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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부설 유치원부터 초등 6학년까지 다 더해봐야 100명도 안되는 학생들이지만 산속 구석구석에 학생들 집이 있어서 등하교 차량이 없으면 통학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영덕 교육청에서 차량 지원을 하고 있어 학생들을 태워다 준다고 합니다. 여동생은 몇개월 전부터 초,중등학생을 실어다 날으는 차량에 안내원을 맡아 하고 있다고 합니다.
▲ 학교 버스 안내원 하는 여동생 학교 부설 유치원부터 초등 6학년까지 다 더해봐야 100명도 안되는 학생들이지만 산속 구석구석에 학생들 집이 있어서 등하교 차량이 없으면 통학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영덕 교육청에서 차량 지원을 하고 있어 학생들을 태워다 준다고 합니다. 여동생은 몇개월 전부터 초,중등학생을 실어다 날으는 차량에 안내원을 맡아 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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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5일(월) 부로 10여년 다니던 직장을 잃었습니다. 몇군데 손 닿는 곳에 직장을 다시 알아는 봤지만 나이 많고 손재주 없다고 써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귀농살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5일 아침 바로 귀농 체험 여행을 떠났습니다.

매제는 참 부지런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밤새 내린 눈을 치웠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눈치우는 매제 매제는 참 부지런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밤새 내린 눈을 치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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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완주 친환경 흑곶감 농부를 찾아 갔다가 여동생이 귀농살이 하고 있는 영덕에 와서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여동생(39살)은 10여 년전 울산에서 지내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영덕에 가서 귀농해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것저것하며 어렵사리 살다가 3년전부터 자리가 잡히기 시작해서 지금도 여전히 가진건 없지만 잘 살고 있었습니다. 매제가 손재주가 많아서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보일러고 자동차고 집수리고 뭐든 할 일이 생기면 불러 일을 부탁했습니다. 제가 도착한 날도 이웃집에 배관이 터져 물이 새는 일이 생겨 매제가 찾아가 수리를 잘 해 주었습니다. 참 부러울 정도로 손재주가 많은 매제였습니다. 자리 못잡을 때 방황하던 매제도 안정된 직장을 잡아 잘 다니고 있어 한시름 놓였습니다.

여동생 집을 방문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여동생을 따라 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일어나 밖을 보니 눈이 많이 내려 있었습니다. 매제는 먼저 일어나 마당의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참 부지런한 매제였습니다. 여동생은 아침 6시경 일어나 가족들 밥을 하고 아침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7시 30분경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엔 세 대의 작고 노란색 버스가 서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그중 한 대의 버스에 올라 탔습니다. 버스 기사님에겐 오빠라고 소개하고 맨 뒷자리에 앉아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동네 저동네 다니며 학생들을 실었습니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탔습니다. 그 동네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중학교가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아침 아이들 태워 주는 일을 마치고 바로 또다른 일터로 향했습니다. 산속에 있는 죽염 굽는 공장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 또다른 일터 가는 길 여동생은 아침 아이들 태워 주는 일을 마치고 바로 또다른 일터로 향했습니다. 산속에 있는 죽염 굽는 공장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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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다 돌고 나니 45분 정도 걸렸습니다. 동생은 이렇게 오전과 오후 두차례씩 학생들을 실어 날으는 버스 안내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엔 4시 30분에 학생들을 실어 날은다고 했습니다. 방과 후 수업 마치고 나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4시 30분에 모든 수업이 끝난다고 합니다.

"이번엔 죽염공장 일하러 가야 한다. 오빠도 같이 함 가 볼래?"

여동생은 학교 버스 안내원 오전 일을 마치자 마자 바로 죽염공장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죽염공장은 동생이 사는 동네서 많이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오늘 바빠 차 없다네. 오빠 간만에 우리 한번 걸어 가 볼까?"

걷기 좋아 하는 저는 여동생과 걸어 갔습니다. 눈길을 걷다보니 이건 가도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1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진짜로 그랬습니다. 계곡 물이 많이 흐르는 길을 따라 1시간 30분 가량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거기 '민속죽염' 이라고 하는 공장 시설이 보였습니다. 계곡 반대편엔 당나귀,소,돼지가 여러마리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가자마자 일을 시작 했습니다.

"오빠 나 바쁘다. 오전 작업 해놓고 일하는 분들 점심 해줘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오후 작업 시작해야 한다"

