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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나날들이다.

 

기소독점권을 앞세운 검찰은 '제3의 권력'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최근 '한명숙 무죄판결'로 수사기관의 생명인 공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여기에 향응은 물론 성접대까지 받았다는 이른바 '검찰 스폰서' 폭로가 터져 나오면서 검찰은 '제3의 권력'이 아니라 '제3의 부패' 세력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오마이뉴스>와 MBC 'PD수첩' 등을 통해 검사의 향응 수수 의혹이 폭로되기 직전, "구속 기소된 사람의 일방적 주장", "보복성 음해" 등의 표현을 써가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던 검찰이었다. 그러나 보도가 나간 지 하루 만에 표정이 바뀌었다. 당황하다 못해 침통한 분위기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21일 "(언론에 보도된)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검찰로서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즉각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례적이고 신속한 조치다. 사안의 심각성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검찰의 신뢰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정치권에서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라며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고 나섰다.

 

현 시점에서 검찰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여론'이다. 그래서인지, 시퍼렇게 날선 칼을 들이대던 검찰이 무도 베지 못한 채 칼집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가 뇌물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자마자 시작했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유보할 조짐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개입 의혹까지 제기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한 셈이다.   

 

"사실이면 창피, 부끄러운 일"... "네가 뭔데, 피디가 검사한테 전화해?"

 

김준규 검찰총장은 21일 오전 비상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검사들이 향응과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준규 총장은 "진상규명이 우선돼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응하는 엄정한 조치가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의 잘못된 행적이었다면 제도와 문화로 깨끗이 청산돼야 하고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면 단호하게 정리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검사들의 향응·성접대 의혹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앞서 MBC 'PD수첩'과 <오마이뉴스>는 지난 20일 부산·경남지역의 한 건설업체 대표를 지낸 정아무개씨가 25년간 전·현직 검사 100여 명에게 향응을 제공했다고 주장한 내용을 보도했다. 정씨는 창원지검 진주지청의 갱생보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검사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씨는 자신의 '스폰서' 역할에 검사에 대한 성접대도 포함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전·현직 검사 57명의 실명이 적힌 명단에는 법무부 고위 간부와 대검 간부를 비롯해 지방의 검사장급 인사들이 적혀있다.

 

언론 보도가 예고되자 검찰 측은 "구속 기소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보도할 수 있느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명단에 오른 검사 대부분이 부산지검을 거친 전력이 있는 것과 관련 부산지검은 지난 19일 오후 MBC에 방송재고요청서를 보내기도 했다. "정씨의 제보는 추가기소에 앙심을 품고 보복성 음해를 한 것"이라며 "신뢰성 없는 문건을 토대로, 특정인의 실명까지 거론해 보도하는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PD수첩'을 통해 실명과 얼굴이 공개된 박기준 부산지검장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정씨의 문건에 따르면, 박기준 지검장은 2003년 부산지검 형사1부장 검사로 재직할 당시 수차례 향응을 받았고, 함께한 일부 검사에게는 성접대도 있었다.

 

박기준 지검장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PD수첩>측과 한 전화통화에서 "한두 번 만난 적은 있는데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부인하는 한편, "내가 당신에게 답변할 이유가 뭐 있어. 네가 뭔데, PD가 검사한테 전화해서 왜 확인하느냐"고 윽박질렀다. 박 지검장의 반응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내가 경고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확인하는 것은 그 친구(정씨를 지칭)가 법정에서 증거 조작을 하고 그 다음에 명예훼손 범행하는데 같이 가공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통해서 당신에게 경고했을 거야. 뻥긋해서 쓸데없는 게 나가면 형사적인 조치는 물론 민사적으로도 다 조치하겠다."

 

"(언론에 보도된)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검찰로서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김준규 검찰총장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검찰은 김준규 총장의 지시에 따라 21일 대부분 민간인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조은석 대검 대변인은 "국민의 신망이 두터운 민간인을 위원장으로 하고, 위원의 2/3 이상이 사회 각계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조은석 대변인은 또 "현직 고검장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위원회 소속으로 꾸려, 그 사실 관계를 철저히 규명하기로 했다"며 "진상규명위원회는 그 결과와 이에 대한 조치 의견 및 향후 개선대책을 마련, 검찰총장에게 직접 건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그에 상응한 '엄정한 조치'를 취하고 개선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방침도 덧붙였다.

 

민간인으로 구성? 사시 동기생이 조사...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

 

 

이와 관련 이귀남 법무부장관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이번 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진상조사위에서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도록 하고 향후 그 결과를 토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총장에 이어 법무부장관까지 나서서 진상 규명과 엄정한 처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 향응 수수 의혹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검찰의 자체 감찰 의지는 심각한 의심을 받는 상황에 처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사정의 칼을 휘두르며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유독 각종 비리·부패에 연루된 제식구에게는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게 검찰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실질적인 진상 조사를 벌일 조사단장에 채동욱 대전고검장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채동욱 고검장은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외형적으로는 '민간인'을 내세워 객관성을 보장하는 듯 치장했지만, 결국 알맹이는 자기 식구끼리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채동욱 대전고검장은 박기준 부산지검장과 사법고시(24회), 연수원(14기) 동기다. 또한 검찰 내부의 비리를 단속해야할 한승철 대검찰청 감찰부장도 술 접대 등 향응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정씨가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2009년 3월 30일 이 자리에 있던 일부 부장검사에게 성 접대가 있었으며 한승철 부장에 대해서는 "택시비 100만 원을 상납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진상조사위원회 대부분을 이례적으로 내부 인사가 아닌 외부 인사로 구성하려는 이유도 한승철 감찰부장 등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채동욱 고검장이 자신의 동기와 대검 감찰부장 등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라는 비아냥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야당인사에 대해선 먼지 하나까지 털어내던 검찰이 향응의혹이 제기된 검사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수사할지 지켜보겠다"며 "제식구 감싸기로 일관한다면 (검찰은) 국민적 저항에 봉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더 나아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검찰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만큼 특별검사제를 도입해 이번 폭로의 진실을 낱낱이 밝힐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진상규명위 조사단장을 맡은 채동욱 고검장은 "친한 사람의 전화도 받지 않겠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채 고검장은 21일 "검찰간부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여러분께 죄송하고 마음이 무겁다"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신속히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를 시작해 철저하게 사실관계를 밝히겠다"고 말했다고 조은석 대변인이 전했다. 채 고검장은 이어 "일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전화를 당분간은 받지 않겠다"며 "앞으로 모든 것은 대변인을 통해 이야기 해 달라"고 당부했다.

 

검찰, '한명숙 수사' 지방선거 뒤로 연기할 듯

 

한편 검찰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지방선거 이후로 유보할 것으로 보인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21일 전국 공안부장검사회의 모두 발언에서 "선거가 임박한 단계에서 검찰 수사에 정치적 고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라면서 "정치적 영향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말했다.

 

김준규 총장은 이어 "(선거에서는) 국민의 심판과 뜻이 우선돼야 한다"며 "그것이 민주주의 절차를 뒷받침하는 절차가 되리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사실상 한 전 총리에 대한 수사 유보 방침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태그:#검사 스폰서, #검사 향응접대, #검사 성상납, #김준규 검찰총장,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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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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