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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말을 기준으로 가계 빚이 734조 원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6.6%가 증가한 수치이며, 국민 1인당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1500만 원이 넘는 액수다. 전국 아파트 시가총액의 73%,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8배, 국내총생산의 70%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금융기관에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약 94%(692조원)가 가계대출이다. 가계대출이란 예금은행을 포함하여 금융기관이 가계에 빌려준 돈을 말한다. 특히 지난 4분기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저축은행, 신협, 새마을금고, 보험 등)의 가계대출은 전 분기보다 7조 6천억 원이나 늘어 사상 최대의 분기 증가세를 보였다. 정부가 1금융권(은행)의 주택대출 규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지난달 24일 정부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 '글로벌 코리아 2010'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케네스 로고프 미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한국의 부채문제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디레버리지(De-leverage, 자산가치 하락에 따른 부채 상환)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보유 자산(부동산, 주식 등)의 가격 폭락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자산 매각과 부채 탕감 러시(rush)가 발생하면, 금융회사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현재의 가계부채 규모는 관리 가능한 범위 안에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부의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가계부채 증가 추이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퇴임을 앞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달 17일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로 가계부채를 꼽았고,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피치(Fitch)사의 데이비드 라일리 국가신용등급 국장은 작년 11월 국내의 한 경제 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가계부채가 한국경제 회복의 가장 큰 위험요소'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의 경우, 2007년 세계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가계부채 규모가 줄어드는 반면 한국의 가계부채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빚의 규모와 부채 절대액이 커도 너무 크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빚의 내용'이다. 전체 가계대출액 중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47%, 320조원)에 가깝다. 특히 도심과 지방, 지역과 지역간 편차가 크다는 것을 고려할 때 평균값이 가지는 의미는 크지 않다(서울 64%, 경기 75%, 부산 66%, 대구 63%, 인천 79%, 대전 58%, 광주 57%, 울산 67% 등 대부분의 광역시가 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 세계 금융대란의 촉발점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도래하던 시점에 미국 가계부채의 76%가 모기지론(주택대출)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만일 금리가 오르거나 주택 가격이 떨어지거나, 소득이 줄어드는 등 '경제 변수'가 악화되면, 말 그대로 대규모 가계부실 사태 및 신용 위기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가계부채 규모가 늘어난다면, 2003년 카드대란과 같은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정부의 주택소유 장려와 소비 과열로 인해 다수 국민이 빚더미에 올라 앉은 미국. 부동산 불패신화와 과도한 교육비 지출이라는 덫에 걸려 가계재정의 심각한 부실화가 진행중인 한국. 두 나라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주원인이며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자리잡고 있는 흉물스런 존재인 '가계부채'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미국 가정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만, 가정경제가 재정 위기에 닥칠 가능성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 10년간 미국 전체가구의 약 10%가 경제적인 이유로 도산했으며, 매년 150만 가구가 파산하고 있다. 2003년에만 부모가 파산을 선언한 아동의 수가 160만 명에 달하며, 현재의 추이가 지속된다면 2010년경에는 미국 아동 7명 중 한 명이 부모의 파산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와 있다.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던 가정 중 약 24만 가구가 의료비용이 이유가 되어 파산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개별 가정이 안고 있는 부채규모는 3배로 늘었다. 미국인 가정 평균소득의 약 40-50%의 돈이 모기지 채무를 상환하는데 쓰이고 있고, 모기지 채무금액은 해마다 신기록을 작성하며 증가하고 있다. 해마다 100만 이상의 가정들이 단지 교육비를 지불하기 위해 2차 모기지 대출을 받고 있으며, 5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방 정부기관의 학자금 대출을 받고 대학을 다니고 있다.

 

지난 30년간 신용카드 채무는 6000%가 넘는 증가세를 보였다. 파산 신청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0만 가정이 연 수입만큼의 신용카드 채무를 지고 있고, 그 중 90%가 신용카드 채무를 채 상환하지 못한 상태에서 파산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미국 사회의 전 영역이 부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자료에서, 미국의 소비자 부채가 총 1조 9천억 달러에 달하며, 이 중 약 14%가 채무불이행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과거 경기침체기 때 보였던 채무불이행률(default rate)이 5% 수준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기록적인 숫자다.

 

우리는 어떤가? 저축률(가처분소득 대비 저축비율)은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고 적자 가정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OECD 보고서에 의하면, 2010년도 우리나라의 예상저축률은 3.2%로 일본과 함께 비교 대상 17개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만일 현재 속도로 인구 고령화가 지속된다면, 저축률은 더 떨어질 것이다.

 

저축률 하락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차치하고라도, 가정에 비축한 자금이 없다는 것은 곧 부채 상환능력이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2008년 말을 기준으로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4배에 달했다. 은행 빚을 갚으려면 1년간 벌어들인 소득의 1.4배를 지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이 1.3배, 일본이 1.1배다. 지난 달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년도 9월말을 기준으로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사상 최고 수준인 68%를 기록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8년 말 시점을 기준으로, 은행 전산망에 신용불량자 꼬리표가 붙은 사람은 2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 외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워크아웃 상담을 받은 사람과 법원에 개인회생, 파산을 신청한 숫자까지 감안할 경우 실제 신용 위험상태에 빠진 사람은 5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활동인구수를 기준으로 볼 경우, 약 20%에 해당하는 수치다.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국민 5명 중 1명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해마다 10만이 넘는 가정이 비극적인 재정파탄을 맞고 있으며, 해마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빠른 시간 내에 가계부채 해결을 위한 범 국가 차원의 '대책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저 신용계층에 대한 각종 구제 및 지원사업은 매우 절실한 일이긴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만일 앞으로도 이런 식의 '사후 약방문'이 계속된다면 신용불량자는 끝없이 재생산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환원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가계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국민 계몽이 절실하다. 미 예일대 경제학 교수인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는 서브 프라임 위기가 발생하기 전 저소득자들이 주택을 구입할 때 포괄적인 양질의 재무상담을 받았다면, 소득에 비해 너무 많은 빚을 짊어진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결과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대규모 신용불량 사태와 금융회사의 도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재정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접근성 높은 재정 및 금융 정보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일체의 금융상품 중개를 배제시킨,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차원에서 고객들에게 포괄적인 재무상담을 해줄 수 있는 전문인력의 양성이 시급하다.

 

부동산과 교육비용이라는 암초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어둠의 바다를, 곡예를 하듯 항해하는 중산층과 서민들의 삶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신용불량자나 개인파산자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딱 그 숫자만큼의 가정이 심각한 재정적 위험에 노출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이혼 및 생계형 자살이 증가하고, 각종 범죄를 포함한 사회병리적 현상들이 출몰하게 된다. 빚으로 인해 생기는 어두운 그림자다. 지금 이 적색 경보를 알리는 다급한 신호음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마을까지 들려오고 있다.

 

과연 지금 이 땅의 중산층 가운데, 우리 집 주택비용과 자녀 교육비에 재량소득의 절반 이상을 강제로 떼어내야 하는 앙상한 재무구조 하에서 아빠의 갑작스러운 실직을 장시간 버틸 수 있는 가정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국가의 존재가치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그 첫 번째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제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처한 국민들을 국가가 나서서 보호하라. 그것은 당연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태그:#가계부채, #빚, #부채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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