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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같은 손으로 카펫을 만들었고, 아동노동을 전 세계에 폭로하다 카펫마피아의 손에 죽은 아이 ''이크발 마시흐'의 소식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희뿌연 길 건너편으로부터, 사라졌다고 굳게 믿었던 난장이(기자 주: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들이 하나둘씩 나에게 다가왔다. 필리핀 쓰레기 산의 '신의 아이들'이, 방글라데시 다카의 봉제공장 아이들이, 동아시아의 난장이들이 전태일의 손을 잡고 뚜벅뚜벅 근대의 국경을 넘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1세기의 난장이들, 위로부터 글로벌이란 자양 속에서 배양되고 탈근대라는 수식어를 단 동아시아의 다수자들이 비로소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크발 마시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이크발 마시흐가 살던 파키스탄의 정세가 몹시 불안해 방향을 네팔로 틀 수 밖에….-<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중에서

 

1995년 부활절, 카펫을 짜던 파키스탄 소년 '이크발 마시흐'가 카펫마피아에게 살해당한다. 아동노동을 국제사회에 알렸다는 것, 단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에 카펫을 만드는 아동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카펫 공장에서 사라진 수많은 아이들은 또 다른 곳에서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절박한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 사건은 카펫을 짜던 아이들을 더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거멀라이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고즈윈 펴냄)은 동아시아 아동노동의 현장을 찾아 그들의 현실을 알리는 르포 형식의 책이다.

 

카펫 공장에서 밀려난 수많은 이크발 마시흐들은 채석장에서 새벽 6시부터 고사리 같은 손에 망치를 들고 돌을 깨거나 길거리에서 잠과 먹을 것을 해결하며 폐비닐을 줍는다. 혹은 템포(네팔의 교통수단으로 일명 톡톡이, 삼륜차) 요금 보조원을 하며 돈을 번다.

 

네팔에 가본 적이 없는지라 책에서 만난 템포가 궁금해 검색을 해봤다. 어떤 이의 2009년 11월의 글에 의하면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 속도도 느리고 안전하지 않아 현재 더 이상 새로운 템포는 투입될 수 없고 현재 운행 중인 템포도 시골외곽도시로 떠나야 한단다.

 

좀 엉뚱하다 싶지만, 이 글을 읽으며 네팔 카트만두 템포의 운명에 따라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하는 네팔의 어린 노동자들과 정권 혹은 정책이 바뀔 때마다 먹는 일까지 포기해야 하는 운명에 종종 처하는 우리의 노점상들이 겹쳐 떠올라 씁쓸해졌다.

 

"폐비닐을 주우러 다녔어요. 하루에 20루피(1루피≒16원) 정도 벌었지요. 그러다 유리에 다리를 베고 말았습니다. 맨발이었거든요."

 

"하루에 100루피(1600원) 벌어서 먹고 자고 하는데, 대략 한 달에 1200~1400루피(2만~2만 2천원)쯤 써요. 남는 걸 그냥 고향집에 보내죠. 생각만큼 많이 못 벌었어요. 아무리해도 한 달에 2500~3000루피(4만~4만 8천원) 밖에 못 벌어요. 한 달에 5000루피(8만원)만 벌어도 원이 없겠어요. 그러면 집에도 더 많이 보낼 수 있고, 생활도 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방은 여기서 일하는 친구들하고 같이 써요. 여섯 명이 같이 빌렸거든요. 가끔 영화도 보고 놀기도 해요. 버스 터미널이 있는 시내에도 가끔 나가기도 하죠. 근데 엄마 아빠가 정말 보고 싶은 거 있죠." -책속에서 소년 '수닐 바하돌 다만'

 

고향에서 5학년까지 다녔다는, 고향에서 소를 길렀지만 아무리해도 돈이 되지 않아 고향을 떠나 올 수밖에 없었다는 수닐 바하돌 다만의 꿈은 군대에 가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 '먹고 자고'라는 최소한의 의식주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돌 깨는 아이들을 만나는 동안 드문드문 궁금했다. '요즘과 같은 문명의 시대에 네팔의 아이들은 왜 돌을 깨야만 할까? 그리고 그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망치를 들고 깬 돌들은 어디에 쓰이는 걸까?'고.

