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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제 이름이 똥갭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이지요. 지금도 부모님과 가까운 사람들은 저를 부를 때 똥개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놀라웠다. 사람의 이름이 똥개라니. 옛날 양반과 상민이 있을 때 어느 천민에게 붙여줬던 이름이라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똥개라는 이름을 지어주다니, 그것도 부모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이름이라니.

 

진돗개, 풍산개 같은 명견은 물론이고 푸들이나 치와와 같은 애완견에 이르기까지 개의 종류는 많다. 수많은 개 종류 중에서도 똥개는 가장 대접 받지 못하는 개다. 그런데 사람의 이름을 하필이면 똥개라고 짓다니.

 

18일 오후 광화문 지하도에 있는 '광' 화랑 '네팔 여행 스케치 전시회'에 들어서자 첫 번째 만난 이름이 '똥개'였다. 일단 전시작품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작품들을 둘러보며 또 다시 놀라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네팔 여행 중에 그린 그림들과 사진, 그리고 글이 시인 뺨칠 정도로 감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두고 돌아서는 나는 여행객, 아무 힘도 없는 그저 제 몸 하나 힘겹게 끌고 가는 인생의 여행자, 그런 나에게 너는 살아있다고,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지, 나는 힘없는 여행자, 그러나 이제는 꿈꾸는 여행자, 너를 다시 만날 꿈을 쫓는 행복한 여행자."

 

감성이 깊은 만화가는 네팔여행을 시작하자마자 꿈꾸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네팔 땅에 들어서면서 만난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까지 그에게는 꿈이었고 사랑이었다. 아직 도시화되지 않고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땅, 그 땅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에게 놀라움과 깊은 사랑을 듬뿍 안겨준 것이리라.

 

가난하지만 큰 욕심 없이 해맑은 눈망울을 가진 사람들.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고 가는 낯선 여행객에게 다가와 짐을 들어주고 몇 푼 돈벌이를 하려 했다가 그저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싱긋 웃으며 돌아서는 아저씨의 모습도, 그에게는 너무나 정다운 모습이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진 건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웃으며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를 가져야 행복하겠소?' 머릿속에는 큰 숫자들이 아른거린다. '머리 아픈 욕심은 잠시 두고 이리 와서 오늘 저녁밥이나 맛있게 먹읍시다. 끓고 있는 정체모를 죽을 쑤며 한없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아... 행복이 여기에 있다."

 

종이 위엔 길가에서 뚜껑도 없는 그릇에 죽을 끓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네팔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가난하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 가난한 죽을 끓이며 행복에 잠기는 모습에서 그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에 빠져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지 알게 되었나 보다.

 

작가는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인기 만화가였다. 두 곳의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이 바쁜 몸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서른을 넘긴 어느 날 자신을 뒤돌아보며 문득 떠나고 싶어졌고, 서른  둘의 나이에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로 훌쩍 날아간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새들은 집을 짓고, 구름은 흘러간다. 내가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약속들은 생겨나고 식당의 예약이 채워진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지구는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

 

그가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것은 빈틈없이 채워진 일상들과 앞만 보고 달리는 욕망의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새하얗게 눈 덮인 히말라야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땅 네팔을 찾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보고 싶었으리라. 태고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 있는 네팔과 히말라야가 그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는지도.

 

"바람을 쫓아 너에게로 왔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조용히 누워있는 너에게, 담고 있던 내 시커먼 마음을, 검게 타버린 내 마음을, 네가 자는 동안 몰래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은 하얗습니다. 다시 하얗습니다."

 

그가 히말라야를 보고 온 뒤 털어놓은 속마음이다. 아직 30대 초반인 작가는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자신의 시커먼 마음, 검게 타버린 마음을 내려놓고 왔다고 했을까? 오직 치열한 경쟁에서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경쟁 시스템이 만화가의 세계인들 예외일 수 있었을까?

 

"네팔 거리의 소꿉놀이 아이, 조그마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 조용히 바라보던 눈망울이 나에게 말을 건다."

