통쾌한 변태 퇴치 사례를 남겨 한바탕 크게 웃어보시길. 부디, 건투를 빈다.

"밤에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문득 허벅지 느낌이 이상한 거야. 눈을 떠 봤더니 옆에 앉은 인도 남자가 내 허벅지를 만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도 같이 그 남자 허벅지를 만지면서 물었지, "좋아?" 그랬더니 그 남자 기겁을 하면서 손을 치우고 자는 척 하면서 가더라. 남은 시간 동안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태그:#버스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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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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