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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군함도' 하시마. 지금은 36년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의 섬이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군함도' 하시마. 지금은 36년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의 섬이 되었다.
ⓒ 시바타 토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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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반도에서 서쪽으로 약 4.5km, 미쯔비시 석탄 광업 주식회사의 주력탄광이었던 다카시마에서 서남 방면으로 약 2.5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총면적 0.1km², 주변 둘레 1.2km, 동서 160m, 남북 480m의 작은 섬 하시마(端島).

큰 야구장 두 개를 합친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섬은 예로부터 무인도였다. 성난 파도만이 매섭게 밀고 들어오던 이 외로운 섬에 10m 내외의 암벽이 둘러지고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둘 세워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810년 석탄이 발견되고, 메이지 유신 이후 미쯔비시의 본격적인 개발과 탄광사업이 개시되면서부터다.

무인도 하시마는 어떻게 군함도가 됐나

『원폭과 조선인』2,4집에 실린 하시마 지도. 1974년 폐광 시점에 남겨진 건물에는 조선인 강제노동과 학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조선인 숙소를 표시하고 있다.
 『원폭과 조선인』2,4집에 실린 하시마 지도. 1974년 폐광 시점에 남겨진 건물에는 조선인 강제노동과 학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조선인 숙소를 표시하고 있다.
ⓒ 나가사키재일조선인의인권을지키는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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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는 시퍼런 바다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회색빛 섬의 모습이 1944년 완성된 '제국 해군 전함' 도사(土佐 )와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軍艦島)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 하시마라는 이름은 잊혀지고 어느새 군함도라는 이름이 더 사랑받게 된 지 오래다. 군함도라는 제목의 사진집, 동화책, 전시회, 관광 안내지가 제작되어 왔고 이 섬을 소재로 한 지역 방송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된 바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 한수산씨의 나가사키 강제동원 조선인들의 노예노동과 학대, 원폭 피폭의 파란만장한 민족수난사를 담아낸 장편소설 <까마귀>(전5권, 해냄출판사, 2003)가 <군함도>(상하권, 작품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어 일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지난 2월 20, 22일 한수산씨의 강연회가 후쿠오카와 나가사키에서 열려 시민과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본명은 하시마, 그러나 군함도로 알려진 이 섬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누군가는 이 섬을 번영의 시절, 가족이 함께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며 미래를 꿈꾸던 노스텔지어의 섬으로 기억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이 섬은 '감옥섬'이나 '지옥섬'으로 불리웠다.

한때 일본의 근대화와 번영을 떠받쳤던 탄광산업은 1955년을 절정으로 번성기를 지난 뒤, 점차 불황에 시달리게 된다. 석탄에서 석유로 시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전국의 탄광이 하나 둘 폐광하기 시작하였고 이 폐광의 파도는 하시마에도 밀어닥쳐 1974년 1월 하시마도 그 역사의 막을 닫게 된다. 미쯔비시 석탄 광업 주식회사가 운영하던 하시마  탄광 폐쇄에 이어, 86년 동회사 경영의 다카시마도 폐광을 맞이한다.

처음부터 하시마는 무인도였고, 석탄만을 위한 섬이었기 때문에 폐광과 함께 하시마에서 삶의 기반을 잃은, 삶의 이유를 잃은 사람들은 모두 섬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섬 자체가 미쯔비시의 사유지였기에 미쯔비시가 무인도화를 결정한 배경이 있었다.

하시마에 이어 다카시마에서도 미쯔비시가 철수하기로 한 1986년경, 나가사키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시민단체에 의해 발굴, 공개되었다. 1925년부터 45년에 이르기까지 하시마에서 사망한 일본인과 외국인(조선인, 중국인)의 사망진단서 및 화장 인허가증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하시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인근 섬 나카노시마에서 화장해 하시마의 신사에 보관하였는데, 이 시기 총 21년 동안 하시마에서 죽은 이들의 수는 1295명이었다. 이중 조선인 122명(남 110, 여12), 중국인 포로 15(남)명이 있었다.

조선인의 사망 원인을 규명한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 따르면 일본인 사망자와 비교할 때 조선인의 경우 압사, 질식사, 폭상사, 변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체 집계 시기 중 조선인의 사망은 1943~45년에 급증했고, 이는 파란의 전국(戰局) 속에서 석탄 증산계획이 가혹하게 추진됨에 따라 위험한 노동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우선적으로 사용되고 버려졌다는 진실이 숨어 있다.

특히 사망 원인 중 외상 15명, 두부 타박상 1명, 추락 1명, 두개골절 및 뇌좌상 3명, 변사 1명 등 21명의 죽음은 일본인 노동자나 감독자들에 의한 사형(私刑), 린치, 학대, 폭행이 원인이라고 추정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부터 "개, 고양이, 돼지, 짱콜라(중국인), 조센징"이라고 불려졌다는 것이 수많은 자료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바 있다.

