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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삭발의 모정 1965년작
▲ 영화 삭발의 모정 1965년작
ⓒ 영화, '삭발의 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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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미한 꿈 속에서
어머니가 
머리칼 태워
모락모락
흰 쌀밥을 지으신다.

삭발을 감춘, 
하얀 미사포 같은 수건을 
머리에 쓴 
성모마리아 같은
거룩한 어머니가,

동백 머리 기름향 
타는 냄새, 긴 삼단 머리채 같은 
검은 연기 오래 오래
향불처럼
저녁 굴뚝으로 피어올리며
늦은 저녁 밥을 지으신다.

2.
산동네 탁발 나온
삿갓 쓴 비구니처럼, 
잿빛 몸빼 입고
밀짚 모자 쓴 어머니가
보리밭에서 일하다, 
엉덩이 밑에서
주워 왔다는
어린 동생들과
산동네 꼬맹이들까지…

기계충에 쇠똥 묻은
더러운 머리털들을
바리깡 이발 기계로
깨끗하게 밀어서 
거름 짚풀과 함께
아궁이에 깊이 밀어 넣고
모락모락 거름 냄새
소똥 묻은 머리칼 냄새
번갈아 굴뚝에 갈아 꽂으며
어머니가 저녁밥 지으신다.

젖배 곯고 커서
키가 작다는 큰 오빠

중학교 등록금 마련하려고
싹뚝 삼단머릿채 잘라 판 돈에서
얼마간 떼어서 산
간고등어 한마리 구우며
오랜만에 흰 쌀밥을 지으신다. 

읍내 중학교로 등록금 내러가신 
아버지는
이제 오시나 저제 오시나…. 
A B C D E...목청껏 외우다가
큰오빠는 어딜 갔나….

3.
저녁밥 굶고
깊이 깊이 잠이 들었던
내 유년의 다락방을,
천정 삼은 시렁에서
고드름 녹아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오두막 부엌에서,  

흰 수건을
미사포처럼
덮어쓴
거룩한 성모 마리아 같은
어머니가, 

온 집안에
머리칼 타는 냄새
연기처럼 피우며,
노릇노릇 간고등어 한마리
구우시며
오래 오래
희미한 꿈결 속에서
늦은 저녁 밥 지으시네…

어머니도 아름다움을 소망하는... '한 잎의 여자'였을텐데...

사람의 머리칼은, 무덤속에서도 얼마간 나무뿌리처럼 자란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사람의 머리칼을, 우리네 조상들은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평생 머리를 깎지 않았다. 아름다운 미를 생명처럼 여기는 현대 여성들 중에도 머리칼을 짧게 자르는 것보다 길게 가꾸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 더 많다 하겠다.

구한말의 기생들이 많이 쓰는 이여머리채는 꽤 쓸만한 집 한 채 가격이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인모의 가발과 가채의 경우는 상당한 고가에 속한다. 유행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여성들의 머리 유행이란, 머리칼 길이의 짧고 긴 차이에 다름 아닐 터다.

그러나 요즘은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해도, 공들여 가꾼 머리채를 팔아 가계비에 보태는 주부들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60~70년대만해도 동네 골목길에서 '채권이나 머리칼 삽니다...'외치고 다니는 흔했던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인조 모발의 가발과 가채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 탓이겠지만, 아직도 인모의 가발은 고가에 속한다. 나의 어머니의 경우, 긴 머리채는 모양을 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가계가 몹시 어려울 때 비상금으로 바꾸기 위한 듯 평소 정성드려 손질해 가꾸셨다. 특히 가계가 쪼들리는 신학기무렵에는, 어머니의 긴 삼단 머리채가 가계의 힘든 고비를 넘겨주곤 했다.

어머니도 어느 시인의 시구절처럼 '한잎의 여자'였을 텐데…. 굴곡 많은 격동기의 역사와 함께 호흡했던 어머니의  삶… 성녀 같은 희생의 계절이 있을뿐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면, 늘 가슴 저편이 얼음장처럼 서늘해 진다.

덧붙이는 글 | '한 잎의 여자', 오규원 시인의 시에서 인용.



#삭발의 모정#황정순#어머니#사모곡#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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