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부터 꼭 35년 전이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3시 15분. 나를 비롯하여 23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은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동아일보사 2층 공무국에서 닷새째 단식 농성 중이었다. 그 농성장으로 몽둥이를 든 술 취한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우리를 개 끌듯 밖으로 끌고 나가면서 몽둥이질, 발길질을 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났다.

2층 공무국에서 단식중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구부린 자세로 검은 안경을 쓴 서른살의 정연주. 그 왼쪽에 서있는 이가 성유보 선배. 박종만 선배 등 많은 이들의 35년전 얼굴이다. 내 오른쪽 바로 뒤에 서있는 이가 심재택 선배인데, 그도 하늘나라에 가 있다.
▲ 35년전 2층 공무국에서 단식중인 동아일보 기자들 모습 2층 공무국에서 단식중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구부린 자세로 검은 안경을 쓴 서른살의 정연주. 그 왼쪽에 서있는 이가 성유보 선배. 박종만 선배 등 많은 이들의 35년전 얼굴이다. 내 오른쪽 바로 뒤에 서있는 이가 심재택 선배인데, 그도 하늘나라에 가 있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술취한 사내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23명이 단식 농성을 했던 2층 공무국은 납으로 만든 활자판이 가득했던 곳이다. 요즘에야 컴퓨터로 신문을 만들어 인쇄하지만 당시만 해도 납으로 만든 활자를 하나하나 뽑아서 조판을 하고, 그것을 납으로 다시 판을 떠 인쇄했다. 이곳에서 우리들은 3월 12일부터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고, 3층 편집국에는 80여 명의 기자들이, <동아방송> 스튜디오와 사무실이 있는 4층에는 동아방송 피디, 아나운서들이 제작을 거부하면서 농성 중이었다.

우리들이 그렇게 제작을 거부하면서 농성을 하게 된 사연은 길고 처절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언론 상황을 죄다 이야기해야 그 '3월 17일'까지 이르게 된 연유를 알게 된다. 그 긴 사연은 '1975년 3월 17일 새벽'의 일을 먼저 이야기하고 난 뒤 이어가겠다. 그 긴 사연과 그 뒤에 벌어진 이 땅의 언론 역사를 보면, 쓰레기처럼 악취를 풍기면서 온갖 병균의 온상이 된, 그리고 스스로 오만한 권력이 되어 사회적 흉기가 되어버린 오늘 한국 언론의 뿌리가 보인다.

(원래 나의 '증언'에서 '감사원 부분'이 끝나면 바로 '배임죄' 기소와 관련하여 '검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요즘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발언, 여러 법원 무죄판결에 대한 이념 공세 등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큰 사건들에서 드러나는 '언론 문제'가 하도 심각하여, 언론문제부터 먼저 다뤄야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인 김우룡씨가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방송장악 관련 발언을 보면서 언론이야기가 절박한 문제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되었다.)

2층 공무국 단식장 칠판에 붙어 있던 글귀. 소금을 아낍시다라는 말도 있다.
▲ 2층 단식장에 있는 글귀. 2층 공무국 단식장 칠판에 붙어 있던 글귀. 소금을 아낍시다라는 말도 있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만삭의 아내 담당 의사 "걱정말고 싸우시라"

2층 공무국에서 단식 중이던 우리들 23명은 입구를 의자로 쌓아서 막았고, 2층 베란다로 연결되는 쪽은 유리창 밖에 이중으로 되어있는 철문이 있는데 그 철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철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2층 공무국은 난공불락이었다. 철문을 부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식 농성 사흘째 되던 날, 동아일보 측은 2층 공무국에 있던 전화선을 모두 단절시켰다. 당시 나의 아내는 첫째 아이의 분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담당해 온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뒤 아내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다. 그 의사는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싸우라"고 격려해주었다. 아내 담당 의사와 통화를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로 통하는 전화선이 단절되었다. 당시에는 집에 전화가 없어서 아내와 통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전화가 참 귀했다. (첫 아이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지 닷새 뒤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내가 단식 중이었다고 하여 동아투위 선배들은 한때 아이의 별명을 '단식이'라 부르기도 했다).

