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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엊그제(22일) 오후 서울에 갔다가 어제 오전에 바삐 내려왔다. 올해 첫 서울 나들이다. 적이 어려운 걸음이면서도 뜻 깊은 일이었다. 큰일을 치르기라도 한 듯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듬직하다.

 

오마이뉴스 상근 기자에게서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 행사 참석 여부를 묻는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선뜻 참석하겠다고 대답했다. 참석을 쉽게 결정하고 즉시 대답한 경우는 적어도 올해 들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옆에서 듣는 아내가 놀랄 정도였다.

 

"7만 여 명 시민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허지는 뭇헐 거 아녀. 선별을 헤서 전화를 헐 텐디, 나헌티두 직접 전화를 헸다는 거, 얼마나 고마운 일이여? 또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는 수천 명 시민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헌다면 전화 요금도 많이 나고 수고가 클 텐디, 참석허겠다고 헤야 보람이 날 거 아녀."

 

아내는 내 말에 선뜻 동의했다. 오마이뉴스에 글 하나 쓴 적도 없고 시민기자로 등록도 하지 않았지만, 오마이뉴스 애독자인 데다가 나와 함께 매월 1만원씩 내는 '10만인 클럽' 회원이기도 한 아내는 기쁜 기색이었다.

 

아내는 나 대신 곧바로 서울에 있는 대학생 아들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결아, 너 22일 오전에 잠깐 집에 내려올 수 없니? 그 날 아빠가 서울에 가실 일이 있는데, 네가 내려와서 아빠 대신 할머니 계신 요양병원을 가주었으면 좋겠다. 22일 저녁하고 다음날 아침, 두 번만 가면 될 것 같다. 아빠가 차를 놓고 버스로 가실 테니까…."

 

방학중임에도 전공학과 오리엔테이션이다, MT다, 신입생 환영 행사 등등으로 서울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아들녀석은 잠깐 일정을 살펴보고 나서 전화해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아들녀석은 22일 오전에 내려왔다가 23일 오후에 돌아가면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늦게 결혼하여 이제 대학생인 아이들을 두고 있는 내 처지가 얼마나 복되고 다행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연초에 아들녀석으로 하여금 운전 면허를 따게 한 다음 올해 겨울방학 때 녀석이 집에 내려올 때마다 집중적으로 운전 연습을 시킨 것에서 100% 보람을 얻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방학 동안 며칠 간격으로 서울과 태안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녀석이 집에 와 있는 동안에는 매일 세 번씩 노친이 계신 요양병원에 아들녀석을 데리고 가곤 했다. 집에서 7분 거리인 요양병원을 오가며 아들녀석에게 운전을 시켰다. 녀석은 운전 실력이 금세 늘었다.

 

2002년이던가, 아내와 함께 가운데 제수씨도 내가 비용을 대주어 운전면허를 따게 했다. 제수씨에게 비용까지 대주어 운전면허를 따게 한 것은 고지식한 동생이 자기 처의 운전 교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운동신경이 둔하고 겁이 많은 아내는 아직도 '장롱면허'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제법 운전 실력을 갖추게 된 제수씨는 2005년 세상을 뜨고 말아서, 나는 아무 보람도 얻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또 지난해 연초에 두 아이를 운전학원에 보내 면허를 따게 했는데, 딸아이는 제 엄마처럼 운전대 잡는 일에 겁을 먹고 연습을 하려고 들지 않는다. 반면 아들녀석은 적극적으로 연습을 해서, 이제는 내가 걱정 없이 차 열쇠를 맡길 정도가 되었다. 아침잠이 많은 아들녀석을 깨워 매일 7시쯤 요양병원을 갈 때는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그것이 결국은 보람을 만든 셈이다.

 

한 번은 아들녀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는 옛날 운전 연습을 할 때 차도 없어서 남의 차를 어렵게 빌려 가지고 새벽에 혼자 연습을 했다. 스스로 하나하나 운전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그런데 넌 이렇게 아빠가 옆에 앉아서 세밀하게 지도를 해주니 얼마나 복 받은 처지냐."

 

그 말에 아들녀석은 동의하며, 보답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오늘 착실하게 보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빠 대신 엄마의 학교 출퇴근도 도와주고, 누나를 태우고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도 가고 하니 말이다.

 

하여간 아들녀석 덕분에 나는 마음놓고 22일 오후 서울을 갈 수 있었다. 점심때쯤 집에 내려온 아들녀석은 아빠를 대신하여 누나와 함께 22일 저녁, 또 23일 아침과 점심때 요양병원을 가서 알뜰하게 할머니를 보살핀 다음 오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2>

 

오마이뉴스의 창간 10주년 행사는 좀 특이했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비즈니스 타워 18층 전체 사무실을 공개하는 행사를 겸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부 시설에서 갖는 기념식 위주 행사가 아니고 하루 종일 오마이뉴스 본사 일터를 보여주면서 여는 긴 행사였다.

 

아내는 오마이뉴스 본사 일터에서 갖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어떻게 빈손으로 갈 수 있느냐고 했다. 화환이나 화분 같은 것은 유명한 사람들 몫이고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터이니 소박한 선물을 하나 들고 가라고 했다. 그러며 아내는 김과 감태를 사 오는 단골가게에 전화를 했다. 감태 열 뭇을 구워달라는 주문이었다.

