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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지개 성냥>(감독 기탄잘리 라오 / 인도, 2006)

도시 한가운데 솟아있는 아파트 위로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치고, 해가 뜬다.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집에는 할머니와 고양이 단 둘 뿐. 할머니의 하루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식사하고, 고양이 밥주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 널고, 베란다에 나가 세상을 구경하거나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 뿐.

창문에 비치는 이웃집에는 물론 사람들이 있지만 재봉틀 일을 하거나 둘이 어울려 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과 할머니가 직접 만날 일은 없다. 가끔 개를 데리고 문을 두드리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유일한 친구다.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보물상자가 하나 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보물은 세계 곳곳이 그려져 있는 성냥갑! 고양이를 무릎에 안고 할머니는 성냥갑에 그려진 나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곤 한다.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지나고, 궁궐에 들어가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그러다 무지개 그림 아름다운 성냥갑을 보며 그 나라로 진짜 여행을 떠난다.

흔들의자에 앉아 무지개 성냥을 손에 들고 마지막 여행을 떠난 할머니를 발견한 것은 이웃집 할아버지. 무지개 나라에 도착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고양이를 데리고 홀로 사는 할머니의 일상과 홀로 떠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시간을 담은 애니메이션은 따뜻하고 차분해 오히려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나홀로 가구'인 우리나라의 상황을 비추어보는 것이 오히려 지나치게 계산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영화는 가슴을 건드리며, 현재 홀로이거나 혹은 앞으로 홀로일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만들어 준다.

#2. <컴퓨터를 배우세요> (감독 아낫 말츠 / 이스라엘, 2008) 

나이듦으로 인해 회사 생활 적응이 어려운 주인공 비다
▲ 영화 <컴퓨터를 배우세요>의 한 장면 나이듦으로 인해 회사 생활 적응이 어려운 주인공 비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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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는 중년의 직장 여성.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전문직 여성은 아니고, 사무직원으로 오래도록 근무해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로 컴퓨터!

직장 상사는 쌓여있는 서류 정리를 위해 컴퓨터 작업을 강조하고, 마음 먹고 컴퓨터를 배워보려고 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밤늦게 돌아온 딸이 차분하게 엄마를 위해 컴퓨터를 가르쳐주기는 처음부터 무리인 탓에 모녀는 싸움만 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하니 사무실이 텅 비어 있다. 비다만 이메일을 열어 보지 못해 회의 장소 변경을 알지 못했던 것.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결과는 해고.

딸을 만나러 간 클럽에서도 시끄러운 음악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저히 적응이 안 돼 급기야 화장실에서 홀로 울음을 터뜨리게 되고. 그래도 엄마인 비다는 실연을 당해 의기소침한 딸을 격려하며 웃어준다.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에 대해 20대 후반의 후배는 최고의 장난감이라며 엄청 재미있다고 신나하는데, 50대인 남편은 기본 기능을 익히느라 쩔쩔매는 요즘이다. 나 역시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싶으면 아이들 귀가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눈치를 보며 배워야 한다. 침침한 눈과 둔한 손끝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앞으로는 더하겠지?

비다는 결코 남이 아니다. 바로 우리, 아니 나다. 그러니 나이듦이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과정일 수밖에. 다 다르게 늙어가면서도 비슷하게 걸어가는 길이기에 이토록 공통의 답을 찾아내 보려고 애쓰는 거겠지. 영화는 내 앞에 놓인 나이듦의 길을 과연 어떤 걸음으로 걸어갈 것인지 가늠해 보게 해준다.

#3. <꼬마 사장과 키다리 조수> (감독 조경자 / 한국, 2008)

다시 봐도 역시 잘 만들었다(영화 속의 노년 121 기사 참조). 폐품을 수집하는 키작은 할머니 사장님을 카메라를 들고 쫓다가 친구가 된 키다리 조수(영화감독), 두 할머니가 엮어내는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빈곤한 노년 여성의 삶을 목소리 높이지 않고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노동의 가치, 자신의 노동에 대한 당당함, 손자를 뒷바라지하기 위한 변함 없는 내리 사랑, 자신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단단한 내면의 힘을 키 작고 한쪽 눈 불편한 할머니 사장님은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눈빛 하나 몸짓 하나로 충분히 보여준다.

꼬마 사장님의 모습
▲ 영화 <꼬마 사장과 키다리 조수>의 한 장면 꼬마 사장님의 모습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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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넘은 나이에 노인복지관 영화 수업에 참여해 영화 만들기에 푹 빠져 감독 데뷔까지 한 할머니 감독의 도전과 노력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잘난 체 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영화로 삶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그 솜씨는 연륜 덕분일 것이다.

꼬마 사장님에게 우정을 넘어 경의를 표하는 할머니 감독의 그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고 고맙다. 키다리 조수에게 속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할머니 사장님의 무뚝뚝한 듯 하면서도 깊은 정은 저절로 웃음짓게 만든다.

삶의 마지막까지 꼭 쥐고 놓지 않아야할 자존감이란 것은 어쩜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책임지려는 의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관계의 따뜻함에서 오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4.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 (감독 임성민 / 한국, 2008)

이번에도 또 할머니의 운전 이야기다. 영화 <날아라, 펭귄 (감독 임순례 / 한국, 2009)><할머니와 란제리(감독 베티나 오베를리 / 스위스, 2006)에서도 할머니들은 운전을 배우면서 남편이나 아들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이동의 자유를 꿈꾸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한다.

나 역시 최근 10년 만에 재개한 운전을 통해 많은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 내 맘대로 이동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운전면허를 딴 지 이제 막 한 달이 된 김옥분 할머니. 운전 연습을 시켜주느라 조수석에 앉은 할아버지는 잔소리에 역정을 내다 못해 소리를 지르며 차에서 내려버린다. 할아버지를 향해 투덜거리면서도 할머니는 결코 기죽지 않는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보게 된 유경은 직장 상사와 한바탕하고 머리를 식히러 나온 길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유경과 할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이야기라는 것의 핵심이 내가 운전을 다시 하게 된 요즘 많이 받는 질문과 똑같아 속으로 웃었다.

"할머니 그 연세에 운전 힘들지 않으세요? 뭐하러 힘들게…."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하다.

"난 더 늦기 전에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싶다…."

특히 대답 중 한 부분은 내 대답과 완벽하게 일치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다!" 

#5. 마무리

인생의 개수 만큼 나이듦 역시 다 달라 영화제에서 '천 개의 나이듦'이란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누구나 다 먹는 나이이기에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조금만 눈여겨 보면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방식으로 나이 들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을 뿐.

삶의 다양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나이듦의 다양성 또한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 노년의 삶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함에 대한 인정이 경제적인 조건 자체를 향상시켜주진 않을지 몰라도 각기 다름을 인정 받을 때 자존감은 회복되고 길 찾기가 좀 쉬워질 것 같다.

나이듦과 노년, 그것도 여성을 중심에 놓고 영화로 들여다본 나이듦의 실상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나이 먹어 가는 나를 일깨우고 어떻게 나이들어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덧붙이는 글 | 이 단편영화 네 편은 2010년 3월 8일, 서울여성플라자(아트홀 봄)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여성영화 상영회' 제2부 <시네마 토크 : 천 개의 나이듦>에서 상영된 영화들입니다.



태그:#무지개 성냥, #컴퓨터를 배우세요, #꼬마 사장과 키다리 조수,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 #서울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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