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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지난 2000년 2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시민참여저널리즘의 새 장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매년 시민들과 함께 한 참여민주주의의 현장 속에서 의미있는 뉴스의 인물들을 찾아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해왔습니다. 그들의 면면이 바로 <오마이뉴스>가 만들어낸 지난 10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에, [창간 10돌 기념] '올해의 인물, 그 후'를 조망하는 연속 기획기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삭발과 단식, 총장실 점거 그리고 승리로 기억되는 서울 덕성여대 분규가 있은 지 10년이 지났다. 지난 2001년 이 학교 학내 분규를 이끌었던 당시 총학생회장 김나영(97학번·정치학)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짧지 않은 10년이란 세월은 덕성여대와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삭발할까, 혈서 쓸까 고민하다 둘 다 했어요

2001년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의 모습. 현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 김나영씨 2001년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의 모습. 현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 권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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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대 학내분규는 김씨가 입학하기도 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부터 박원국 전 이사장의 족벌체제로 인한 재단 전횡은 심각했다. 결국 1997년 한상권 교수가 재단의 일방적 평가로 재임용에 탈락하면서 학생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65일간의 수업거부, 260일간의 총장실 점거 등으로 박 전 이사장은 교육부로부터 해임됐다.

하지만 2001년 박 전 이사장은 학교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내비쳤다. 이에 맞서 김씨를 비롯해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자신들의 예쁜 머리카락을 잘라야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예전 박원국 이사가 있을 당시 학교에선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었고, 교육 받고, 교육할 권리를 내세울 수도 없었어요. 그때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어요"

김씨는 지난 2001년 상황들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한 듯했다. 지난 2001년 2월 15일. 이날은 눈이 왔다. 학교에서 새내기 새로배움터 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박 전 이사가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씨를 포함해 50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 앞에서 박 전 이사의 차를 둘러싸고 막아섰다. 교직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우산으로 학생들을 때리는 등 물리적 충돌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박 전 이사는 학교 행정동 건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다시 건물 출입구를 막았고 일부 학생들은 차량 위로 올라가 눕기도 했다. 

총장실 점거도 쉽지 않았다. 학교 쪽에서 동원한 용역과 학생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해 3월 개강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이같은 내용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총학생회는 학생들에게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수업거부 등 강력한 투쟁을 이끌기 위해 삭발을 결심했다. 여학생들이 삭발을 결실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일부 총학생회 간부 사이에선 삭발 대신 혈서를 쓰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김씨가 웃으며 말했다. 결국 이들은 삭발과 혈서를 함께 진행했다. 비민주적 재단으로부터 학교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힘겨운 투쟁보다 더 힘들었던 건 투쟁이 끝난 후"

2001 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덕성여대 총학생회·교수협의회에 전달된 상패액자.
 2001 오마이뉴스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덕성여대 총학생회·교수협의회에 전달된 상패액자.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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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단식도 했다. 단식 19일째. 교육부는 이사진 중 4명을 관선이사(교육부가 선정하는 이사)로 바꾸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7명 모두가 관선이사가 되길 바랐기 때문에 교육부의 결정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밤새 고민했다"며 당시의 고민을 털어놨다. 이사진 3명이 기존의 재단 이사로 유지된다면 학교는 여전히 불안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당시 '미완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이 오랫동안 강한 권력을 가져왔던 사학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보기 드문 승리로 아직까지 '큰 승리'로 기억된다. 

이후의 문제는 총장선거였다. 비로소 제대로 된 총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기대뿐이었다. 오히려 총장 후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김씨는 털어놨다.

학생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 온 교수협의회의 교수들 가운데서도 총장선거에 나가는 교수와 그렇지 않은 교수 간에 갈등이 있었다. 김나영씨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갈등의 핵심은 '누가 총장 선거에 나갈 것인가'였다. 이를 두고 총동창회, 민주동문회, 교수협의회, 학생들이 이견으로 서로 크게 부딪혔다.

"투쟁 중엔 공동의 적이 있는 거잖아요. 그땐 다 같이 싸워요. 그런데 투쟁이 끝나고 나면 권력관계가 재편돼요. 그때 누가 어떤 자리를 맡고, 어떻게 자리를 재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입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권력싸움이) 굉장히 치열해지는 거죠. 그래서 싸울 때보다 싸움이 끝나고 싸움을 정리하는 과정이 훨씬 더 힘들어요."

총장 선거가 끝난 후에도 김씨의 마음고생은 계속 됐다. 2001 투쟁 당시 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교수가 총장이 되면서 김씨는 "외부 사람이 하는 것보다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총장 자리에 오르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총장을 비판하는 글을 학내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지만, 그는 김씨를 '회유'하려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김씨의 말이다.