북규슈의 악명높은 치쿠호 탄광지대에서 구타와 학대로 죽었던 조선인 노무자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과 기록을 살펴보면 의사는 최종적으로 심장마비로 진단했으나, 실제를 들여다보면 린치와 구타가 사인임을 알 수 있는 사례도 있다. 이에 비추어 하시마 조선인 노무자들의 사망진단 항목과 하시마의 당시 노동조건과 구조를 추측해 보건대, '외상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폭력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이 인권을 지키는 모임 측의 주장이다.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 나가는 출구는?

하시마에 노동자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890년 미쯔비시가 하시마를 10만 엔에 인수하여, 1895년 심층부 개발에 착수, 채탄사업이 확대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후 무인도에 지나지 않았던 이 섬은 점차 바다를 매립해 면적을 확대하여 약 2.8배로 확대하고 향후 80년간 일본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유의 사회를 구축했다. 전체 거주 인구도 메이지 연간에 이미 2700~28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최전성기였던 1945년에는 섬 전체 인구는 약 5300명에 이르렀는데 탄광노무자는 1943년을 기준으로 일본인 2252명, 조선인 500명, 중국인 240명이었다. 조선인이 가장 많았을 때는 아마 노무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동반해 살고 있던 사람의 경우까지 추정하면 총인구 700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망자 명부에서 발견된 이들 중에는 위안시설의 조선 여성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진단서에는 '리졸 음독'이라고 쓰여 있는데 소독약으로 쓰이는 크레솔 비눗물을 마시고 바다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이름은 노치선, 황해도 신천 출신, 당시 나이 19세, 사망연월일은 1937년 6월 27일 오전 3시 20분이었다. 한수산 씨의 소설 <까마귀>에도 이 여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 추정되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대관절 무슨 사연으로 리졸을 마시고 몸을 던졌던 것일까.  

하시마는 그 비좁은 땅덩어리에 없는 것 없이 다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관청과 신사, 영화관, 수영장, 병원, 미용실, 파칭코, 상점와 고층 아파트 등. 그러나 전시(戰時) 영화관에서는 전쟁홍보영화만을 상영했고, 천황의 자녀들과 미쯔비시 탄광의 노동력만을 열심히 키워냈다. 또 이 섬은 사람을 위한 섬이 아니라 탄광을 위한 섬, 천황의 나라 파시즘 일본을 떠받치는 피라미드 구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섬은 가장 큰 부지는 탄광 시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 주거는 당초 목조 3~4층 건물 오두막이었으나 점차 철근 콘크리트 중고층 주택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3~4층이던 것이 7층으로 중축, 그 위에 다시 9층으로 증축이 이어졌다. 하시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9층 콘크리트 아파트의 하층부는 환기도 되지 않고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태풍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 섬을 덮치면 아래부터 물에 잠기니 사람이 살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의 상층부와 섬의 중앙 고지대는 햇볕도 잘 들고 조망도 좋아서 살기 좋았다. 따라서 높은 곳에는 직원층, 낮은 곳에는 광원들, 최하층에는 하청노동자나 조선인 노무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섬으로 통하는 입구도 단 하나뿐이었다. 외부에서 배를 통하여 단 하나뿐인 터널을 통해 섬으로 일단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이 섬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사면을 둘러보면 온통 시퍼런 악마의 웃음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고향은 어디쯤에 있을까 아득하기만 하고, 날마다 해저 900m까지 내려가 어둠과 공포 속에서 2교대 12시간 노동(이동시간 포함 14시간)을 했던 이들에게 이 섬은 감옥이며 지옥이었던 게 당연하다.

1928년 생 서정우는 지옥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하시마 탄광에 강제연행된 이후 미쯔비시 조선소로 옮겨져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경남 의령 출신의 고 서정우 씨의 생애와 증언, 하시마의 진실을 전하고 있는 전시물.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2층.
 하시마 탄광에 강제연행된 이후 미쯔비시 조선소로 옮겨져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경남 의령 출신의 고 서정우 씨의 생애와 증언, 하시마의 진실을 전하고 있는 전시물.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2층.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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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 밑이 탄광입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땅속 깊숙히 내려가 갱에 들어가면 굴착장에서는 몸을 엎드려서 작업을 하는 수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을 만큼 좁고, 덥고, 고달프고, 늘 잠도 못 자는 데다, 가스도 차고, 거기에 낙반 위험까지... 이대로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낙반 때문에 한 달에 4~5명은 죽어 갔을 겁니다." (<원폭과 조선인> 제2집, 서정우씨의 증언에서)

1928년 경남 의령군 의령면 소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서정우씨(2001년 타계)는 만 열 네 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2년생이었을 나이에 면 사무소에서 빨간 징용장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님은 나고야에 돈을 벌러 가시고 할아버지의 동생과 함께 밭일을 하며 살아가던 열 네 살의 소년은 트럭에 실려 시청으로,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시모노세키에서 재차 야간열차로 나가사키에 질질 끌려갔다.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거기 모인 조선인이 대략 300명이었고 전원이 나가사키 오하토 항에서 배로 하시마에 연행되었다. 1943년 4월경의 일이다.