 

감태는 태안 바다에서 생산된 일종의 특산물이다. 김의 검은 색과는 달리 초록색인 감태는 김보다 훨씬 비싸다. 김과 함께 밥을 싸서 먹는 맛이 특별하다. 나는 22일 아침 요양병원을 갖다가 돌아오는 길에 단골가게에 들러 구워놓은 감태 열 뭇을 찾았다. 그 감태 가방을 들고 오후에 서울을 갔다.

그러나 합정동에 있는 아이들이 자취하는 집에다 감태를 놓고 맨손으로 오마이뉴스 본사를 갔다. 22일은 하루 종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이 복잡하고 분주할 것 같았다. 오는 손님도 많고 이런저런 일로 분주할 오연호 대표에게 작은 선물 하나 들고 가서 잠깐이라도 '설명'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번거로운 일일 터였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상암동 오마이뉴스 본사를 다시 들러 그 선물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고, 또 실행을 했다. 다음날 아침 8시 오마이뉴스 일터에 다시 가서 오연호 대표기자실 탁자 위에 감태 가방을 놓고, 메모를 해놓고, 일찍 출근한 수습 기자들에게 감태가 뭔지 설명을 한 다음 태안으로 올 수 있었다. 덕분에 오마이뉴스 본사를 연 이틀 두 번이나 가서, 70여 명 상근 직원들이 일하는 거창한 규모의 일터를 세밀히 구경한 셈이었다.     

 

비록 몇 만원에 지나지 않는 작고 소박한 선물이지만, 그것은 오마이뉴스에 대한 우리 부부의 애정의 표현이었다.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을 경축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오롯이 담긴 것이었다.

 

 <3>

 

오후 4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4시간 정도 그곳에 머물렀다. 누리꿈스퀘어 비즈니스 타워 지하 1층 맥주집에서 가진 만찬회 자리에서는 뜻밖에도 사회를 보는 김영균 상근 기자의 소개로 시민기자들을 대표하여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어서 얼떨결에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인사말을 해야 했다. 어느새 60줄에 들어선 신세지만, 강단 좋은 목소리로 자못 우렁차게 말할 수 있는 기개와 능력(?)에 스스로 위안 받으면서….

 

(맥주집에서 엉뚱하게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하는 내 요청을 무시하지 않고 밖에서 막걸리를 구입해 와서 제공해준 맥주집의 여주인께 감사한다.)

 

만찬회장의 인사말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 중에서 고참 급에 속한다. 2001년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얼추 10년 세월이다. 오마이뉴스 한 돌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유지해오는 동안 오늘 현재 807편의 글을 올리고 있다. 2003년에는 '오마이뉴스 2월22일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가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면이 있다. 동갑내기 소설가 이문열씨처럼 나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으로 등단한 사람이다. 이문열씨가 '태양'이라면 나는 '반딧불'에 불과한 작가지만, 그래도 반딧불이의 생명력과 소박하고 동화적인 미덕들을 올곧게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 글을 쓰고 또 행동한다.

 

동아일보 출신 작가지만, 나는 30년 동안 구독해오던 동아일보를 지난 2001년 끊었다. 이른바 메이저 언론이라는 신문들의 지면에 글을 쓰는 배웠다는 먹물들의 정론을 가장한 곡필, 곡학아세, 사악함과 모순 따위들을 식별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 컸기 때문이었다.

 

자질과 능력 부족으로 출중한 작품도 쓰지 못하고 소설가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진실과 정직, 양심과 상식, 그리고 하느님 신앙 안에서 오마이뉴스에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인터넷 글에 열중하지 않았더라면 소설 쓰기에 주력했을지도 모르지만, 700편이 넘는 글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을 오마이뉴스 덕분으로 생각한다.

 

세상사에 대해 호흡 곤란을 느끼기도 하는 체질을 지니고, 난감한 현상들을 무시로 느끼고 겪으며 살아야 하는 세월 속에서 오마이뉴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를 위안하며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이고, 더 심한 상황이다. 

 

오마이뉴스에 열심히 글을 쓰는 나를 보고 '진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진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 자격도 없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 따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좌와 우로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에, 또는 좌나 우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과 정도, 양심과 상식을 쫓아 사는 삶이다. 그것을 따라 글을 쓰고 작은 행동들을 할 따름이다.

 

연세 연만하신 이승철 선생과 술잔을 나누면서 한 말이 있다. "나는 어떤 논리나 지식으로보다는 내 삶을 고백하고 소개하는 글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내 삶 자체로 내가 추구하는 정의와 양심과 상식의 세계를 구현해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만찬회장에서 나 다음에 인사말을 하신 전 KBS 사장 정연주 선생은 "열린 언론 오마이뉴스의 막내 시민기자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열린 언론을 통해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미력하나마 온 힘을 보태겠다"는 말로 큰 박수를 받았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가운데서, 또 어려운 현실을 인지하는 데서 오는 고민 가운데서도 희망과 의기를 가득 술잔에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돌아오면서 한가지 생각을 했다. 현재 오마이뉴스 '10만인 클럽'에는 우리 부부만 참여하고 있지만, 내 대학생 아이들부터 새로 참여시킨 다음 동생들 모두도 참여시키기로…. 그 계획을 나는 지금 실행에 옮기고 있다. 희망을 안고, 전진하는 마음으로…!


태그:#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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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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