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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주름'전이 열리는 갤러리학고재입구
 '시간의 주름'전이 열리는 갤러리학고재입구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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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64)과 설치작가 안종연(58)의 '문학과 미술의 만남-시간의 주름(groove of time)'전이 2월 28일까지 갤러리학고재(대표 우찬규)에서 열린다. 이번 전은 박범신의 소설 <시간의 주름> 등을 60여 점의 설치미술로 형상화된 전시회다.

사람들은 주름이라는 단어를 끔찍이 싫어한다. 여자들은 더 그렇다. 성형도 마다않고 주름 없애는 화장품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시간의 주름>이라는 제목을 정할 때도 출판사와 충돌이 있었단다. 하지만 주름을 소설화한 건 멋진 발상이다. 현대미술에서 깡통, 변기, 쓰레기 등이 예술화하는 것이 대세이니 이와도 통한다.

'시간의 주름', 소멸하는 모든 것에 대한 헌사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파이핑과 프레임 LED 2009. 빛의 주름, 그 생성과 소멸이 보인다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파이핑과 프레임 LED 2009. 빛의 주름, 그 생성과 소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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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주름을 만든다. 우주와 인간과 자연에 주름 없이는 생명도 없다. 사람의 성기나 내장이 그렇고 나무껍질이나 우주표면이 그렇다. 보기 민망해도 이걸 미술로 표현하면 그지없이 아름답다. 이번 전이 이를 증명한다.

박범신이 사랑의 고뇌로 팬 주름을 썼다면 안종연은 그걸 빛으로 편 주름을 그렸다. 시간과 공간, 삶(생성)과 죽음(소멸)을 넘어 우주의 질서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한 사람은 주름을 파고 한 사람은 주름을 펴고 오누이처럼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작업을 했다.

박범신이 준 쌀로 안종연은 밥을 짓다

갤러리학고재에서 안종연과 박범신의 만남전에 맞아 '아버지'라는 작품 앞에 포즈를 취하는 두 작가
 갤러리학고재에서 안종연과 박범신의 만남전에 맞아 '아버지'라는 작품 앞에 포즈를 취하는 두 작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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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언어와 시각언어가 장르의 벽을 넘어 소통의 장을 활짝 열어젖힌다. 박범신은 안종연에게 "내가 쌀을 주었으니 당신이 그것으로 떡을 만들든 밥을 짓든 마음대로 하시요"라고 했다. 예술적 농사꾼과 살림꾼이 되어 협업을 한 셈이다.

예술만큼 소통이 잘 되는 분야가 어디 있나. 둘은 처음부터 바로 알아봤다. 상호영역을 존중하기에 전혀 침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오묘하고 영험한 작품이 나왔다.

요즘 문학과 미술, 음악과 미술, 시와 음악 등을 결합하는 전시나 행사가 자주 열린다. 전문용어로 '통섭의 미학'이라고 하던가. 이번 전도 탈장르행사를 기획해온 '문학사랑'과 '대산문화재단'의 후원이 있었다. 하긴 과학과 예술은 오래전부터 소통을 해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랬고 백남준이 그랬다.

안종연의 공공미술, 빛의 다양한 주름 형상화

'광풍제월(光風薺月,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혹은 마음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하는 말)' 제주. '빛의 숲' 대우아파트 잠실 2008(아래 좌). '빈 중심' 삼차원 철(아래 우) 2009.
 '광풍제월(光風薺月, 비가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혹은 마음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하는 말)' 제주. '빛의 숲' 대우아파트 잠실 2008(아래 좌). '빈 중심' 삼차원 철(아래 우) 2009.
ⓒ 안종연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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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은 50대가 겪는 극한의 비극적 사랑을 안종연은 인류의 보편타당한 사랑으로 녹여낸다. 박범신은 간담회에서 지금 나는 나이 먹는 것과 치열하게 투쟁한다고 했다. 하긴 모든 예술이 그런 유한성과 맞장 뜨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안종연은 이런 것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받아들인다. 투쟁한다는 의식을 가질 여유도 없이 작업에만 탐닉했다. 작은 체구로 그는 이미 대규모의 공공미술인 '광풍제월(光風薺月)'을 만든 장본인이다. 위 '빈 중심'은 허상이 낳은 빈 공간미를 그린 것이다.

박범신은 언어의 색채와 문장 속에 번뜩이는 빛 중 뭘 더 중시할까. 안종연은 색채보단 빛을 중시하는 작가다. 빛이 색보다 더 우위라는 말도 있지만 하여간 현대회화의 틀을 깨고 뭔가 새로운 실험을 해 보려는 이 작가의 몸부림만은 강렬하다.

