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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에너지를 낭비 파괴하고 그만큼의 이산화탄소를 내놓는 국제무역이면서 생산자에게 주원료 값만 조금 더 주고 사다 가공해서 판다고 공정한 것은 아니다. 상대적 윤리성이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소비를 윤리적으로 미화하다 보면 마침내 시장과 자본주의도 미화하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 천규석의 <윤리적소비> 중 일부 발췌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뜻의 '공정'. 농사꾼 천규석 선생님은 최근 저서를 통해 심심찮게 들리는 '공정'이라는 이야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신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선생님의 <윤리적소비>를 읽어내려가며, 누군가 옆에서 호되게 혼을 내고 있단 생각을 이따금씩 했다.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잘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공정'이라는 이름을 '여행'이라는 몸에 입히려 하고 있다. 그만큼 충분한 준비도, 경험도 없이 덜컥 일을 벌여놓은 것을 누군가 내게 무책임하다고 말해도 지금으로선 크게 할 말이 없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벌어진 코끼리 쇼의 한 장면. 그림을 그리는 코끼를 연출하기 위해 많은 동물학대가 이루어진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 수많은 퍼포먼스를 위해 상처난 코끼리들을 많은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여행이 설레려면, 우리와 만나는 자연과 동물 역시도 설레야 한다고 그 때부터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벌어진 코끼리 쇼의 한 장면. 그림을 그리는 코끼를 연출하기 위해 많은 동물학대가 이루어진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 수많은 퍼포먼스를 위해 상처난 코끼리들을 많은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여행이 설레려면, 우리와 만나는 자연과 동물 역시도 설레야 한다고 그 때부터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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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필리핀에서 반년 가량 공정여행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국에 머물면서 생태관광에 대한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이 개념이 확실한 대안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여행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는 것, 그 여행을 바로잡아 보고 싶다는 것, 그리고 그 여행에서 배운 것을 우리 사는 삶에 적절하게 연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고민들을 20대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 안에 어느샌가 사라진 자신감을 회복하고 싶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는 그런 자신감을.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참가자들을 만나봤던 정법모(필리핀국립대학 문화인류학 박사 과정)씨가 밝힌 첫 느낌은 아직까지 내 뇌리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참가자들이)필리핀이나, 공정여행이라는 취지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요즘 흔히 말하는 스펙이나, 새로운 경험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또한 훌륭한 분들이 공정여행에 대해 고민한 만큼 역량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젊은,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라는 거대한 제목에 대한 정체성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에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2010년 1월 1일 새벽 0시, 나와 함께 여행 예산안을 수정하느라 폭죽터트리는 구경도 하지 못한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 답사한답시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아들뻘 되는 나를 질질 끌고 2천미터를 훌쩍 넘는 산을 밤낮없이 오르내린 '바타드' 사람들 그리고 풋내나는 뜨내기 때문에 몸과 마음 고생을 더한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직원들까지. 그들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때론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있기도 했다.

필리핀 세계문화유산인 계단식 논을 복원하고 있는 이인재 학생.
 필리핀 세계문화유산인 계단식 논을 복원하고 있는 이인재 학생.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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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즈음, 참가자들의 신청서가 속속들이 메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권유로, 회사의 우수사원으로 뽑혀서, 예전에 접했던 필리핀이 그리워서, 단순한 여행보다는 많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등 다양한 사연과 기대가 담긴 신청서와 함께 어느 덧 12명의 참가자들은 2010년 1월 12일 밤, 필리핀 땅을 밟게 된다.

미래의 훌륭한 건축가가 되고 싶은 이인재(경희대 건축공학, 24) 학생은 필리핀의 첫 느낌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제까지 나에게 있어서 필리핀은 싸고, 지저분하고, 섹스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였어요. 그런데, 필리핀에 도착한 뒤 본 도시의 모습은 한 마디로 아름다웠어요. 가로등과 야자수가 교차하고, 그 속에 흘러나오는 필리핀 음악과 바다의 모습들. 제가 가진 편견이 한 번에 깨져버렸죠."

여전히 오해의 소지가 많은 첫 느낌이었지만, 직접 보는 것만으로 동남아에 드리운 보통 한국 사람의 편견이 일정부분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 고마운 분들이군요."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의 빈민지역인 '바세코'와 '바공 실랑안'에 살고 있는 대학생 조나와 빌리는 12명의 참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내게 나즈막하게 위와 같이 속삭였다.

조나가 사는 필리핀의 빈민지역 '바세코'의 모습
 조나가 사는 필리핀의 빈민지역 '바세코'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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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여행에는 항상 가는 이만 설레는 게 문제다'는 인식 아래, '우리를 맞이하는 현지 사람들도 우리에 버금가는 설렘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는 이번 공정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문제의식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여행이라는 단어로 묶인 모든 이들이 설레는 그런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여행의 수익금을 이용해 생활 사정상 여행의 기회를 누릴 수 없는 빈민지역 대학생들에게 그 기회를 주면서, 여행을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참가한 조나와 빌리가 참가자들을 바라보는 눈에서 부러움과 고마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마운 분들이 아니고, 친구들이지."

우리는 서로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14명의 참가자들.
 14명의 참가자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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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원칙을 떠들고, 정의를 내려고 끝이 없을 것 같던 공정여행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이 공간을 만나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뿜어내는 14명의 젊은이들은 동이 틀 무렵까지, 서로의 만남을 축복하며 잠자리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행의 시작만으로 수많은 희망을 꿈꾸는 나 역시 길고도 짧은 밤을 보내고 있었다.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는
NGO 아시안브릿지 필리핀은 2010년 1월 12일 ~ 1월 18일까지 필리핀 루손섬 북부 이푸가오 지역에서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선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위의 기사는 당시 있었던 여행의 내용으로 쓰인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BS 유포터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정여행,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필리핀,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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