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물론, 어른이 돼서도 갈 때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는 곳이 동물원이다. 오사카 신이마미야나 도부쯔엔마에 역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관광지 중 하나가 텐노지 동물원이다. 숙소에서는 자전거로 5분, 걸어서도 여유있게 20분이면 족하다.
일본에 온 지 삼일째. 모처럼 해가 얼굴을 내밀어 재빨리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남대문과 흡사한 일명 '먹자골목'을 빠져나오면 좌측으로 '신세카이 게이트'가 있고, 길 건너에 원형의 철골 구조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텐노지 동물원 입구다.
입장권은 500엔. 매표기에 돈을 넣고 대인과 소인 여부, 장수를 입력하면 티켓이 나온다. 대부분의 유료 관광지에 무인발권기가 있는데 일본어를 몰라도 조작이 어렵지 않으니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른 시간인데 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이나 연인들이 많다.
동물원은 크게 남쪽과 북쪽 코스로 나눠져 있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나라의 팸플릿이 구비되어 있으니 참고해가며 순서대로 돌아보면 되겠다.
입장과 동시에 만나게 되는 북극곰. 그런데 한눈에도 엉성해뵈는 가짜 얼음에, 녀석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쩍다. 한동안 지켜보니 좁은 우리 안을 쉴새 없이 좌우로 서성거린다. 얼굴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하고 마치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표정이다.
동물원의 또다른 '얼굴마담' 코끼리. 누런 흙빛과 완벽하게 하나된 데다, 한동안 꼼짝을 하지 않아 수 초가 지나서야 생물(生物)임을 인지했다. 마치 화석 같기도 하고 거대한 조형물 같기도 한 코끼리는 볼 때마다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사람이 다니는 통로로 스스럼 없이 지나다니는 새들. 한 녀석이 난간 위로 올라와 갓 잡은 통통한 지렁이를 시식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보고 득달 같이 달려온 또다른 녀석 때문에 부리나케 자리를 피하고 있다.
새들은 육지동물보다 비교적 자유로워 보였지만 하늘 높게 그물망이 쳐져 있어 갇혀 있긴 매한가지다. '내 친구들을 풀어줘!'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로 노려보는 한 마리 새 앞에서 정말로 주눅이 들었다.
새들과 함께 우리를 공동 사용하고 있는 물개가 귀가 따갑게 포효하고 있다.
이 동물원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한 침팬지다. 마치 한참을 울다 기력마저 다한 듯한 표정이다. 보고 있는 사람마저 울고 싶어진다. 검고 깊은 눈과 한순간 마주쳤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기대와 달리 동물원 구경이 자꾸만 우울해진다.
슬픈 침팬지 옆으로 갈기갈기 찢은 종이로 얼굴을 가린 오랑우탄이 보인다. 정말 될대로 되란 자세다. 이를 본 일본인 연인 한 쌍이 한참을 웃으며 사진을 찍고 떠났지만, 어째 쉬이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얘는 또 뭔가? 이렇게 처량한 표정의 하이에나라니….
유리벽에 기대어 자는 듯 꼼작도 하지 않는 숫사자. 드넓은 초원에서 내뿜던 카리스마는 찾아볼 수가 없다. 동물원에 도착해서 얼마지 않아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녀석들도 흐린 날엔 만사가 귀찮은 걸까.
호랑이 역시 앞서 본 북극곰과 같은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9월, 국내의 한 동물원에서 발생한 '코끼리 돌팔매질 사건'(코끼리가 코로 돌을 말아 관객에게 던졌다는 사건. 경찰은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수사를 종결했다)이 기억난다. 혐의 입증이 안 돼 결국 영구 미제로 남았지만, 왠지 심증만은 확실했다. 외신에서 몇 번인가 동물들의 집단탈출 소식을 접했을 때도 '그럴 만하다' 생각했는데 어찌들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본 사슴 녀석의 눈빛이 너무 맑아 간절해 보인다. "당신도 결국 우리를 모른 척 할 거죠"라고 말하는 것 같다.
본인은 지난해 겨울부터 길고양이 두 마리와 인연을 맺어 함께 살고 있다. '도둑고양이'라 불리던 녀석들은 추위와 배고픔, 이유없는 돌팔매질에 익숙해져 처음 며칠간은 침대 밑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았다. 겨우 밖으로 나와 잠들었나 싶으면 움찔 놀라서 깨기도 하고, 사람처럼 끙끙 우는 소릴 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곁에 와서 몸을 부비기도 하고 능청스럽게 장난을 치고 애교를 떠니 짐승도 마음이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 싶다.
태국에 '네이처 파크(Nature Park)'란 곳에선 인간들을 위한 쇼에 동원됐다 불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된 아픈 코끼리들을 데려와 치료와 보호·관리를 하는데, 여기에 오는 관람객들은 이런 코끼리들과 함께 생활하며 진정한 교감을 경험한다고 들었다.
모름지기 맞아주는 이가 유쾌해야 찾는 이도 기쁜 법. 진정으로 '행복한 동물원'을 만드는 데 이제라도 국내외 관계자 분들께서 힘써주시길 건의해보는 바다. 그리만 된다면 평생 이용권을 구입해 아들 손자 며느리와 적어도 세 달에 한 번꼴은 찾아갈 용의가 있다.
전체적으로 침울한 나들이였지만 눈길을 끈 한 가지. 갑작스레 비가 오니 동물원 측에서 입구에 우산을 비치해 무료로 대여해줬다. 관람할 동안 이용하고 출구에서 경비원에게 돌려주면 된다. 작지만 세심한 배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덧붙이는 글 | 일본어 한글 표기의 경우 현지인의 발음과 최대한 유사하게 기재하고자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전 기사에서와 조금씩 다른 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부쯔엔'은 일본어로 동물원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