 

동그란 얼굴을 한 네팔 어린이의 얼굴 그림 옆에 쓰여 있는 글이다. 전시된 스케치 그림과 사진들엔 유난히 어린이들이 많다. 작가는 네팔의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소박한 그들의 모습· 삶에 깊은 애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50여 일이나 긴 날들을 네팔을 여행하는 동안 그는 그 땅과 그곳 사람들에게 듬뿍 정을 들였나 보다.

 

"'나마스떼!'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이는 말라붙은 콧물에 하얗게 튼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 아버지에게 네팔식 인사를 하고는 본능적으로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를 그린다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 지구를 돌아 아무런 이유도, 부탁도 없이 그저 우연히 만나 온전히 나의 가슴이, 나의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아이의 얼굴, 나는 내가 그림쟁이인 것에 감사했고, 네팔에 온 것에 감사했다."

 

작가가 짧지 않은 50여 일간 네팔을 여행하며 바라보고, 느끼고, 스케치한 그림들은 단순한 그림들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잘 살고 잘난 사람들, 부자나라라고 자부하는 나라들이 우쭐거리며 내려다보는 그 아름다운 땅 네팔 그러나 그 땅은 작가에게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소박한 삶에 대한 정다움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그런 모습이었을 게다.

 

무한경쟁의 바쁜 일상을 접고, 많은 손해를 감수하며 낯설고 두려운 땅으로 훌쩍 떠난 젊은 작가는 여행에 대한 남다른 철학도 갖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 했어요, 많이 힘드셨죠? 당신 덕에 전 오늘 많은 걸 볼 수 있어 행복했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발을 그려 놓은 스케치 그림에 쓴 글이다. 자신의 몸이지만 여행으로 가장 힘든 일을 감당하는 다리와 발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글이다.

 

"걷다, 나는 걷고 있다. 그제도 걸었고,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걷고 있다. 나는 걷고 있다. 아마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일도 걷고 있겠지, 인생도 여행처럼, 여행도 인생처럼 나는 걷고 있다."

 

신발을 그린 그림에 쓰여 있는 글이다. 여행은 걷는 것이고 인생이며, 인생이 곧 여행이라는 그의 여행과 인생철학이 담긴 글이다.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것이 좋다. 혼자 떠난 여행일수록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계획되지 않은 새로운 사건들을 맞이할 가능성이 커진다. 가벼운 짐과 무계획이 여행의 진정한 맛을 내는 중요한 조미료가 된다. 아늑하고 풍족한 식탁보다 누추하고 부족한 거리의 한 끼 식사가 작은 깨우침을 선사한다. 여행은 혼자 떠나 수백 명의 친구와 함께 걷다가 혼자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에 대한 그의 철학은 명쾌하다.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도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질질 끌며 그 가방의 무게에 짓눌리고, 소지품에 얽매이는 것보다 가벼운 짐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떠나는 여행을 그는 좋아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네팔여행길에서 네팔 땅을 밟자마자 길을 잃어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길가에 있는 작은 가게 주인아저씨의 친절한 도움으로 길을 찾고 이후의 여행일정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50일 동안의 네팔 여행 중에 그가 그린, 감성이 물씬 풍기는 스케치 그림들과 사진들은 한 점 한 점이 그림 칼럼이고 그림 시였다. 다른 관람객들도 놀라운 그의 감성과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와 그를 찾았다. 왜 이름이 하필이면 "똥개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 제가 몸이 너무 쇠약했답니다. 걱정이 되신 부모님께서 죽지 말고 튼튼하게 자라라고 지어준 이름이 똥개랍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천한 이름을 가져야 오히려 튼튼하고 오래 산다는,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일이 잘 풀리고 잘 산다는 말이요."

 

물론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김동범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과 가까운 사람들은 지금도 어렸을 때 지어준 또 다른 이름 '똥개"로 부른다는 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 거북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단다.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이름이기 때문이란다.

 

전시회는 다음 주 화요일(23일)오전까지 열린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그가 여행 중에 그린 그림과 사진, 그리고 보고 느낀 감동과 여행기 글들을 묶어 만든 책, 카투니스트 동범의 네팔 스케치 포엠 '가끔은 길을 잃어도 괜찮아'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태그:#똥개 만화가, #네팔, #김동범, #이승철,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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