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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건너왔을 '인민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신다
▲ 훈자 울모자를 쓴 할아버지들 실크로드를 건너왔을 '인민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신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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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 가면 '훈자'라는 마을이 있다. 장수마을로 방송에도 가끔 소개되니 더러는 들어본 적도 있을 그곳에 우리 부부가 도착했을 때는 2월 말이었다. 이미 바깥세상은 이른 봄뜻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카라코람하이웨이를 따라 밤새 달려 19시간 만에 다다른 그곳은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그늘진 곳마다 하얀 눈이 날리고, 회색 키만 껑충 키운 자작나무들이 마을길을 따라 서성거렸다. 조금은 쓸쓸하고 어쩐지 조금은 성스러운, 마을 전체가 어떤 숙명적인 노동을 치르고 긴 명상에 빠져든 것처럼 묘한 기운이 흘렀다.

"3일 만이에요."

미리 도시로 나가는 버스 편을 알아두느라 들른 매표소의 직원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지난 3일 동안 한 명의 여행자도 이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빙하 트레킹으로 나름대로 이름난 이곳에 3일 만에 단 두 명의 여행자라니, 정말 지독한 비수기인 셈이었다.

덕분에 우린 훈자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호텔에 짐을 풀었다. 평소라면 배낭 여행자의 주머니 사정으론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비수기의 매력이란 그런 것이다. 여행자가 희귀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은 말하기 나름이다.

호젓한 늦겨울의 풍경
▲ 비수기여행의 매력 호젓한 늦겨울의 풍경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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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 인사를 하니 손을 내미시는데, 말린 살구가...
▲ 건살구를 건네는 할아버지 꾸벅 인사를 하니 손을 내미시는데, 말린 살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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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면, 단 하루 만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온 여행자부부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길을 가다 만난 할아버지는 아내의 손바닥을 펴서 이 지방 특산물인 '건살구'를 가만히 놓아주고, 빵이라도 살까 해서 들어간 식료품점 주인장은 물건 파는 건 딴전이고 차부터 내온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마을 전체의 여행자가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3명이라는 사실은 빙하트레킹을 떠날 수 있는 팀을 구성하기 위해선 또 다른 여행자들이 더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는 걸 의미했다.

특별히 보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사라진 여행자는 하릴없이 시간을 소요하며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기 마련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이제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식료품점 아저씨, 채소가게 청년, 훈자의 '울 모자'를 쓰고 늘 같은 자리에 앉아 햇볕을 쬐는 할아버지들, 그 일상의 풍경 속으로 여행자도 끼어든다. 아침이면 먼저 비단길을 건너온 중국차를 얻어 마시고, 사지도 않을 채소 값을 물어보고, 또 오후에는 두 할아버지 사이를 파고들어 참 좋은 햇살을 나눈다.

그러고도 시간을 주체하지 못할 때는 한국배낭족들에게 유명한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방명록을 뒤적인다. 그곳에는 가이드북에선 결코 찾을 수 없는 진귀하고도 따끈따끈한 정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빙하트레킹 코스에서 여행자의 미용관리까지 그 정보의 폭은 넓고도 다양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방명록을 들춰보다 보면 각 나라별 여행자들에게 제각각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서양 친구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감상을 주절주절 늘어놓길 좋아하고, 일본여행자들은 그림까지 곁들여 가며 감탄할 정도로 섬세하고 꼼꼼하게 트레킹이나 교통 등의 실용적인 정보를 기록해 둔다.

그렇다면 한국배낭족은 어떨까? 단연, 먹는 것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다.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 혹은 그 식당에서 피해야만 할 요리. 

세계의 지붕이 이어져 있네~~
▲ 이글네스트에서 본 풍경 세계의 지붕이 이어져 있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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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 정보를 따라 두이카르라는 곳까지 트레킹을 했다. 아직 채 녹지 않은 눈길을 따라 두 시간이나 걸었을까. 설산 카라코람의 장쾌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계곡 아래로는 문명의 강 인더스가 장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최적의 '뷰포인트'에 한국배낭족들이 추천한 게스트하우스인 '이글네스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차 한 잔이 어느 한국배낭 여행자가 방명록에 남긴 오늘의 추천코스다. 하지만 어찌하랴, 지금은 지독한 비수기임을. 게스트하우스 입구는 겨우내 쓸지 않은 눈으로 덮여있었고 식당 문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인더스와 함께 하는 차 한 잔의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하산하는 길, 여행자는 뜻하지 않은 동행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자밀라. 그런데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그녀가 얘기를 나누다보니 바로 '이글네스트'의 안주인이었다. 이제 그녀는 알티트(옛 훈자왕국을 이루었던 세 마을 중 하나)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따뜻한 봄이오면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겠지?
▲ 알튀트성 흙집으로의 초대 따뜻한 봄이오면 살구나무가 흐드러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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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의 아쉬움이 여행자를 오래된 흙집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차를 끊여내고도 차파티며 구운 과자며 살구씨까지 자꾸 뭔가를 내오는데, 그 사이에 밖에 나가있던 가족들이 이방인의 방문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든다.

갈색 눈이 참 예쁜 첫째 딸, 그리고 덩치가 크고 순한 눈을 가진 남동생, 이번엔 남편과 막내 딸, 다시 둘째 딸. 우리 부부는 계속 들어오는 그녀의 가족들을 보며 경이로운 눈을 껌벅이지만, 다소 어려 보이던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할머니 집에 놀러간 아들이 두 명 더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는 덧붙이는 그녀의 설명.

"여기서는 열일곱 살이면 결혼해서 보통 열다섯의 아이를 낳아요."

결국 우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열일곱에 결혼해서, 열다섯이면, 1년씩만 터울을 둔다 하고, 아니, 가끔 연년생을 낳는다고 해도, 도대체 몇 살까지…. 두 손가락을 다 써가며 셈하는 시늉을 하는 나를 보며 온 가족이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그때 모스크에서 아잔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코란 암송 소리가 이어진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 언제나 만남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 아쉬움은 그리움이 되어 가슴 속에 자리한다.

다음에 만나면 몇 명으로 늘어나 있을까?
▲ 자밀라의 아이들 다음에 만나면 몇 명으로 늘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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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우리는 훈자와도 이별했다.  그동안 기다렸던 새 여행자는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당연히 우린 빙하트레킹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여행에서도 가끔 남겨둬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그걸로 우리에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니까. 

물론 훈자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다음번에 다시 올 땐 꼭 '이글네스트'에 묵게 해주겠다던 자밀라와 그녀의 가족들. 그런데 다시 올 그날엔 그녀의 아이들이 과연 몇 명으로 늘어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지금 연재 중인 기사는 2003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아내와 함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때 만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로 출간했지만,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그동안 월간 <행복한 동행>에 연재해 왔는데, 이를 다소 수정하고 덧붙여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파키스탄, #훈자마을,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 #비수기여행,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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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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