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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래 마을에서 혼인잔치가 열렸습지요. 신랑은 친구들에게 붙들려가 기생집에서 곤죽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바람에 아침에야 돌아와 신부 집 대문을 두드렸는데, 이미 신방엔 젊은 남녀가 원앙금침 속에서 만리장성을 쌓은 후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잘 잘못을 따지자면 이 집 하인 놈들이 술 취한 전씨 성 쓰는 왈패를 새신랑인줄 알고 냉큼 붙잡아 신방에 집어넣어 사단이 난 게지요."

정약용은 말없이 점박이 노인의 언변을 들어주었다. 노인이 혓바람 냈다.
"새벽에야 술이 깬 왈패는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모양입니다. 어둑새벽에 계집의 속살을 더듬은 기억이 나는 것은, 자신이 기생집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한데, 갓 신방을 차린 신부를 건드렸다는 말에 왈칵 겁이나 뒷수습이고 뭐고 놓아둔 채 그 길로 줄행랑을 놓아버렸어요. 그러니 혼사가 어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무효가 돼버린 게지요. 남들 보기 부끄럽다는 처녀의 아빈 극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고 처녀의 어민 목을 매 남편의 뒤를 따랐으니 홀로 남은 처자에겐 이만저만한 한이었겠지요."

"그 처녀는 어찌 됐습니까?"
"소문엔 미처 날뛰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만 자세한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죽은 자의 깊은 한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점박이 노인은 아슴푸레한 기억을 더듬으려 했으나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 듯 자처우는 수탉처럼 두어 차례 고갯짓을 하고 물러났다. 이날 해거름 녘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 송화도 같은 얘기를 꺼냈다.

다섯 해 전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처녀가 물에 빠져 죽은 뒤, 원귀가 돼 감영을 떠돌고 있다는 풍문을 길 안내자의 사내가 들려줬다는 것과 공검지 저수지에 떠오른 처녀의 사체를 지나가던 스님이 수습했다는 것도 들려주었다.

"허면, 송화는 공검지 인근의 사찰을 찾아가 다섯 해 전 사고에 대해 알아오너라. 처녀가 물에 빠져 자진했으니 작지 않은 소문이 났을 것이야."

송화를 공검지 쪽으로 보내고 정약용은 검시기록을 살폈다. 자신이 도착하기 전 형방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형도(屍形圖)를 꽉 채워놓았다.

<신임 전성국 관찰사는 무엇에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죽었으니 이는 분명 원귀의 장난일 것이다.>

눈을 부릅떴다는 것만으로 '귀신을 만났다'고 속단하는 건 무리였기에 함께 잠자리에 든 추월이가 깨어났다는 전갈을 받자 즉시 동헌으로 소환해 그날 밤의 정황을 물었다.

"쇤네는 관찰사 어른의 수청을 든 기억밖엔 없습니다. 잠자리에 든 이후 다음날 사람들이 깨울 때까지 혼절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귀신의 장난인가?"
"관찰사 어른이 관사에 들어오시어  '초승달 춤'을 추게 해 이백의 '관산지월'을 추었습니다만, 잠자리에 든 이후 기억이 전연 없습니다."

'초승달 춤'이란 신월무(新月舞)다. 초승달처럼 발이 작은 여인들로 하여금 이 춤을 추게 하는 건 사내들이 성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양의 춘심(春心)이란 기생어미에게 들은 바 있었다. 그 춤을 추는 기녀를 사내들이 좋아하는 건 몸과 허리와 둔부가 각기 따로따로 놀기에 사내들은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인들은 전족(纏足)이라는 걸 행했다는 걸 들은 기억이 있었다.

"나으리, 공검지 저수지에 처녀가 물에 빠져 죽은 건 사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처녀의 주검을 인수해간 이가 혼인을 약조한 신랑이랍니다. 몸이 약해 무주구천동에서 그 동안 간병하고 있었는데 색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오호."

"그 자가 이곳 감영에서 이부(吏部) 일을 본답니다. 소문엔 추월이의 기둥서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야? 이럴 게 아니라 사고가 난 방으로 가자. 아직 지난밤의 잠자리 물건이 남아 있을 게 아닌가."

두 사람은 급히 금역(禁域)이 설치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엔 여전히 이부자리 위에 두 개의 베개가 놓여 있었다. 이불과 베개를 들척이던 정약용은 한쪽 베개만이 메마른 물기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

염분(鹽分)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순수한 물의 흔적이었고 다른 베개에선 몇 가닥 여인의 긴 머리가 발견되었다. 물기 흔적이 있는 쪽 베개를 전성국이 베고 잤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날 방사로 땀을 흘렸다면 의당 베개에선 짭짤한 소금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소금기를 느낄 수 없고 물의 흔적만 있다는 건 관찰사를 살해한 게 물이다. 물을 이용해 살해했다면 방법은 압새(壓塞)다.'