전화선까지 단절되자 2층 공무국에 있던 우리가 바깥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3층 편집국으로 원고를 보내는 직경 15cm 정도의 조그만 도르래 통이 오가는 공간이었다. 도르래 통이 있는 그 조그만 공간을 통해 3층 농성자들과 소통을 했고, 농성장을 방문한 외부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2층은 단식농성장은 외부와 완전 단절. 3층 편집국과 연결된 원고 전달용 도르래가 유일한 외부와의 통로. 3층 편집국에서 2층 단식팀들과 대화중인 모습. 가운데가 원고 전달용 도르래. 직경이 15cm 정도.
▲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 원고 도르래 2층은 단식농성장은 외부와 완전 단절. 3층 편집국과 연결된 원고 전달용 도르래가 유일한 외부와의 통로. 3층 편집국에서 2층 단식팀들과 대화중인 모습. 가운데가 원고 전달용 도르래. 직경이 15cm 정도.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단식 농성 사흘이 지나면서 동아일보 경영진이 농성 중인 제작거부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단식 농성조는 밤에 잘 때 두 명씩 조를 짜서 1시간씩 불침번을 보게 했다. 나는 3월 17일 새벽 불침번을 선 뒤, 2층 창문 쪽에 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양쪽으로 활자판이 있고, 그 사이 좁은 공간에 자리를 깔고 우리는 잠을 잤다.

잠시 잠에 빠졌다가 고함 소리에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처들어 온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내게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2층 창문 쪽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유리창 밖을 이중으로 보호하고 있는 철문을 산소용접기로 잘라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해머로 그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범죄 영화에서나 봄직한 그 장면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철문이 겹으로 있는 그 2층 창문에서 가까운 곳에다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그러다 보니 저들 공격의 맨 앞에 노출되게 되었다.

순식간에 철문이 부서지고, 유리창이 와장창 깨어지면서 몽둥이를 든 한 무리의 젊은 사내들이 무서운 기세로 2층 공무국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로 그들의 맨 앞에 내가 서 있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20대, 30대의 젊은 사내들이었다. 술 냄새가 확 났다. 그들은 욕설을 퍼부면서 나를 다짜고짜 붙잡더니 2층 창문으로 끌고 가서 밖으로 내동댕이를 쳤다.  2층 밖은, 2층과 같은 높이의 꽤 넓은 베란다가 있었다. 동아일보 6층 사옥과 당시 목조 2층 건물인 별관(지금의 동아일보 신사옥 자리)으로 통하는 길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었다.

2층 단식 기자들이 3층 편집국과 원고 송고용 도르래 통이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뒤로 납활자판이 보인다.
▲ 3층 편집국과 소통중 2층 단식 기자들이 3층 편집국과 원고 송고용 도르래 통이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뒤로 납활자판이 보인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안경이 깨지고, 손바닥에 유리가 박히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지자, 밖에 있던 술 취한 사내들이 몽둥이질을 했다. 안경이 깨지고, 내동댕이쳐지면서 바닥에 깔려 있던 깨진 유리 조각이 손바닥에 박혀 피가 흥건히 났다. 두 사내가 와서 양쪽 팔을 잡고는 1층  차고 쪽으로 끌고 갔다.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층 차고 쪽에 내려갔더니, 동아일보 소속 차량인 초록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를 뒷자리 가운데 앉히고 두 사내가 양쪽에 앉았다. 그리고 차는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달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산소용접기로 철문을 뚫으면서 공격을 시작한 시간이 새벽 3시 15분 쯤 되었다. 당시 통행금지가 밤 12시부터 새벽 4시 사이였으니, 통금시간 중이었던 것이다. 내가 창문 가까이에 있다가 맨 먼저 공격을 당해 어디론가 실려갈 때까지 불과 5~10분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을 터다. 차가 동아일보 차고를 벗어나 광화문 쪽으로 나왔는데, 수백 명의 경찰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나를 태운 차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중앙청을 지나 어디론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경찰 출입을 하던 사건 기자 시절, 야근을 하면서 통금 때의 서울시내 풍경과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광화문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차량을 일일이 검문했다. 신문사 차량에는 통금 때 다닐 수 있는 '야통증'(야간통행증)이 있어서, 통금 시간에도 취재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 나를 태운 차량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그냥 마구 달렸다. 도착하고 보니, 혜화동 로타리 근처에 있는 고려대 우석병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단식했던 동료 선배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석 병원 마당에는 우리에게 몽둥이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던 술 취한 사내들이 서성이면서 우리에게 욕설을 하는 등 적대감을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아일보사 측은 그때 태권도를 하는 깡패들과 동아일보 보급소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제작거부 농성사원들을 강제 축출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에 동아일보의 어느 정치부 기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단식농성을 할 때 2층 공무국 유리창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잠자리를 하여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2층 베란다로 내던져졌다. 당시 남아 있던 동료들은 술 취한 사내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험하게 달려들자, 제 몸 생각보다는 활자판이 무너질까 봐 "활자판 넘어진다, 조심하라"고 고함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순진한 바보들이었다.