고 서정우씨는 하시마 탄광에서 충분한 잠도 잘 수 없고, 형편없는 배급식과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동료 중에는 자살자나 헤엄쳐서 도망치려다 죽은 이들도 40~50명은 되었다고 한다. 서정우씨가 하시마를 빠져나온 계기는 미쯔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로의 이동 명령 때문이었다. 육지로 들어오면 도망갈 기회가 있으려니 기대했으나, 날마다 출퇴근 길에 감시가 치밀하게 따라 붙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1945년 8월 9일, 미군에 의한 원자폭탄 투하까지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도 서정우씨는 교대 근무로 당일 출근날이었다. 조선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원폭투하를 당하였으므로 비교적 폭심지로부터 거리도 떨어져 있고 조선소 내부여서 피해가 덜했다고 하는데, 숙소가 있던 사이와이마치에 있었던 나머지 동료들은 대다수가 죽거나 큰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씨의 삶이 전쟁의 종료와 함께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핵과 폐병을 앓으며 평생을 입퇴원과 통원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믿었던 일본인에게 사기도 당하고, 일본사회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서씨에게 가장 한맺힌 것은 하시마에서의 감옥 같은 삶도, 미쯔비시 조선소에서의 중노동도, 원자폭탄 피해가 아니었다. 서씨는 생전에 주변 일본인들에게 늘 "원자폭탄보다 무서운 건 차별이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원자폭탄이 나가사키를 완전 폐허로 만들었으나,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이 끝났어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그의 울부짖음은 해마다 8월 원폭의 날에 행해지는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도 일본 사람들의 입술을 통하여 회자되곤 한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경제력이라고들 말하지만, 전후는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평화로웠으니까 번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슈퍼에 가보세요. 무엇이든지 있죠. 예전에는 고구마나 쌀겨, 미국산 밀가루뿐이었어요.(…)일본 정부는 조선을 식민지화해 우리를 강제연행했습니다. 그 위에 원폭까지 맞게 한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정부와 행정이 왜 선두에 나서서 일본인들에게 가까운 곳에 있는 조선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도록 교육하지 않습니까? 차별을 없애기 위해 왜 노력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차별만은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원폭과 조선인> 제2집, 서정우씨의 증언에서)

끌려온 조선인 흔적 지우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폐허가 된 하시마 내부의 모습. 가장 앞쪽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시설이다. 1층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폐허가 된 하시마 내부의 모습. 가장 앞쪽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시설이다. 1층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 시바타 토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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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에서는 하시마를 규슈·야마구치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하나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시마 탄광의 폐광과 함께 섬이 무인도화되면서 꾸준히 이런 움직임은 있어 왔으나, 폐광 이후 뱃길도 끊기고 상륙도 금지된 섬에 시(市)가 나서서 이곳을 적극적으로 관광지화해 불길을 당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재 나가사키시에서 운영하는 하시마 관광코스에서는 전시 노동자들의 삶이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나아가 하시마 안내 자료 등에도 가벼운 섬의 연혁을 서술하는 것뿐, 1945년 이후의 하시마만을 조명하고 있으므로 그 이전의 하시마의 진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크루즈를 타고 하시마에 들어가는 관광객들도 안내인을 따라서 정해진 코스로만 다녀야 하는데, 규정된 코스에는 탄광시설 일대뿐 실제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허울뿐인 견학이라 할 수 있다.

하시마 탄광에 있어 조선인과 중국인의 삶에 대한 기억은 침략과 전쟁, 수탈로 점철된 일본 근대사의 군국주의, 천황제 파시즘, 그리고 차별과 착취의 피라미드 구조, 그 어둠을 먹고 자라난 일본의 근대화와 번영이라는 측면을 생각해볼 때, 일본 근현대사의 기저와 사회상을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며 축도가 된다. 따라서 하시마의 전시 사회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일본인에게나 한국인에게나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시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러나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시마의 역사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좀더 깊이 알고 고민하며 성찰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개, 돼지와 똑같이 취급당하며 가혹한 노예 노동과 학대 속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고향 산천을 그리다 죽어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관광상품 '군함도'를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태그:#조선인 강제연행, #하시마, #군함도,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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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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