죽염은 습기에 약하고 습기가 차면 변질은 안되지만 딱딱하게 굳어지므로 습기 방지를 위해서 보일러를 튼다고 했습니다. 작업장에 들어 서는데 여동생은 위생관리 해야 한다면서 여동생은 저에게 머리에 쓰는 작업용 모자와 앞치마를 건넸습니다. 작업장 안은 후덥지근 했습니다. 작업장 안을 사진 찍으려 하니 공장장이 못찍게 했습니다. 여동생이 일하는 모습을 찍어두고 싶었는데 못찍게 하니 어쩔수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죽염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오빠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큰 액자에 걸려 있는 죽염제조과정을 살펴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 여동생이 보여주는 죽염 제조 과정 사진 여동생은 죽염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오빠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큰 액자에 걸려 있는 죽염제조과정을 살펴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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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흰색 죽염은 2회 구운 죽염입니다. 요리 해 먹거나 양치 할 때 쓰여 진다고 합니다. 두번째 죽염은 9회째 구운 죽염을 가루로 만든 상태랍니다. 보랏빛이 났습니다. 세번째 죽염은 9회째 구운 죽염 알갱이 랍니다. 보랏빛이 많이 나는데 이 죽염은 약용으로 쓰인답니다.
▲ 죽염의 여러가지 처음 흰색 죽염은 2회 구운 죽염입니다. 요리 해 먹거나 양치 할 때 쓰여 진다고 합니다. 두번째 죽염은 9회째 구운 죽염을 가루로 만든 상태랍니다. 보랏빛이 났습니다. 세번째 죽염은 9회째 구운 죽염 알갱이 랍니다. 보랏빛이 많이 나는데 이 죽염은 약용으로 쓰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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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죽염은 품질이 믿을만 하다고 생협이나 여성단체 같은데서 많이 주문해 가. 또 30일 포항 생협 회원분들이 공장 견학 온다고 해서 준비 하느라 바쁘다"

여동생은 그동안 일을 많이 배웠는지 생활의 달인처럼 일을 잘 처리 했습니다. 가루로 된 죽염을 포장에 넣고 생산 날짜를 찍고 속에다 전단지 한장과 작은 수저를 넣고 닫은후 마무리 했습니다. 죽염에 대해 궁금 한것이 있어 몇가지 물어보았습니다. 여동생은 공부를 많이 했는지 대답도 잘 해주었습니다.

"죽염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3년 이상된 왕대나무 마디를 잘라. 그속에다 서해안 천일염을 다져 넣고 위에 황토흙으로 발라. 그리고 쇠가마에 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

소나무 장작으로 한번 확 불을 때고 나면 그대로 식힙니다. 다 식고나면 약간 녹아서 대나무 속에 들었던 소금 가루가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아서 다시 가루를 만듭니다. 그 가루를 다시 왕대나무 속에 다져넣고 황토흙으로 막아 쇠가마에 넣습니다. 그리고 또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땝니다. 그렇게 여덟차례를 반복 합니다.

"죽염은 모두 아홉번 구워야 된대. 아홉번째 구울때는 다시 가루로 만들어 대나무에 넣고 굽는건 비슷한데 이번엔 송진이 듬뿍 든 옹이가 많은 소나무와 뿌리로 불 을 때 열을 1500도시 넘게 올라가게 해. 그러면 죽염이 용암처럼 녹아서 흘러 내려. 그것을 그릇에 받아 식혀. 그러면 자주색 죽염이 나 와."

죽염 제조실에서 죽염을 봉투에 담을 때 보니 삶은 계란 노른자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이게 왜 이런가 물었더니 아홉번 죽염을 구워 자주색 죽염이 되면 대나무와 송진, 황토흙에서 합성된 인체에 유익한 유황 성분이 생성되어 그렇다고 합니다. 죽염이 참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오전 작업후 여러 작업자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죽염으로 만든 김치,된장,고추장,간장으로 만든 반찬과 현미 밥으로 한상차려 먹었습니다. 죽염으로 만든 거라 그런지 뭔가 맛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염공장도 다른곳과 다를바 없이 12시부터 점심시간이었고 1시 넘어 다시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동생이 맡은 일은 이것저것 여러가지 죽염 포장작업을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작업이 끝났습니다. 여동생은 죽염공장의 정식 직원이 아니라 자율 작업자였습니다. 오후 4시 30분부터는 다시 학교가서 학생들 태워다 주는 안내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3시 30분에 작업을 마쳐야 했습니다. 죽염공장 사장님이 차량으로 학교가 가까운 큰 도로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니 1시간 30분 걸리던 기나긴 길이 10분도 안되어 마을로 내려 왔습니다.

죽염공장 공장장님이 여동생 도와 담는 작업 해주어 고맙다며 죽염을 한봉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여동생은 4시 30분에 학생들을 태우고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 한다면서 학교로 가고 저는 여동생 집으로 왔습니다.

여동생은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오전과 오후 학교 차량 안내원과 나머지 시간 죽염공장가서 일하고 한달에 80여만원 벌어 생활비에 보탠다고 했습니다. 여동생은 학교에서 수고비로 40여만원을 받고 있는데 일정 부분은 학교 학생들중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작지만 용돈도 주고 간식도 사준다고 합니다. 여동생도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났기에 불쌍한 사람들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것 같네요. 참 착한 마음을 가진 여동생이 입니다. 오빠도 형편이 이래서 도와 주지 못하는게 안타깝더군요. 앞으로 생활이 좀 더 나아지기를 마음으로 빌어 봅니다.  

저랑 8년 터울이지만 저보다 더 어른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제가 늘 여동생에게 좀 많이 배우고 있지요. 어려운 시골살이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생활 하려고 노력합니다.
▲ 사랑스런 여동생~ 저랑 8년 터울이지만 저보다 더 어른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제가 늘 여동생에게 좀 많이 배우고 있지요. 어려운 시골살이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생활 하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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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덕, #민속죽염, #여동생, #속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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