형방의 검시기록엔 시체가 눈을 뜬 채 돌기된 상태였다. 누군가가 의복이나 종이에 물을 적셔 입과 코를 눌러 질식시켰다면 당연히 시체는 눈을 뜬 채 눈동자는 돌기된다. 입과 코 안엔 맑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항문은 돌출하고 대소변으로 의복이 더럽혀진다.

형방의 검시기록에서 빠진 것은 얼굴 전체가 검붉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피가 맺힌 게 원인으로 사인(死因)은 압새였다. 가까이 있는 형방에게 그날 밤 추월이가 어떤 모습으로 춤추었는지를 물었다.

"그 아이 춤사위는 요란합니다. 어여쁜 화관(花冠)에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사뿐사뿐 춤을 추지요. 아무리 목석같은 사내라도 춤사위를 구경하면 몸이 뜨거워져 소란을 일으킵니다. 똑같은 춤을 추는데 어떻게 추월이의 춤에만 요란을 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형방은 관원을 이끌고 가서 추월이와 기둥서방이란 자를 잡아오게. 그날 밤 추월이 머리에 꽂았다는 화관과 머리 장식도 자네가 직접 찾아오게."

두 사람을 잡아오자 정약용의 표정이 냉랭히 굳어지며 사내를 향해 호통을 날렸다.

"아무리 일가의 한이 깊기로 서니 흉한 계략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네가 죽은 관찰사 전성국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 저지른 짓을 내가 모른 줄 아느냐?"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으나 추월이가 머리에 꽂았던 장식들을 형방이 가져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한양에서 춘심이란 기녀에게 '초승달 춤'에 대해 들은 바 있다. 그런 춤을 성주 땅의 기녀가 춘 데엔 남다른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다 기녀 머리에 꽂은 장식품을 생각해 보았다. 머리에 꽂은 나비 모양의 장식품 이름이 '금보요(金步搖)'가 아닌가?"

상대에게서 대답이 없자 정약용의 뒷말이 이어졌다.
"춤추는 무희(舞姬)들은 이런 장식을 머리에 꽂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는 나라를 기울게 했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 이씨가 무희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로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된 건 금보요의 역할이었다."

나비 모양의 노리개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정약용은 한쪽 날개를 건드렸다. 약간 아래로 날개가 쳐지며 안쪽에서 가루약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가만히 냄새 맡고 이번엔 반대쪽 날개를 건드렸다.

역시 그쪽 날개도 아래쪽으로 쳐지며 가루약이 흘러나왔다. 정약용의 눈길이 무릎 꿇린 남녀에게 향했는데도 그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이미 금보요의 용도를 알고 있는 이상 섣불리 지금의 형편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예감한 표정이었다. 정약용의 질책이 이어졌다.

"너희가 아직도 지은 죄를 발뺌하려 든다면 명명백백 밝혀주마. 전임 관찰사 전성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춤을 출 때엔 오른쪽 뚜껑을 위로 올려 가루약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가루약은 요초(瑤草)라는 이름의 음약(淫藥)이다. 이 가루약이 코끝에 스며들면 혈기 방정한 사내들은 단번에 계집의 속살을 찾게 된다. 추월이가 춤을 춰 관찰사와 잠자리를 하게 되자 이번엔 잠자리에 들기 전 금보요의 왼쪽 뚜껑을 밀어 올리고 춤췄을 것이다."

여전히 추월이에게서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왼쪽에 있던 가루약은 양금화(洋金花)라 부르는 '민 독말풀'이다. 아니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엔 미미한 비웃음이 맴돌았으나 추월이의 표정은 처음 듣는 얘기인 듯 사내와 정약용을 의아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한방에서 침술로 이름을 날린 화타(華陀)가 사용한 게 마비산(痲沸散)이다. 여섯 종류의 식물로 조제한 마비산으로 환자를 전신 마취시켰다. 물론 이 무렵은 침마취(鍼痲醉)가 유행했지만 간간이 양금화를 이용한 중약마취(中藥痲醉)도 선을 보였다.

마비산의 주 성분인 양금화. 이른바 '민 독말풀'로 알려진 이 식물은 삭과(削科)의 꽃을 피우며 조선 환경에서 잘 자라 어느 곳에 심어도 스스로 종자를 떨어뜨려 꽃을 피웠다.

