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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국에서 케이블카 사고로 10명쯤 죽었다. 방글라데시에서 기차 사고가 나서 250명 정도 죽었다. 어떤 사건이 신문에 더 크게 나올까?  

A. 사상자 수가 25배 차이 나지만, 국내 언론이 더 비중 있게 보도하는 것은 여전히 미국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500명 이상 죽어야 제대로 기사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40여 곳의 국제 분쟁현장을 취재했던 정문태 전선기자는 이 같은 한국 언론의 현실을 전하면서 "이제는 아시아를 알아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서구중심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아시아중심주의가 아니다. 이웃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자는 것이다.

 

23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저자와의 대화'. 정문태 기자는 최근 펴낸 <현장은 역사다>(아시아네트워크 펴냄)에서 지난 1994년부터 취재했던 아시아 7개국의 현대정치사를 담았다. 이날 대화의 키워드 역시 '아시아', 그리고 '기자'였다.

 

글로벌한 당신, 인도네시아 수도는 어딘지 알고 있나요

 

정 기자는 "미국이나 유럽 동네 이름까지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수도가 자카르타인지 발리인지조차 헷갈려 한다"면서 "왜 모든 건 미국이나 유럽을 쫓아가야 하나, 이런 의문에서부터 아시아를 다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같은 무관심과 멸시의 주범으로 언론을 지목했다. 신문 국제면에서 서구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관련 뉴스는 자주 볼 수 있어도 가뭄에 죽어가는 아시아 농민들에 대한 뉴스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나마 신문에 나오는 국제뉴스도 한국 기자들이 발로 뛰어서 만든 기사는 많지 않다. 특히 아시아에는 해외 통신원도 거의 없다.

 

다른 나라 언론사들과 비교해보자. 정 기자가 살고 있는 방콕의 경우,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방송사들 지국이 들어와 있다. 2000년대 이후 일본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방콕에는 프리랜서까지 합해서 적어도 100명 정도의 일본 기자가 상주한다.

 

이들이 일주일에 기사를 두 꼭지씩만 써도 200꼭지가 나온다. 1년이면 1만 개의 정보가 일본 사회에 전해지는 셈이다.

 

그러면 한국 언론들은? 방콕에 특파원을 파견한 언론사는 단 한 곳 <연합뉴스>뿐이다. 이 때문에 '통신사 받아쓰기' 중심으로 국제뉴스가 만들어지다 보니 발로 뛰는 기사는 적을 수밖에 없다.

 

정 기자에 따르면, 국내 일간지에서 한국 기자들이 순수하게 현장에서 취재해서 쓴 기사들은 많아 봤자 1주일에 3꼭지다. 그는 "기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현장인데, 국제부 기자가 국제현장을 가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사 기자가 아닌 아시아 기자가 되라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기자들이 국제 전문가가 되기 힘든 현실로 흘러갔다. 그는 "기자를 탓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탓해야 한다"면서 "대한민국에서 기자로 산다는 건 전문성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져야 하는 비극적인 삶"이라고 꼬집었다.

 

해외 특파원의 경우, 보통 임기가 2~3년 정도인데 현지 상황을 공부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게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전혀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발휘하기도 어렵다. 정 기자는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왔던 한국 기자들 중 문화부·스포츠부·사회부는 있었지만 국제부는 많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현실이 이렇게 암울하다면, 한국에선 국제 전문기자를 포기해야 할까?

 

이날 강연에는 언론지망생들도 다수 참석했는데, 정 기자는 이들에게 "'언론사 기자가 아닌 기자'가 되고 싶다면 길은 많다"고 조언했다. 지금이라도 10명이 팀을 조직해 '너는 필리핀, 너는 말레이시아' 식으로 한 나라씩 가서 전문기자가 되면 10개국의 뉴스를 팔 수 있다는 제안이다.

 

실제로 이같은 구상은 지난 1999년에 만들어진 아시아 언론인들의 모임인 '아시아 네트워크'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이 모임의 구호는 '아시아의 뉴스를 아시아의 손으로'. AP·로이터와 같은 서구 통신사들이 뉴스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외신만 받아서는 영원히 아시아의 시각을 가질 수 없다"는 데 동의한 기자들이 뭉쳤다. 이들은 뉴스를 상호 교환하거나 원고료를 받고 판다. 2003년에는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남들 다 하는 건 체질적으로 싫다"

 

일주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정 기자는 다음 주 해외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반정부 단체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태국으로 돌아간다.

 

"남들 다 하는 건 체질적으로 싫다"는 정 기자는 참석자들에게 거듭 '개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나 그리스·로마신화 대신에 이란 영화를 소개시켜주고 네팔 민담이나 동티모르 전설을 말해줄 수 있는 여자 친구나 남자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아이들... 난 왜 여기 와있나"

[인터뷰] 정문태는 왜 '종군기자'가 아닌 '전선기자'가 됐나

23일 <저자와의 대화>에서 못다한 '전선기자' 정문태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간단하게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아래는 정문태 기자와의 일문일답.

 

- 종군기자라는 표현이 싫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전선기자와의 차이점은?

"옛날 군국주의 시대에서 출발한 '종군기자'라는 말은, 한문으로 풀면 '군대를 따르는 기자' 또는 '군대를 쫒는 기자'란 뜻이다. 현대적 개념에서 전쟁을 취재하는 기자는 시민사회가 파견해서 전쟁과 군대를 감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명칭부터 달라야 한다."

 

- 언제부터 전선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나.

"처음부터 전쟁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다. 외신기자로서 정치판을 취재하다 보니, 정치의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 전쟁으로 터져 나오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전쟁터를 취재하게 되었다. 정치 취재의 연장선이라고 본다."

 

- 첫 전선취재 기억나나. 어땠나?

"1988년 버마 민주항쟁 뒤 타이-버마 국경으로 빠져나온 수많은 청년들이 국경 소수민족해방구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들던 현장이 첫 번째 취재했던 전선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로서 강한 동질성과 연민을 느꼈다."

 

- 국제분쟁지역을 많이 다니다보면 안타까운 상황을 많이 접할 것 같다.

"처음 버마 국경전선에서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아파서 일을 접어놓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런데 30㎞쯤 가다보면 아이가 결국 죽는다. 그럴 때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구호요원인가, 내가 기자인가.' 나는 의사가 아니고 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가? 그 기준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 전선기자의 중립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따를 중립이란 건 내 발에 밟히고 내가 본 현장일 뿐이다. 기성 체제나 인식 같은 것들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 기준은 '내 취재와 보도가 시민사회를 이롭게 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선기자 활동을 할 계획인가.

"백발 휘날리면서 현장을 뛸 수 있다면, 그러다가 어느 전선에서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말은 멋있는데 그런 행운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현장 중심'이라는 원칙을 계속 지켜가고 싶다."


현장은 역사다 - 전선기자 정문태가 기록한 아시아 현대사

정문태 지음,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2010)


태그:#정문태, #현장은 역사다, #아시아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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