 

고사리 손의 아이들이나 여인들이 잘게 부순 돌들은 네팔의 여러 길에 깔린단다. 가난한 아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돈벌이를 위해 밤새 달렸을, 도시에서 시골로 연장된 그 길들에도.

 

아이들이 망치를 들고 돌을 깨야하는 이유는 내전으로 생겨난 '네팔 마오이스트(마오쩌뚱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 때문이다. 이들이 다이너마이트를 훔쳐갈 수 있기 때문에 네팔 정부가 채석장에서의 다이너마이트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14세 이하의 아동노동은 국제기구에서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라즈쿠발은…(중략) "열네 살 이하는 일하면 안 된다고요? 누가 그래요? 난 그런 거 몰라요. 말도 안 돼요. 일 안 하면 먹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아동보호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거였다. 아동보호보다 노동할 권리 즉 '생존권'이 더 우선하는 것이 아니냐는 게 그의 주장 아닌 주장이었다. -책속에서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의 부제는 '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다. 저자는 카펫공장, 폐비닐 줍는 현장, 채석장 등을 찾아 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의 어제와 오늘을 들려준다.

 

이처럼 가족과 사회(국가)에 버려지다시피 버려져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이런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 노동에 버려진 아이들 일부는 마약이나 범죄 등과 같은 검은 세계로 빠져들기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뺏기기도 한다.

 

저자는 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을 만나는 한편 이렇게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과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위한 씨윈 센터' 등의 역할을 소개하기도 한다. 최저의 비용으로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벨기에 청년 리크만스 씨의 '달  뜨는 집'은 가장 인상 깊다.

 

카트만두에서 농활을 하고 있는 지리산 출신 대학생,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간 네팔 사람이 운영하는 '새벽을 여는 집'에서 볼런티어를 하겠다는 한국의 또 다른 대학생, 산재를 입힌 나라인 한국의 말을 네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네팔 사람들 등이 잔잔하게 소개된다.

 

아참, 덧붙이고 싶은 책 제목에 대한 이야기. 책을 읽기 전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란 책 제목이 우선 궁금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중간쯤에 나온다.

 

"흙 그릇에 꽃을 심어서 꽃이 피었어요. 거멀라마 자이,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기다리라고, 거멀라마 자이, 나는 떠난다고…나는 가는데, 기다려 달라고…."

 

프리란치는 하루 12시간 일해서 100루피에서 150루피를 번다고 했다. 고향에서는 5학년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중략) '흙 그릇에 핀 꽃'이란 곡이었다. 처음에는 노랫말의 뜻을 몰라, 몇 번 다시 불러 달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해져 왔다. 고향을 떠나, 소꿉동무 곁을 떠나 멀리 삼촌 집으로 돈 벌러 떠나온 그녀에게 '거멀라마 자이(흙 그릇에 핀 꽃)' 는 위안이자 곧 동경 아니었을까. 그러나 '기다려 달라' 며 고향을 떠나온 그녀의 손에 지금 쥐인 것은 하얀 꽃 '거멀라마 자이'가 아니라 돌 깨는 '망치'였다. 망치를 들고 선, 웃는 듯 우는 듯 한 그 아이의 얼굴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네팔의 한 표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돌 깨는 망치 대신 하얀 꽃을 꼭 쥐여 주고 싶었다.-책속에서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5~17세 사이의 어린이 노동자는 2억4천 명, 가장 많은 수가 아시아에 몰려 있다고 한다. 그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가슴 한구석을 싸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글 사이사이 실려 있는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그 눈빛들이 슬프게만 와 닿았다. 인상 깊은 대목들도 유난히 많아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책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을 찾아 떠난 여행|신명직 (지은이)|고즈윈|2010-02-18|정가 :11,500원(DVD 1 포함)   
 


거멀라마 자이, 꽃을 보며 기다려 다오 - 네팔의 어린 노동자들을 찾아 떠난 여행

신명직 지음, 고즈윈(2010)


태그:#네팔, #아동노동, #이크발 마시흐, #템포, #카트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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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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