"해서, 너희 두 남녀가 작당해 전임 관찰사를 살해한 것이렸다!"

사내가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듣자듣자 하니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추월이와 내가 무슨 재간으로 관찰사 어른을 살해했다는 건 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추월이와 가까이 지내긴 했으나 관찰사 어른을 살해하라고 꼬드긴 일도 없으려니와 내가 그런 일을 지시했다고 추월이가 들을 위인도 아닙니다."
"하긴 그렇다. 추월이는 관찰사를 살해한 데 일조한 걸 모르고 있을 터! 정녕 네가 이실직고를 않는다면 내가 밝혀주마!"

사내가 금보요를 만들어 추월이에게 준 점을 정약용이 지적하고 나섰다.
"네가 용인 고을에 사는 이의원에게 금보요를 가져와 그 동안 몇 사람에게 시험해 보았을 것이다. 금보요의 효능이 너의 생각대로 쓰임새가 증명되자, 전성국 관찰사가 도임하는 날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추월이가 금보요를 머리에 꽂고 춤을 추자 그날 밤이 깊어  관찰사 처소에 간다는 걸 알고 이번엔 양금화가 있는 곳을 열고 춤추게 했다. 술에 취한 터라 관찰사와 추월이는 이내 잠들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남녀가 있는 곳으로 성큼 내려섰다.
"관찰사의 죽음은 전형적인 질식사 증상이다. 너는 젖은 종이로 일시에 관찰사의 입과 코 위에 붙여 질식시키지 않았느냐? 따라서 시체는 눈을 뜨고 눈동자가 돌출할 수밖에 없었을 터! 코 안에 맑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얼굴 전체에 피가 맺혀 검붉은 데다 항문이 돌출하고 하복부를 대소변이 어지럽혔지 않느냐! 어디 그뿐이리, 관찰사가 누웠던 베개엔 아직도 물기의 흔적이 있으니 어찌 아니라 하느냐. 더구나 이곳으로 오는 길에 관찰사의 부인께서 '차(此)' 자로써 길흉을 물은 일이 있다. 점괘에 이르기를 '두 마리의 등사(螣蛇)가 몸을 친친 감은 게 보이고 독이빨 두개와 호랑이 꼬리가 보였다'는 건 모두 너의 원한과 관계있는 일이다. 모든 게 명명백백 밝혀졌는데 아니라 하겠느냐?"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허한 웃음을 그친 그는 놀라워하는 하는 추월이를 측은히 바라보다 정약용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소! 이번 일은 모두 내가 꾸몄소! 추월이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몰랐소이다. 전가 놈으로 인해 집안이 쑥밭된 후, 어떻게든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소식을 탐문하던 차, 나이 많은 선대왕께 아첨해 형조정랑 자리에 오른 제 에비의 권도를 믿고 이곳 감영에 도임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말을 듣다 보니 추월이의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감영에 관찰사가 도임한다는 소문이 돌고 난 후, 기둥서방으로 믿고 따르는 사내에게 그런 말을 들었었다. 사내는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꺼내들고 계집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켰다.

"중원의 민속품을 구경하다 용인에서 사온 것이네. 자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성주 땅에서만 썩힐 게 아니라 떠억 하니 한양으로 올라가 명문가의 안방마님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야. 이의원의 귀띔에 사내들은 시든 성욕을 자극하는 '관산지월' 춤을 좋아한다네. 그 춤을 추면 아무리 절구통같은 여인이라도 양귀비로 보인다지 않는가. 자넨 빼어난 미색의 화용월태가 아닌가. 그러니 무슨 걱정인가. 일이 잘 되면 나의 수고나 잊어버리지 말게. 관찰사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춤을 추기 전, 잠시 밖으로 나와 나를 만나고 들어가게. 일이 잘 돼 관찰사를 수청 들면 그때도 잠시 밖으로 나와 나를 만나고 들어가고. 그리한다면 자네 마음에 담은 뜻을 이룰 것이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밖으로 불러내 가만히 안아주고 머릴 매만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머리 장식을 만지는 순간,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 나비장식의 금보요는 어느새 독사 이빨이 되어 상대를 깨물 준비를 한 것이다.

[주]
∎압새(壓塞) ; 이것은 물을 사용해 상대를 죽이는 방법으로 조선왕조 때엔 내명부나 내시부(內侍府)에서 곧잘 시행되었다. 궁녀나 내시들을 살해할 때 물 적신 한지(韓紙)를 이용해 코와 입을 막아 죽였었다.


태그:#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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