'절망'하는 현실을 '열망'하는 이상으로 바꾸기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파이핑과 프레임 LED 가변설치 2009. '주름-새 날들의 시작' 아크릴물감에 컬러 고체 에폭시(epoxy) 2009(뒷면). 에폭시는 열경화성 플라스틱으로 물과 날씨에 잘 견디고, 빨리 굳으며, 접착력이 강하다. 접착제·주형·코팅에 쓴다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파이핑과 프레임 LED 가변설치 2009. '주름-새 날들의 시작' 아크릴물감에 컬러 고체 에폭시(epoxy) 2009(뒷면). 에폭시는 열경화성 플라스틱으로 물과 날씨에 잘 견디고, 빨리 굳으며, 접착력이 강하다. 접착제·주형·코팅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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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시간의 주름> 속 50대 남자주인공은 연상의 여자화가를 좋아해 직장도 버리고 떠도는 '절망'의 이야기다. 그런데 안종연은 거기에 숨겨진 이상적 '열망'의 세계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보이는 '시간의 주름'을 시각화한다.

오지여행을 즐기는 박범신과 뉴욕유학으로 오랜 이방생활을 한 안종연은 다르면서 같다. 박범신이 고뇌를 감내하는 인고주의자라면 안종연은 열락을 탐하는 쾌락주의자이다. 둘은 서로 상극인 물과 불처럼 보이나 오히려 더 찬연한 빛의 향연을 일궈낸다.

시간의 주름은 흉측해도 영롱해도 다 아름답다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핑과 프레임 LED 가변설치 2009.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핑과 프레임 LED 가변설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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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은 60대이나 20대 청년 같고, 안종연은 50대이나 10대 아이 같다. 박범신의 내면에는 늙지 못하게 하는 괴물이 있고, 안종연의 내면에는 늙어가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천사가 있는 것 같다. 괴물과 천사는 학고재에서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범신의 주름은 흉측하게 보이고 안종연의 주름은 영롱하게 보인다. 공통점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적이기에 흉측한 것은 흉측한 대로 영롱한 것은 영롱한 대로 아름답다. 여기선 스포츠처럼 그 순위를 매길 수 없다.

마음의 주름 펴듯 온기 느껴지는 '빛 드로잉'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자연석 규석모래 LED 가변설치 2009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자연석 규석모래 LED 가변설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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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연은 평생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작업해오다 이번에 박범신과 같이 일하게 돼 즐거웠나보다. 그래서 그런지 '빛의 에젠'를 보면 마음의 주름을 펴게 하는 따뜻한 온기와 두 작가가 영매자가 되어 같이 연출한 오붓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미술과 문학의 조금 다르다. 미술이 문학보다는 더 압축적이고 종합적이다. 웅장한 장편서사도 하나의 작품에 담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문자와 그림의 주름과 흔적이 시공간에서 화학작용을 하여 상생효과를 낸다.

시간의 주름 걷어낸 빛의 '에젠(靈)'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자연석 규석모래 LED 가변설치 2009
 '빛의 에젠(Ezen)' 주물유리 자연석 규석모래 LED 가변설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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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에젠(ezen, 바이칼호숫가에 사는 부랴트족이 모든 자연과 사람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영)'을 보면 작가가 즐거워서 한 작업이라는 점이 역력하다. 어디 막히거나 꼬이거나 맺힌 것이 없다. 뭉친 실타래를 쉽게 풀어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여백을 살리며 최소의 빛으로 최대의 공간을 창출한다.

시간이 팬 주름을 두 작가는 앙상블을 이루며 메워나가고 시간의 제약도 뛰어넘는다. 그리고 마침내 유랑이 끝나는 바이칼호수에 도착한다. 소설 <시간의 주름>에 나오는 문장인 "나의 유랑이 끝난 곳은 그녀가 영원히 눈 감은 바이칼이다"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만화경 속엔 만다라가 따로 없네

▲ '만화경' 프로젝션 애니메이션 가변설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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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만화경' 이야기로 글을 맺고자 한다. 이는 작가가 어려서 만화경으로 본 낙원을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만다라가 따로 없다. 안종연도 "우리네 인생도 생성과 소멸로 매순간 같은 적이 없다"고 했지만 삶도 이런 생애 첫 감동과 환희를 변주하면서 시간의 주름을 활짝 펴는 것이 아닌가싶다.

덧붙이는 글 | 학고재 (02) 720-1524 www.hakgojae.com 설연휴(2/13-15)에는 쉼
안종면작가 홈 http://www.ahnjongyuen.com 박범신작가 홈 http://bbs1.kll.co.kr
안종연 작품소장처 :국립암센터, 삼성생명, 종로타워, 교보생명, 파라다이스호텔(제주) 등등



태그:#안종연, #박범신, #시간의 주름, #빛의 에젠, #갤러리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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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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