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여성문화유산연구회> 회원들은 서울걷기답사로 경복궁과 그 일대를 돌았다. 아침 10시, 두둥~하는 북소리와 함께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견학 나온 학생들과 외국인들과 그리고 우리처럼 궁을 돌아보기 위해 나선 사람들로 복작였다. 의식을 뒤로 하고 흥례문 안으로 들어서니 단체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곳저곳에서 깃발을 들고 팀별로 모여 해설사의 해설을 열심히 듣고 있다. 한국어와 외국어가 공중에서 엉켰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법궁이란 임금이 살고 있는 궁궐을 말하며 여러 궁궐 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조선 태조 3년 때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전소되어 방치되다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 강점기 때 또 모든 전각들이 거의 훼손되고 철거되어 초토화 된 것을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벌여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란다. 궁 안을 돌다보면 넓은 잔디밭이 많이 보인다. 조경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그 터가 모두 건물들이 세워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경복궁의 조감도인 북궐도와 현재의 경복궁 현황도를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고종 때 중건 당시의 건물이 무려 330여 동에 이르렀다고 한다. 북궐도에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웅장했던 당시를 그려볼 수가 있다.
근정전과 사정전은 모두 임금이 관련된 집무실이지만 근정전은 주로 국가적인 행사에 사용되던 곳이고 사정전은 평소의 집무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근정전의 바닥은 전돌로 되어있었고, 사정전의 바닥은 마루였다. 사정전 옆으로 나 있는 경복궁의 정원인 경회루를 둘러보고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중궁의 처소인 교태전으로 넘어갔다.
이 두 곳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이 무량각 지붕으로 짓는다고 하는데, 이런 형태의 지붕은 다른 지붕과 달리 고난도의 건축 기술을 요한다고 한다. 교태전의 후원인 아름다운 아미산과 굴뚝, 자경전의 십장생 무늬굴뚝과 서쪽 담장의 꽃담을 관람하고 건청궁으로 넘어갔다.
이곳은 궁 안의 궁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의미로 세운 곳이라고 한다. 고종과 왕비가 거처했으며 명성왕후가 시해된 곳이기도 하다. 건청궁 앞에는 아름다운 향원정이라는 연못이 있으며, 그 향원지는 우리나라에 전기가 최초로 들어오게 되는 발상지가 된다. 건청궁 뒤쪽을 둘러치고 있는 궁궐담장 문이 신무문이며 청와대가 있는 쪽이다.
조선시대에는 청와대가 있는 자리도 경복궁 일원이었다. 광화문, 흥례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향원정, 건청궁은 궁 안의 배치도에서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모양새다. 그 외의 몇 몇의 전들을 더 관람하고 건청궁 옆에 있는 민속박물관 정문으로 해서 궁을 나왔다. 이쪽은 광화문과 이어지는 담장 중에 경복궁의 동쪽을 담당하는 건춘문이 있는 곳으로, 민속박물관 정문에서 담장을 따라 광화문 쪽으로 약 3분 정도 내려가는 거리에 문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앞에서 바로 길을 건너면 '북촌길'로 오르는 길이다. 그 길로 직진해 5분쯤 걸으면 사거리 왼쪽 편에 정독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 쪽에 한옥건물 두 채가 세워져 있는데 종친부 일을 맡아 보던 곳인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종친은 임금의 친가 쪽 친척으로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정식부인에게서 난 자손은 4대손까지, 후궁에서 난 자손은 3대손까지 종친의 대우를 해줬단다. 원래는 건춘문 맞은편에 있었는데 1981년 8월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마주 보이는 곳에 인왕산이 바라보인다.
정독도서관 정문 바로 옆에는 서울교육사교관이 있다. 그곳에는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궁궐에서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의 추억을 꺼내 서로의 경험을 들추고 공유해 볼 수 있는 곳이라서 회원들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한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5학년쯤 이었던가. 중학교를 무시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시험을 보지 않고 소위 뺑뺑이라는 무시험 추첨기를 통해 자신이 갈 중학교를 정했다. 물레같이 생긴 추첨기가 전시되어 있었지만 도통 돌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보다 한 해 빠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직접 돌렸단다. 오른 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번인가 돌리면 은행 알 같은 것이 튀어나오고 그곳에 자신이 갈 학교가 쓰여 있었단다. 지역마다 배정 방법이 달랐었나? 물레추첨기는 정말 처음(?) 본다. 각 학교의 상징인 배지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는 자신들이 다닌 학교를 찾느라 웅성거렸고 찾으면 작은 탄성을 질렀다.
국어책에 나오는 "영희야, 철수야" 하며 배우던 생각이 나는데, 전시되어 있는 방문엽서에는 "영이야, 철수야"로 되어 있다. 잘못 인쇄된 것인가 했더니 '영이'는 '영희'의 한참 선배라고 조그맣게 설명되어 있어서 모두 웃었다. 우리 회원 중에 '영이' 세대는 없었다. 얼마큼의 선배인지 궁금하다. 전시장 안에서는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이런 저런 그때의 시대로 돌아가 시연도 해 볼 수 있게끔 되어 있어, 더 흥미로웠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어서 함께 돌아보면 좋을 듯싶다.
그곳을 나와 마지막으로 돌아본 곳은 건춘문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광화당과 삼축당가의 집터다. 고종의 후궁들로 광화당 이씨는 아들을 낳아서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지만 아들은 곧바로 사망했다고 한다. 삼축당 김씨는 후사가 없어서 고종사후에 순종에 의해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는데 고종의 가장 어린 후궁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인 출신이었으며 서로 외로운 처지였기에, 궁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친했다고 한다.
고종 승하 후에 순종이 이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두 사람을 살게 했는데, 지금의 법련사라는 절과 두가헌이라는 식당이 있는 곳을 두 사람이 살던 집터로 추정하고 있다. 식당의 한옥 팔작지붕 위를 보니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지붕 끝에 '잡상'이 붙어 있다. 잡상이란 사악한 기운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의미의 동물조각으로, 원래는 궁궐의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는 건물지붕에 장식하는 것이란다.
두 분은 1970년대까지 이곳에서 기거를 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별세하여 현재는 남양주시에 있는 홍유릉권역에 또 위 아래로 묻혀있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묻혀버릴, 곳곳에 소소히 산재해 있는 이런 저런 문화재와 거기에 얽혀 있는 정사(正史)든 야사(野史)든 듣고 배우고 살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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