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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향기 가득한 춘삼월 제주는 무슨 색을 띠고 있을까?'

제주행 항공티켓을 손에 쥐어든 순간부터 마음은 콩닥콩닥 셀렜다. 솔직히 그곳에 가면 '봄의 향연'에 한껏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색'으로 온통 물들어 있을 평화의 섬을 꿈꾸며 하늘길을 재촉한 것은 3월 3일 오후 3시. 그리 흔치 않은 제주도 출장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도 일상사의 연속선상에서 2박 3일씩이나.

멀리 보이는 섬에는 봄이 어디 만치 와 있을까?
▲ 비행기 창 밖 제주 멀리 보이는 섬에는 봄이 어디 만치 와 있을까?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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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호텔에서 밥 먹고 회의만 하다 일정이 끝나고 마는 세미나 출장은 아니겠지?"

일행들도 한결 같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부푼 봄의 꿈을 가득 안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하늘 위에서 내려다 뵈던 섬 주변의 양호한 시계는 착륙하면서 금세 실망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바람이 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봄을 시샘하는 비와 먹구름이 평화의 섬 제주를 뒤덮고 있었다.

비행기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제주, 날씨가 수상하다...
▲ 제주가 한 눈에...그런데 날씨가 비행기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제주, 날씨가 수상하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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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글쎄 시샘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음날까지 지속됐다. 2년 전에도 비슷한 시기의 출장길에 비를 만나 출중한 광경들을 시야에 담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또? 호텔에 들어서기까지 불길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2박 3일 꼬박 봄을 시샘하는 비가 흩날렸다. 호텔에 갇혀 밥 먹고 회의하기만을 반복했다. 정겨운 올레길과 그 주변 봄의 전령사인 울긋불긋 꽃망울도 빗속에 감춰져 좀처럼 시야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비에 젖은 카메라 렌즈를 이곳저곳 들이대 보았지만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다.

"허벅 진 냉바리 찍엉 뭐허쿠광?"

제주 칼호텔 광장에 외로이 선 '허벅 진 여인상'.
▲ 무거운 허벅 때문일까? 제주 칼호텔 광장에 외로이 선 '허벅 진 여인상'.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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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성능이 좋지 않은 비 맞은 카메라 렌즈도 무기력한 제주의 봄을 포기하는 듯했다. 2박 3일 동안 치열한 고민과 열띤 토론을 벌였던 호텔 광장에 우뚝 선 한 여인상이 그나마 아침저녁으로 발길을 멈춰 세우곤 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줄기가 두 눈 밑으로 흘러내리는 가엾은 표정을 한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희한한 여인상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보고 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다.

"허벅 진 냉바리 찍엉 뭐허쿠광?"

호텔 종업원 차림의 한 남성이 등 뒤에서 뭐라고 했는데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 죄송하지만 허벅진 뭐고, 또 냉바린 뭡니까?"

'허벅 진 여인상'은 어두컴컴한 밤에도 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다.
▲ 누굴 보고 있는 걸까? '허벅 진 여인상'은 어두컴컴한 밤에도 한 곳만을 쳐다보고 있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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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 진 여인상' 아래에 우뚝 선 돌하르방 둘.
▲ 돌하르방이 여인을 호위? '허벅 진 여인상' 아래에 우뚝 선 돌하르방 둘.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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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묻는 내게 그는 "육지말로는 물동이 진 여인"이라고 웃으면서 답한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여인은 해녀 외에도 '허벅'(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의 제주방언)을 진 억센 여인과 관련된 전설이 섬 어딜 가나 가득하다는 그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물 허벅진 여인'에 관한 내력을 캐묻기 시작했다.

'혹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동료들에게 무지가 폭로될까봐 조심조심 '물 허벅진 여인'에 대한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자료와 함께 호텔 인터넷 룸에서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 등을 뒤져 보이며 상세하게 알려줬다.

삶의 애환 가득 담긴 '허벅'... 왜 여성들만 무거운 고통을 짊어졌을까?

