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한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던 유대인 남자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이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길가에 쓰러져 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은 그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이를 치료하고 가까운 여관에 옮겨 완쾌할 때까지 숙박료도 지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의 핵심이 '우리가 이웃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며, '나의 이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예수가 말하려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최근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관계란 기대하거나, 요청되거나, 의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는 오로지 두 사람 사이에 자유로이 창조되는 것으로 타인의 육체를 통해, 타인에 의해 무언가가 오지 않으면 맺어지지 않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관계는 우리가 같은 지역 사람이기 때문에, 또는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인식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가 결정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이를 예수님은 이웃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읽었던 책들의 공통점은 위 글에서처럼 경계를 허무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국가라는 경계, 지역이라는 경계, 자각하여 스스로 경계 짓는 것이 아닌,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강제 또는 규정받았던 경계를 허물어가야 한다는 글들이었습니다.
6월2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관한 글을 요청받고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지역이라는 경계에 대한 자유로움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이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래야 '그것 지역이기주의 아니냐'라는 질문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으며, 우리의 선택이 지역이기주의가 아닌 더 나은 삶을 향한 결정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기후변화, 4대강살리기 사업의 직접적 연관성을 도민이, 시민이, 군민이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각각이 국가간 합의의 문제로 다가오거나, 중앙정부의 사업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간 합의로 교토의정서와 같은 합의서가 채택될 때, 중앙정부가 4대강사업의 큰 줄기를 바꿀 때, 보다 쉽게 그 향방이 결정된다고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되짚어보고, 우리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러한 상층단위 결정만으로 역사의 큰 흐름을 바꿔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는 흐름이 상층단위 결정에 영향을 미칠 때, 바로 역사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나온 역사, 우리 각자의 경험 속에서 깨닫습니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4.19 미완의 혁명부터, 광주민중항쟁, 87년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현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실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기후변화와 4대강 살리기 사업을 구체 사실을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기후변화 대응 방안 중 하나로 정부는 2020년까지 에너지 자립마을 600개를 만들 계획이라 합니다. 그래서 올해 4곳에 시범마을을 선정하였습니다. 정부는 마을마다 수십억 원의 투자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너지자립마을의 싹은 정부의 움직임 이전에 이미 이곳저곳에서 움트고 있었습니다. 핵폐기물처분장 예정부지로 지정되어 주민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던 부안(그 중에서도 등용마을)을 비롯하여, 통영 연대도, 산청 갈전마을 등이 그곳입니다. 이곳과 정부가 추진하려는 곳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민들과의 소통을 중심에 두느냐, 부차적으로 치부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차이가 어찌보면 사소하다 할 수 있겠지만, 에너지자립마을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한 그린빌리지 사업을 살펴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부가 보조금으로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하였으나 지역주민들과 소통하는 절차는 형식상 진행되었기에, '공짜'나 다름없는 전기요금으로 전기 소비는 증가되고, 그래서 그린빌리지의 의미는 퇴색되고 정부는 외형만 홍보하는 최악의 결과가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그린빌리지만이 아닌 정보화마을사업이나, 농촌체험마을 등 정부 주도로 추진된 많은 마을만들기 사례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를 자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사업의 실패 이유는 다름 아닌 열정있는 마을 주체발굴과 마을 주체가 중심이 되어 마을주민들 사이의 소통을 일구어내는 과정이 소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민들과의 소통을 중심에 두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기후변화 대응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에서 사회가 의미있게 진일보하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핵심 요소입니다.
4대강살리기 사업은 또 어떨까요? 정부는 대운하사업이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대운하사업은 안 한다며, 들고 나온 것이 바로 4대강 살리기 사업입니다. 환경단체들이 대운하의 전단계라고 이야기하면, 정부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보를 만드는 공사입니다. 정작 썩어들어가고 오염된 지천을 살리는 일에 먼저 나서는 것이 아닌 강 본류에 보를 만들고 준설을 하는 일에 돈을 쏟아붓는 이 사업을 온전히 4대강 살리기라 보기 어렵습니다.
정말 4대강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의 생생한 의견을 모아, 건설족이 아닌 지역주민의 삶과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아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맡게 될 지역의 지천과 본류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4대강을 살리기 위해 진정 노력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을 뽑을 때, 생명의 젖줄인 강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 혹은 자동차를 몰 때, 우리는 어느 순간 가속 페달을 밟을 것인지,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주위 여러 정황들을 살펴보며, 찰나이지만 우리는 두 페달 중 한 페달을 선택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선거라는 공간도 이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우리가 권력을 위임했던 집권자들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연임이라는 가속 페달의 신호를 보내 더 내달리게 할지, 교체라는 브레이크 페달의 신호를 보내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할지의 신호를 보냅니다.
미국산쇠고기 수입, 용산참사, 4대강사업, 그리고 서울 집중이 아닌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고민에서 나온 세종시 재검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내달려온 이 정부에게 우리가 6월 2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보내야 할 신호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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