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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빈(숙빈 최씨)의 라이벌이 될 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
 최숙빈(숙빈 최씨)의 라이벌이 될 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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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투하된 운석, 느닷없이 발생한 '음변'(화음 부조화). 궁녀 장옥정(장 희빈)을 궁지에 몰아넣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조작으로 판명됐다. 진실 규명에 기여한 공로로 동이는 숙종 임금으로부터 어식(御食)과 하사품들을 받고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사건 조작의 몸통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명성왕후)를 보호하기에 급급해진 서인 세력은 조작의 실무 책임자인 군관을 은밀히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남인 오태석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 군관의 신병을 빼돌린다.

남인 세력은 이를 바탕으로 명성대비의 부도덕을 폭로하려 하지만, 장옥정은 남인들의 자제를 촉구하면서 대비에게 경고를 보내는 차원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는 통 큰 전략을 구사한다. 하마터면 명성대비가 깔아놓은 덫에 걸릴 뻔했던 장옥정은 위기를 모면하고 후궁을 향한 도전을 가속화한다. 

아직 초반부를 달리고 있는 MBC 월화 드라마 <동이>는 위와 같이 훗날 최 숙빈(숙빈 최씨)의 라이벌이 될 장 희빈의 출세과정을 묘사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부유한 역관 가문 출신이자 여종의 딸인 동시에 남인의 정치적 후원을 받는 장 희빈이 후궁에 오르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그래서 현재까지는 드라마 <동이>가 최 숙빈보다는 장 희빈을 큰 축으로 전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입궁 이후 펼쳐진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에서 장 희빈과 대결한 여인은 크게 셋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장 희빈의 고속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고 나선 장애물은 크게 셋이었다. 

명성대비 사망연도 논란
참고로, 많은 서적이나 논문 혹은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명성대비 김씨의 사망 연도를 1683년이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지만, 명성대비가 사망한 때는 숙종 9년 12월 5일 즉 서기 1684년 1월 21일이다. 음력을 양력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음력으로 계산되는 숙종 9년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를 양력으로 변환하면, 서기 1683년 1월 27일부터 1684년 2월 14일까지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숙종 9년 11월 15일 이후는 서기 1684년에 해당한다. 이처럼 숙종 9년은 1683년이 될 수도 있고 1684년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음력을 양력으로 바꿀 때에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세 번째 여인이 장 희빈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지만, 그 이전에 등장한 첫 번째 여인과 두 번째 여인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각각의 대결에서 장 희빈은 매번 결코 쉽지 않은 승부를 겨뤄야만 했다.

<동이>의 최근 방송분에서 장옥정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여인이 바로 첫 번째 장애물이다. 제18대 현종의 부인이자 제19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1642~1684년)가 문제의 주인공이다. 명성왕후와 명성황후가 혼동될 수도 있지만, 숙종의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고 고종황제의 부인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다.

서인의 여인 명성왕후, 장 희빈의 첫 장애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박정수 분).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박정수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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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대비의 족보를 뒤적거리다 보면, 그가 왜 그토록 장 희빈을 못살게 굴 수밖에 없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청풍 김씨인 명성대비의 할아버지는 김육(1580~1658년)이다. 대동법 실시를 주장한 개혁 정치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붕당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김육은 서인 편에 섰던 정치인이다. 광해군 3년(1611)에 북인 정권의 실력자인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 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했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북인 정권 하에서 북인 실력자의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는 대담성을 발휘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골수 서인'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탓인지, 명성대비는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정치 일선에 나서서 남인들을 제거하려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숙종 1년(1675)에 발생한 '홍수(紅袖)의 변'이었다.

'붉은 소매'를 의미하는 '홍수'는 처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는 '궁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홍수의 변' 아니 '궁녀의 변'은 인조 임금의 손자들인 복창군·복평군 형제가 궁녀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은 사건이었다. 

