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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파마
▲ 삼만 원짜리랑 똑같지요 공짜 파마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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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파마 할려구."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덤덤한 얼굴로 바로 앞에 미용봉사자에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던 팔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옆자리에 어르신이 내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늙으니깐 머리카락이 힘이 없어져서 파마가 잘 안 나와. 그런데다가 빨리 풀려버리리기까지 한다구. 한 달 좀 넘었는데 죄 풀렸지 뭐야. 자넨 아직은 그렇지 않지?"  
"잘 모르겠어요, 파마 해 본 지가 오래되었거든요."

그러자 나이와 달리 검버섯이 별로 없는 깨끗한 얼굴에 그 어르신은 내 머리를 유심히 봅니다. 내 머리는 하얗지만 생머리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커트만을 합니다.

"생머리구먼. 자르려구?"
"네. 근데 차례가 오려면 오래 기다려야겠네요." 

"기다려야지, 공짠데. 돈 만 원 아끼는 거잖아. 난 파마 할거니까 삼만 원을 아끼는 거구. 요즘 같은 때 돈 삼만 원이 어딘데. 우리 작은 눔은 장사가 잘 안 된다구 내 용돈을 딱 끊은 지가 벌써 몇 달이 됐나 몰라. 죽일눔 같으니라구. 지들 먹구 쓰는 건 여전하면서, 죽일눔 같으니라구."
"자제분이 많으세요?"

"아들 둘에 딸 하나야. 같이 사는 큰 눔은 미국 유학 보낸, 지 아들눔 뒷바라지 하느라구 나한텐 신경 통 안 써. 걸핏하면 노인이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는 말이나 하구. 죽일눔 같으니라구. 내가 저를 어찌 길렀는데 죽일눔야 죽일눔! 영감이 살았음 내 꼴이 이 지경은 아니지. 암튼 딸이 최고야, 가끔 와서 쬐끔씩 쥐어주구 간다구."

어르신은 낮은 한숨을 내쉽니다. 그런뒤 이내 낯선 이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이 천천히 엷은 웃음을 물었는데 그 안쓰러운 모습이 내 가슴을 툭 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용돈이 필요한 것처럼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있어야 합니다. 

봉사자들이 펼쳐놓은 파마 염색약들입니다
▲ 파마 약들 봉사자들이 펼쳐놓은 파마 염색약들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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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따듯합니다. 넓은 노인정 로비가 봉사자들과 머리 모양새를 내려는 어르신들로 북적거리는 것입니다. 아파트단지 내에 있는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파마약이며 염색약까지 구비해 가지고 와서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커트와 파마, 염색을 해주고 있습니다. 펼쳐놓은 파마약이며 염색약 미용 기구들을 보니까 일반 미용실보다 더 큰 규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용 봉사자들도 여러 명입니다. 사방에 기대어 놓은 긴 거울 앞 의자에 가운을 두르고 앉은 어르신들에 머리를 익숙한 솜씨로 정성을 기울여 다루고 있습니다. 커트를 해주는 모습도 파마와 염색을 해주는 모습도 일반 미용실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기술이 보통이 아니고 세심하면서도 차분합니다. 알고보니 전에 또는 현재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어르신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 사랑의 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봉사자는 청소기로 여기저기 잘라낸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쓸어가고 있습니다. 따듯한 김이 오르는 커피와 녹차잔들을 쟁반 가득히 받쳐든 봉사자가 우리 앞으로 와서 상냥하게 '드셔요' 하자 어르신은 얼른 '고맙네' 하면서 커피잔을 집어듭니다. 나는 율무차를 집어들었습니다.

앞머리가 없어서 뒤만 자릅니다
▲ 할아버지도 앞머리가 없어서 뒤만 자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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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 노인정에 다니구 있다구. 자넨 우리 노인정두 안 다니면서 어떻게 알구 머리를 하러 왔어?"
"남편이 노인정 일을 보세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그러구 보니깐 낯선 할머니들이 많구먼. 공짜라는 소문 듣구 죄다들 왔나보네. 저이들이 다 노인정에 나오면 더 재밌을텐데, 요런 때만 오는 걸 보니까 무어 더 좋은델 다니나 보네. 하긴 복지관에서 사군자두 배우구 춤이랑 노래도 배우는 이들이 많지. 난 허리두 무릎두 시원찮아서 그런 건 못해. 또 그런 건 돈이 쪼금 든다데."
"노인정이 집에 계시는 것 보다 더 재밌으시죠?"

"그럼그럼. 친구가 많아 심심치두 않지, 제때 따듯한 점심밥 나오지 얼마나 좋은데. 겨울엔 방바닥 뜨근뜨근하구 여름엔 에어컨 바람이 나와 시원하구. 그런데다가 가끔 여기 저기서 떡두 들어오지 과일두 박스로 들어오지 막걸리두 들어오지 얼마나 좋은데"
"화투도 하세요?" 