동아일보에섯 쫓겨난지 35년에 다시 모였다. 35년의 세월. 우리의 젊음은 다 지나갔다. 올해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열네 동지들의 추모식도 함께 했다.
▲ 35년뒤 우리들은 다시 모였다 동아일보에섯 쫓겨난지 35년에 다시 모였다. 35년의 세월. 우리의 젊음은 다 지나갔다. 올해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열네 동지들의 추모식도 함께 했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35년의 세월이 흐른 뒤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35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세월이었을까. 나보다 입사가 3년 빠른, 그리고 긴급조치 9호 동기생인, 박종만 선배가 최근 어느 글에서 그 35년을 이렇게 썼다.

어린시절 나는 '일제 36년'(정확히 말하면 35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게 참 엄청나게 긴 세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억겁(億劫)도 수유(須臾)'라 했던가요? 세종로 139번지의 치 떨리는 만행이 자행된 그 해 그 봄의 기억이 엊그제 일인 양 이렇게 뇌리에 생생한데 벌써 35년이 흘렀다네요. 그러나 되돌아보면 35년은 역시 긴 세월이었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 중에서 고갱이 35년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러니 35년은 사람의 한 평생과 맞먹는 기나긴 세월이라 해도 좋겠지요.

요즘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가슴 짠하게 실감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13명 동지 중에 열네 분이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남아 있는 이들도 모두 주름진 얼굴, 구부정한 어깨, 윤기 사라진 목소리로 세월의 속절없음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지요. 그동안 삶의 궤적을 조금씩 달리 해오면서 각기 살아가는 모양새도 달라지고 세상을 향한 시각과 생각에도 꽤나 많은 간격이 생겼지 않습니까? 35년은 역시 긴 세월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 모두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35년 전, 그 엄혹했던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함께 부둥켜안고 온몸으로 지키려 했던 자유언론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외치며 자유언론의 깃발을 사수하기 위해 칼바람 부는 거친 들판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때 그 어려운 인생의 중대 결단을 함께 한 동지들이라는 것 역시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열네 동지들의 모습. 이해동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이들을 '순교자'라 하였다. 자유언론 제단 앞에 그들의 삶을 던진 순교자. 그들은 우리 가슴 속에 늘 살아 남아 있다.
▲ 열 네명 동지들 모습. 먼저 세상을 떠난 열네 동지들의 모습. 이해동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이들을 '순교자'라 하였다. 자유언론 제단 앞에 그들의 삶을 던진 순교자. 그들은 우리 가슴 속에 늘 살아 남아 있다.
ⓒ 정연주

관련사진보기


35년의 세월이 지난 3월 17일 저녁, '주름진 얼굴, 구부정한 어깨, 윤기 사라진 목소리'의 우리들은 다시 모였다. 이 시대에 자유언론의 문제를 되짚어 보고, 또한 그 35년의 세월 속에 유명을 달리한 열 넷 동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우리들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함께 세월을 같이 해온 이해동 목사는 추도사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들 열 네 동지들의 죽음은 악의 세력, 거짓 세력에 의한 타살"이라고, 그래서 이 열 네 동지들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였다"고.

열 네 동지들의 영정 앞에 서니 35년 전 그 신새벽의 일들과 35년의 세월, 때로 그 외롭고 힘들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데,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다. 눈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앞이 흐릿했다. 열 네 동지들.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시라.

* 다음주에 계속 됩니다.


태그:#정연주, #한국 언론, #동아투위, #순교, #KBS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