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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원단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 직조기들이 끊임없이 소음과 먼지를 토해내는 공간, 그 구석에 커튼이 드리워 있었다고 한다. 살림집과 공장을 구분하는 경계선, 그 안에서 두 아이는 공부를 했다. 아빠와 엄마는 밤잠을 줄여가며 기계를 돌렸다.

그곳을 자주 찾던 은행원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부부를 도와주고 싶었고, 힘들게 공부하는 아이들이 딱하게 보였다. 공장 사장에게 대출해줄 테니 집을 구하라고 했다. 사장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IMF의 혹한이 차갑기만 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그 의류업체는 연매출 50억 원이 넘는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장경복(43·남) 우진텍스타일 대표는 1일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고, "지금도 아침에 전화해서 출근하고 있냐고 묻기도 하는 큰형님과 같다"고 했다.

내 손에 기름때를 묻힌 그들이 "우리 경제의 한 축"

현병택 기은캐피탈 대표
 현병택 기은캐피탈 대표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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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대표에게는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사연의 주인공은 현병택(56) 기은캐피탈 대표이사다. 역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78년 기업은행에 일반행원으로 입사하여 분당·성수 지점장, 본점부장, 지역본부장 등을 거쳐 부행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 비결 일부는 작년 9월 내놓은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쳐라>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32가지 성공코드로 소개된, 기발한 영업 아이디어가 가득한 책이다. 인근 아파트에 돌린 '개점 안내문'에 '못을 박아드립니다'란 문구를 넣어 주부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금융 마케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재확인하기 위해 만난 것은 아니었다. "기름때가 묻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미는 사장과 악수를 하면 내 손에도 기름때가 묻었다"면서 "이들이 우리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는 중소기업체의 사장들"이란 표현, 중소기업에 대한 남다른 주관이 돋보였다.

이미 객관화된 주관이기도 하다. 과거 언론보도를 살펴보자. 40일 만에 1조5천억 원을 유치했다는 '중소기업 희망통장', 중소기업 CEO 2만7천여 명이 참여했다는 '현씨 마케팅'이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2008년 11월 기은캐피탈 대표 부임 이후, 이와 같은 행보는 더욱 가속화되는 모양새다.

기업은행과 함께 '중소기업 상생펀드'를 조성했고,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프로그램인 '골드트랙'을 내놓았다. '중소기업근로자전용 신용대출 상품'을 출시했는가 하면, 중소기업 금융지원 전담 점포를 안산에 개설하기도 했다. 캐피탈 업계에서는 최초라고 한다.

가훈도 '기본과 원칙', "원칙에 충실하면 망하지 않아"

명함집은 현 대표가 마라톤 완주 메달 다음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가보'다. 사람을 만난 날짜는 물론 관련 메모도 적혀 있다. 그는 "내가 살아왔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했다.
 명함집은 현 대표가 마라톤 완주 메달 다음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가보'다. 사람을 만난 날짜는 물론 관련 메모도 적혀 있다. 그는 "내가 살아왔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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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난 점은 또 있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투자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루에 방문하는 중소기업 숫자가 서너 곳이라고 한다. 지난달 29일도 그랬다.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사무실에서 나가야 한다"면서 "배울 점도 많고, 현장에 있는 것이 그저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조건 갈 곳을 만든다. 하루 근무 시간의 70% 정도는 외부에 있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도 했다.

책을 덮고 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도 그랬다. 32가지 성공 코드를 관통하는 핵심은 원칙 아닐까. 마침 가훈 또한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자'다.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훈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 가족이나 회사, 어떤 조직이든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면 망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현 대표는 원칙주의자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원칙부터 짚어 보자. 이른바 '4회 방문'의 원칙이다. 업무 시작하기 전, 업무 시간이 끝난 후, 점심시간 그리고 휴일에 가보고 나서야 투자나 대출을 결정한다고 했다. 직원들에게도 틈만 나면 강조하는 이유를 현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그 업체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단순히 월급쟁이 시각으로 일하는지, 아니면 내 회사같이 일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다. 재무제표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당신은 기자, 나는 은행원... 돈을 빨리 빼야 흑자인생"

'고객이 갑'이란 원칙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인터뷰가 끝나고 갈 업체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크레인 중개상"이라면서 "넥타이를 풀고 가야 한다"고 답했다. "미뤄 짐작하기에 그분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을 것이고, 상대방에 맞는 복장을 하는 것부터가 기본"이란 설명이었다.

"고객 또는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안 된다. 반드시 을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꾸준히 인간관계를 쌓으면, 그 사람은 내 편이 된다. 진정으로 상대를 돕고 싶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나를 도와준다."

그러면서 현 대표는 "누구를 만나 예금해 달라거나 돈 쓰라고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성과가 나왔다는 설명인데, 쉽게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자 현 대표는 '지갑론'을 꺼내 들었다. "지갑을 빨리 빼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색다른 주장이었다.