"난 화투는 안해. 그래두 재밌어. 집안 얘기며 이런저런 세상 얘기들이 얼마나 재밌는데. 웬만한 티비뉴스는 다들 훤히 꿰구들 있다구. 집에만 있어봐, 누가 그런 얘길해줘. 해주기는커녕 상대두 안해주지. 집에 있으면말야. 며늘애가 뭐라 안해두 점심 때가 되거나 지 친구들이 놀러오면 눈치를 보게 되더라구."

"연속극도 많이 보시겠네요."
"집에서두 보지만 여기서 재방송두 본다구. 집에 티비 보다 여기 티비가 더 커서 얼마나 좋은데. 눈이 하나두 시지가 않아."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에 따듯한 미소를 품은 봉사자가 접수장을 들여다 보다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릅니다. 저쪽에 키가 작고 허리가 굽은 어르신이 '에구구' 하면서 천천히 일어서자 이름을 부르던 봉사자가 쫓아가서 어르신이 입은 연분홍 윗옷을 벗겨 잘 접어 소파등받이에 걸쳐 놓고 어르신을 부축해서 비어있는 거울 앞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러자 어르신이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저이는 아들만 둘인데 다 효자야. 둘이 다 용돈을 많이씩 준대. 그래서 가끔씩 주전부리감을 사들고 오지 뭐야. 저 옷두 큰며느리가 사줬대. 남편 일찍 죽구 시장에서 옷장사하면서 대학까지 가르친 보람이 있지뭐야. 참, 노인연금두 받구 있대. 부러워 죽겄다구. 난 시골에 땅이 있어서 못 받는다구. 어휴 팔아버렸음 좋겄는데 큰눔이 못팔게 하지 뭐야. 근데 자넨 종일 집에서 뭐해?" 
"살림해요."

"아직두 살림을 하다니, 좋은 때구먼. 이 세상에 살림처럼 재밌는 일이 어딨나. 자식들 키우면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구 넘기구 그러면서 살았어두 그때가 젤 재밌구 행복한 때지. 난 큰아들 장가들여 같이 살게되면서, 그니까 육십 중반에 살림을 놨다구. 얼마나 허전하던지 세상 끝난 거 같구말야. 그때부터 노인정에 나오기 시작했지. 갈 데가 노인정밖에 없더라구"

옛날과 달리 요즘은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키고 노부부가 오붓하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팔순이 넘어도 수족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 신혼처럼 살면서 부부가 같이 여행이며 걷기운동도 하고 장도 보고 교회도 가고 외식도 하고 친구들 모임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그 모습은 물론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거나 자식들이 생활비를 대줄 형편이 되거나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래도 어르신의 말대로 자식들을 건사하면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던 젊은 시절에 사는 재미와 행복감과는 비교가 안 될 것만 같습니다.

문득 홀로 되었거나 자식들과 함께 사는 어르신일수록 아침밥을 먹고나면 갈 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늙어서 매일 갈 데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언젠가 길에서 며느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지팡이에 의지해서 노인정에 다니는 이웃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어르신은 무거운 걸음을 멈추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 노인정 가는 길이야' 어르신의 얼굴은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의 간단한 운동기구들입니다
▲ 운동기구들. 어르신들의 간단한 운동기구들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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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전거 타기 못허겄네." 
 
간단한 운동기구 두어 가지가 구석에 몰아져 있습니다. 언듯 러닝머신이며 고정식 자전거가 보이는데 아마도 미용봉사자들이 공간활용을 하느라고 몰아놓은 모양입니다.

"자전거도 타시는군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타지. 그래두 얼마나 운동이 되는데. 삼십 분 타고 나면 피곤하다구. 밤에 잠두 잘 오구 말야."

그러면서 웃는 어르신은 아까와 달리 행복해 보입니다. 돌아보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들도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어르신들도 모두 편안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창문으로 정겨운 정자나무가 내다 보이지는 않지만 초고층인 30층짜리 아파트만이 들어선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삭막한 아파트 숲속에도 이렇듯이 정이 흐르는 노인정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주방쪽에서 구수한 미역 된장국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벽에 높이 걸린 둥그런 시계를 보았습니다. 12시가 다 되어갑니다. 어르신이 중얼거렸습니다. '미역된장국 조오치이' 

봉사자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내가 대답을 하면서 웃옷을 벗는데 어르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양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히이 하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랑 바꾸자구우." 

어르신은 냉큼 봉사자를 따라 갑니다. 어르신이 거울앞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파마할려구. 삼만 원짜리랑 똑같이 해 줘."
"그러죠. 파마 말구 나서 점심식사하셔야겠네요"
"그럴라구 새치길 했지. 그러지않음 나 혼자 먹게 되거든. 혼자 먹으면 재미가 없지 뭐야."

봉사자가 하얀 이를 보이며 박꽃같이 환하게 웃었습니다. 천사같아 보입니다. 봉사자에 깊은 사랑과 나눔의 마음씨가 어르신에게는 공짜 파마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은 딸이 '쬐끔씩 쥐어주구' 간 용돈도 아끼게 되고 흰머리지만 예쁘게 머리모양도 내고 또 어쩌면 당분간은 큰아들 작은아들을 두고 '죽일눔같으니라구'라는 말도 하지 않게 될테니까요.


태그:#노인정 , #용돈, #공짜 빠마, #미용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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