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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농촌 어르신들도 식사 후 커피를 드시는 분이 꽤 있다. 시골서 나고 자란 내 기억을 되돌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커피는 구경도 못하고 따뜻한 숭늉 마시는 게 전부였던 1970년대 농촌을 생각해보면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가서 처음 마셨다는 커피가 농촌 사회 곳곳까지 퍼져나가는 데 참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생각된다.

 

<그래도 희망의 역사>는 처음에 커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통해 본 역사 이야기.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던 바흐는 제후나 성직자가 아닌 근대적 시민층 가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세속적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러한 변화는 성직자, 귀족이 주도권을 잡았던 중세 사회에서 세속적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바뀌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커피 칸타타'가 작곡되어 연주된 시기가 1730년대 무렵이다. 무대는 유럽 라이프치히 이고. 이 곡은 커피를 계속 마시려는 딸과 마시지 못하게 막는 아버지의 갈등을 담고 있다. 커피를 끊지 않으면 외출도 다른 사람 결혼식장도 못 나가게 하고 멋들어진 옷도 안 사주고 결혼도 안 시키겠다는 아버지의 위협에 결국 딸은 커피를 끊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딸은 몰래 동네로 나가 소문을 낸다. 자신과 결혼할 남자는 마음껏 커피를 마셔도 좋다는 둘만의 서약을 해야 한다고. 이러한 반전을 거쳐 마지막 합창으로 곡은 마무리된다.

 

고양이가 쥐잡기를 그만둘까

처녀들은 커피 주위에 모이고

어머니도 커피를 즐기고

할머니조차 커피를 마셔왔으니

누가 딸을 나무랄 수 있으랴!

(책 속에서)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커피가 널리 확산되어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시대의 추세라는 사실, 이러한 추세가 이어지면 머지않아 커피가 누구나 즐기는 일상 음료가 될 거라는 전망을 '커피 칸타타'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커피는 어떤 과정을 통해 전파되어 왔을까.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이 처음 마신 후 황실이나 관료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일제 지배시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들은 일부러 다방을 가야 마실 수 있었던 음료. 이제는 누구나 동전 몇 닢으로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고, 식후 커피를 찾는 농촌 어르신들도 꽤 있다. 부와 권력의 중심에서 시작해서 일반인에게 보급되는 과정은 유럽과 다르지 않다.

 

미래로 열린 창턱의 높이

 

우리는 누구나 과거를 거쳐 현실의 발을 딛고 미래를 준비하며 살고 있다. 힘든 과거보다는 나은 현실을, 현실보다 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꿈처럼 일이 술술 풀려가진 않는다. 더 나은 미래의 전망은 안 보이고 더 힘든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상황에 사람들은 좌절하기도 한다.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좌절을 딛고 옹골차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을까.

 

미래로 열린 창은 턱이 약간 높아서 과거라는 디딤돌을 놓고 올라서야 비로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런 작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려운 주제를 책으로 쓸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 책이 역사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고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데 모래알 같은 힘이라도 보탠다면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미래로 열린 창턱은 보는 사람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간 높은 높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장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더 나은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창턱이 까마득한 장벽처럼 느껴진다면 <그래도 희망의 역사>를 읽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풍부하고 통찰력 있는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문득 창턱의 높이가 낮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정 계층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커피가 창턱을 넘어 모든 계층 사람들의 음료로 바뀌어간 것처럼. 서슬 퍼런 마녀사냥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사회를 향해 가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차별의 창턱은 결코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라고 고개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장수한/동녘/2009.12/13,800원


그래도, 희망의 역사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역사 읽기

장수한 지음, 동녘(2009)


태그:#희망,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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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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