제주 출장 길에서 만난 허벅 진 그녀의 두 눈가에 눈물이?
▲ 물 허벅 진 여인상 제주 출장 길에서 만난 허벅 진 그녀의 두 눈가에 눈물이?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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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은 '옹기로 만들어진 물 긷는 용기'였다. 그러나 '허벅'으로 물을 긷는 일은 전통적으로 제주여성 고유의 일이었다는 내용에 눈이 번뜩였다. '허벅'에 관한 전설에는 제주의 역사와 함께 제주 여성의 삶과 애환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해녀와는 또 다른 제주 여성들의 삶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그 내력들이 제주도 홈페이지와 제주관광 안내책자 등에 자세히 실려 있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허벅'에 까다로운 금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빈 허벅을 등에 지고 남을 앞질러 가서도 안 되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고 한다. 특히 아침녘에 남성이 외출을 나가다가 빈 허벅을 진 여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데 이는 물이 담기지 않은 빈 '허벅'은 생명력 부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외에도 '허벅'은 물 긷는 용도 외에도 각종 곡물씨앗의 보관, 술이나 간장 등의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돈집이나 친척집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팥죽을 쑤어서 담아갔으며 혼례식 등의 여흥에서는 숟가락으로 어깨 부분을 쳐서 흥겹게 장단을 맞추는 악기의 역할도 했다.

속에 담긴 물의 양에 따라 그 음색(音色)을 달리하는 '허벅장단'이야말로 제주의 특색을 담은 소리로 손색이 없다는 게 제주도의 자랑이다. 이렇듯 제주의 '허벅'에는 제주의 빛깔과 소리, 제주의 삶이 담겨 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면서 수도가 설비되고 플라스틱 그릇에 밀려 옹기가마들은 모두 문을 닫으면서 '허벅'은 급속히 사라져 갔다. 제주도는 지난 2001년 '허벅'을 제주문화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고 그 기술을 보존 전승할 가치가 있다고 하여 무형문화재 제14호 '제주도 허벅장'을 지정했다.

"타래 머리 올린 여인, 가을 하늘에 맨살을 드러냈네"

'허벅 진 여인' 앞 바다에는 해녀도 있었다.
▲ 비오는 바다에는 해녀가 '허벅 진 여인' 앞 바다에는 해녀도 있었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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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허벅'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빛살을 담던 그릇이었다. 그 내력은 조선 후기 문신 임징하의 시집에서도 나타난다. 장령으로 등용돼 6개조의 상소문을 올려 탕평책에 반대,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유배당한 그는 '탐라잡시'에서 '허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느 집 사람인지 타래 머리 올린 여인
가을 하늘에 맨살을 드러냈네.
(중략)
물동이 지고 샘에서 맑은 물을 길어오네.
일년 내내 부지런히 힘들게 일해 봐도
반 가릴 짧은 치마도 없네."

제주에서 물동이는 아주 특별했다. 비는 자주 내렸지만 결코 고이거나 샘을 이루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 속 깊이 스며들었다 일부 해안가에서만 샘솟는 물을 길어야 했는데, 살림은 여인네 몫이었기에 물 긷는 일도 주로 여성들 몫이었기에 제주 여성과 '허벅'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이었던 것이다.

'허벅'은 생명 그 자체, 의미 담긴 전통행사 더 풍성했으면...'아쉬움'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구름과 비 때문에 제주의 아름다운 봄의 향연은 볼 수 없었지만...
▲ 추적 추적한 제주의 봄 바다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구름과 비 때문에 제주의 아름다운 봄의 향연은 볼 수 없었지만...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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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라. 일용할 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식구들은 큰 낭패를 봤을 테고, 어머니나 딸들은 큰 욕을 봤을 터. 그러기에 허벅은 생명 그 자체였다는 주장이 일리 있어 보인다. 제주 여인들이 가장 애지중지하고 옆에 둔 생활 필수용구였고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그 됨됨이를 평가받는 1차 수단이었으리라.

하루나 며칠간 가족이 사용할 물을 긷기 위해 5리∼10리가 되는 자갈 비탈길을 오르내려야했던 그 때 그 제주 여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거듭 발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생활용구로서는 수명을 다했지만 제주 사람들의 삶의 지혜와 순박한 미의식, 또 그 안에 담긴 제주 여인들의 한을 되새기기 위한 기획전과 전통행사가 제주특별자치도,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의해 간간히 실시되고 있다고 하지만 '허벅 여인'에 관한 나 같은 무지렁뱅이 남성들을 위해 더 많은 전통행사를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과 아쉬움이 남는다.

비 내린 덕분에 '허벅 진 여인'과 꼬박 2박 3일간 아침저녁으로 만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겐 꽤 의미 있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허벅 진 여인상'과 이별을 하노라니 아쉬움이 남는다. 제주에는 '해녀' 외에도 어딜 가나 '물 허벅 진 여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올 봄 제주 출장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다.


태그:#물 허벅 진 여인, #제주도,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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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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