15세의 숙종이 아직 경험이 없다는 점을 활용한 명성대비는 수렴청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 처리과정에 직접 개입했다. 나아가 그는 이 사건을 여당인 남인 세력을 공격하는 빌미로 활용했다. 복창군·복평군이 남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에 남인들을 함께 엮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남인 정권이 강성할 때라, 명성대비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명성대비를 중심으로 외척과 서인 세력이 힘을 합치는 반(反)남인 연대가 형성됐다. 결국 이 연대는 숙종 6년(1680)에 남인 붕당을 꺾고 정권을 탈환하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명성대비는 서인 세력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명성대비가 그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가던 숙종 초년의 어느 시점에 장옥정이 남인 세력의 지원 하에 궁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두 여인이 본격 충돌한 것은 서인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 숙종 6년(1680)의 일이었다.

그 해 음력 10월 26일에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하고 이 틈을 타서 장옥정이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자, 드디어 명성대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장옥정 내쫓기에 나선 것이다.

당시는 남인 세력이 위축된 때였으므로 명성대비는 수월하게 장옥정을 내쫓을 수 있었다. 장옥정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 본 채 궐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장옥정이 추방된 때는 숙종 6년(1680) 10월 26일 이후로부터 숙종 7년(1681) 5월 14일 이전까지의 어느 시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옥정과 명성대비의 충돌은 위와 같이 명성대비의 '강펀치' 한방으로 싱겁게 끝나는 듯했다. 아무리 숙종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들 일개 궁녀에 불과한 장옥정이 명성대비 같은 거물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옥정을 추방할 당시에 명성대비의 나이는 마흔 전후였다.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장옥정은 자신이 언제 또다시 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 기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인 세력이 정권을 탈환한다 해도, 명성대비가 살아 있는 한 장옥정이 다시 입궁하기는 용이하지 않은 일이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명성대비가 살아 있을 때에 장옥정이 궐에 복귀했다고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의 명성대비는 그런 일을 용인할 만큼 적에게 관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장옥정 추방으로 팽팽해진 두 여인의 관계는 뜻밖에도 아주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장옥정이 추방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숙종 9년 12월 5일 즉 서기 1684년 1월 21일에 명성대비가 43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것이다.

장옥정은 어떻게 궁으로 귀환했나

명성대비(명성왕후)와 현종의 무덤인 숭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소재.
 명성대비(명성왕후)와 현종의 무덤인 숭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소재.
ⓒ 동구릉관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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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이라면 치를 떠는 명성대비가 '저절로' 사망함에 따라, 장옥정 정치인생의 첫 번째 장애물이 아주 싱겁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희빈은 당당하게 궁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됐다. '왕의 귀환'보다 더 화려한 '궁녀의 귀환'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장애물과의 대결에서 장 희빈은 자칫 잘못했으면 영원히 궁에 돌아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라이벌이 그처럼 빨리 '저절로' 죽지 않았으면, 장 희빈은 동네 아낙네들을 모아놓고 왕년의 추억을 늘어놓으며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조건들을 놓고 볼 때, 장 희빈 입장에서는 인현왕후나 최 숙빈보다 명성대비가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명성대비처럼 기질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최 숙빈은 외유내강형의 기질을 갖긴 했지만 아무런 사회적 배경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명성대비는 강한 캐릭터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인세력의 정치적 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명성대비가 좀 더 오래 살아 장 희빈을 계속 괴롭혔다면, 아마 다음 번 상대들을 만나기도 전에 장 희빈의 정치인생이 무기력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합 도중에 명성대비가 '저절로' 죽는 바람에 장 희빈은 뜻밖의 승리를 거두고 당당하게 궁에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장 희빈은 명성대비와의 대결에서 행운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장 희빈을 집어 삼켜 목구멍으로 곧 넘길 것만 같았던 첫 번째 장애물은 제풀에 겨워 결국 '먹이'를 토해내고 말았다.


태그:#동이, #장옥정, #장희빈, #명성왕후, #명성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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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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