"그분 입장에선 계속 원칙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우선 학교의 여러 세력을 화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 그때 원칙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은 구 재단이었던 사람들과 투쟁에 반대한 사람들을 모으거나 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일에 더 초점을 두셨던 것 같아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 "후배들 자랑스럽게 투쟁하길"

2010년 현재에도 덕성여대 총학생회는 학교를 '학생의 것'으로 지켜내기 위한 선배들의 노력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현 덕성여대 총학생회장 남영아(07학번 문화인류학)씨 역시 작년 4월 삭발을 했다.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된 대학 등록금 문제 해결을 정부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덕성여대가 학내 문제인 박원국 구 재단의 압력으로부터는 벗어난 것일까? 남영아씨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10년 전에 비하면 학내 민주화와 학생들의 교육환경이 상당히 개선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재단의 학교 진입 시도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지금 덕성여대는 관선이사체제라 정기적으로 이사가 바뀌고 있어요. 이 체제가 학교운영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의견 때문에 이제 정식 이사체제로의 전환이 논의되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아마 구 재단 문제가 다시 크게 불거질 것 같아요. 여전히 구재단과 결탁된 세력들이 총동창회나 학내에 많이 있거든요. 그런 쪽의 움직임이 서서히 드러나지 않을까, 저희는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덕성여대 총학생회실에서의 남영아 총학생회장과 학생회 집행부원의 모습.
▲ 총학생회실 덕성여대 총학생회실에서의 남영아 총학생회장과 학생회 집행부원의 모습.
ⓒ 권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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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씨는 "선배들의 힘겨웠던 투쟁의 노력을 다시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면서 "우리도 지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구 재단의 복귀를 막아내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다.

김씨는 덕성여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 갈등에 대해 걱정스러운 마음을 비쳤다. 그는 구재단의 학교 복귀 시도에 대해 "치료를 했지만 남아있는 바이러스"라며, 사학재단의 '끈질김'으로 인해 97년, 2001년 투쟁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일을 염려했다.

"후배들이 또다시 우리 때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당시 투쟁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함께 '부채감'을 가지고 있어요...후배들이 덕성여대의 투쟁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문제에 대항해 잘 싸워나가길 빕니다."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아니 '더' 슬퍼졌다

2001년의 기억은 김씨 삶을 뒤흔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치지 않고 요구해서 승리했다. 투쟁 이후의 일들로 인해 마음의 시련을 혹독히 겪기도 했다. 투쟁이 끝난 후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릴 정도로 그 해의 후유증은 컸다. 하지만 당시의 경험이 '교육'에 대한 그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지금 김씨는 문화연대 문화정책팀장으로 우리사회의 교육 변화를 위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원래도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그런 문제를 겪으면서 책으로는 알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교육 문제에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됐어요."

그는 이제 문화연대 활동을 그만두고 현장에서 사람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할 계획이라 한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민중의 집'의 사무국에서 활동하면서 지역공동체 안의 교육문제를 직접 접하고 관련한 일을 하고자 한다.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교육에 대한 고민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김나영씨는 요즘 대학생들의 현실이 10년 전에 비해 더욱 어려워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또 해결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대학의 재정구조와 점점 더 제 기능을 잃고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해가는 대학을 비판했다.

"사회 현실 자체가 학생들이 못 나서게 만드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대학생의 위치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대학생은 어쨌든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대학생들은 최소한의 양심, 책임감이 있었어요. 요즘엔 그런 것들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고, 오히려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주체들이 된 거죠.

당장에 등록금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고, 대출을 받는다 해도 평생 빚쟁이가 되는 거잖아요. 요즘은 취업이 너무 불안정하니까 학교에서 투쟁을 했을 때, 하고 나서 벌어질 개인적인 문제가 너무 크게 다가오는 거예요. 우리 때는 빚이라도 없었는데, 지금은 빚까지 안고 그런 걸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진 것 같아요."

덕성여대 총학생회는 6월에 있는 지방선거에서 대학생들의 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계획 중이다.
▲ 덕성여대 덕성여대 총학생회는 6월에 있는 지방선거에서 대학생들의 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계획 중이다.
ⓒ 권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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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신의 미래가 저당 잡힌다'는 생각에 대한 대학생들의 공감"이라고 말한다.

"'이때만 지나가면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결국 내가 잘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등록금 문제, 대학 내 문제, 청년실업 등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육 주체가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더욱 더 확고해졌다. 2001년의 기억, 그리고 덕성여대는 이런 김씨의 생각을 만들어냈고, 여전히 그 열정은 뜨겁다. 그렇기에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의 좌우명은 김씨가 깊이 품고 사는 자신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현재의 대학생들에게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을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덧붙이는 글 | 권지은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덕성여대, #김나영, #학내민주화, #대학생, #등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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