- 식사비나 술값을 앞서 치른다는 뜻인가. 나도 지갑을 빨리 빼는 편인데, 성공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다(웃음).
"아니다, 진짜다. 인생은 길다. 길게 봐야 한다. 돈을 빨리 빼는 사람이 흑자인생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자 인생이다. 당신은 기자다. 나는 은행원이다. 공통점이 뭔가. 다들 지갑을 잘 안 빼는 직종 아닌가(웃음).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가원 불가근(不可遠 不可近,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는 뜻)'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은행원이 지갑을 빨리 빼봐라. 아주 인상적으로 보지 않겠나."

"불도저라고 욕도 많이 먹어... 아쉬움 있지만 후회는 없어"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한다는 현 대표. 딱딱해 보이는 인상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한 수십 년 된 거울이라고 한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한다는 현 대표. 딱딱해 보이는 인상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한 수십 년 된 거울이라고 한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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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상적이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릴 만한 인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사를 모시는 직원들은 힘들지 않을까. 별명을 물어봤다. 대뜸 "불도저"란 답이 돌아왔다. 요즘 들어, 개인적으로 치를 떠는 건설장비 아닌가. "한 번 결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고 하더라"는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다. 업무 시간 중 개인전화 금지 방침이나, 출근하자마자 화장실에 앉아 있는 직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도 책에서 봤다. 권위주의로 비치지 않을까.
"동의한다. 불도저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 월급쟁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급이라는, 그걸로 보상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었다. 직원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미안한 마음이다. 아쉽기도 하다. 입을 좀 더 열 걸, 가슴에 있는 말을 좀 더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싶다."

그 길을 걸어 온 결과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현 대표는 자신의 소신을 증명하는 소중한 결과물도 갖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해 "마라톤 풀코스 18회 완주가 가장 자랑스러운 이력"이라고 소개했다. 금융인으로서도 자랑스러운 이력을 갖고 있다. 그보다 더 자랑스럽냐고 물었다.

지극히 당연한 듯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마라톤을 하면서 몸에 밴 일련의 결과물들이 업무 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며 "원칙대로 행동하다 따라온 부수적인 결과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금융인으로서 성과는) 조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당연한 길을 걷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30년 은행생활 결론, 금융인은 따뜻해야"

현 대표의 춘천마라톤대회 출전 모습
 현 대표의 춘천마라톤대회 출전 모습
ⓒ 기은캐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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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0년 은행생활하면서 얻은 결론은 금융인은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중소기업에 따뜻함을 보여줘야 한다. 그 업체가 좀 어렵다고, 비 오는데 우산을 뺏는다면, 따뜻함이 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다가가서 악수를 청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금융이 살아 있는 것이다. 냉정함으로 일관한다면 사채업과 다름없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 그래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고 가능성도 높지 않나. 그런 위험성을 줄이려고 현장에 가서 일일이 확인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맞다. 돈 있는 중소기업은 잘 굴러간다. 반면 영세 중소기업은 은행 문턱이 높다고 여긴다. 그러니 찾아가는 것이 맞다. 돈이 잘 돌게끔 하는 것이 금융인의 역할이니까, 피가 잘 돌아야 사람도 건강하지 않나. 찾아오는 사람들만으로는 그 폭이 너무 좁다. 우리가 가야지,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지. 그것이 '아름다운 동행'이다. 직원들에게 홀씨가 되라고 강조한다. 앉아서 흔들어봐야 얼마나 뿌려지겠나. 돌아다니면서 뿌려야지."

이쯤이면 못 말리는 '소신'이다. 그리고 자신의 원칙을 지켜 가는 과정에서 "금융인은 따뜻해야 한다"는 소신, 더불어 중소기업에 대한 애정도 그만큼 커졌을 것이다. 그는 "중소제조업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웅이고 애국자"라고 힘줘 말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판로가 있나, 자금이 충분한가, 아니면 담보가 있나, 인재가 있나. 그럼에도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는 사람들, 비록 성장하지 않고 현 상황을 유지한다 해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용을 창출하는 사람들 아닌가. '9988'이란 말도 있지 않나. 대한민국 제조업체 중 중소기업이 99%를 차지한다. 전체 고용의 88%를 중소기업이 담당한다."

"조만간 중소기업이 갑... 중소기업 전용운동장 만들어야"

현병택 기은캐피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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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한국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은 차가운 편이다.

"그런 인식은 앞으로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당장 토요타 리콜 사태를 보라. 비용 절감만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협력업체에게 부품 단가 인하를 강요하다 저 모양이 되지 않았나. 지금이야 대기업이 갑, 중소기업이 을이지만, 조만간 중소기업이 갑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앞으로 좋은 중소기업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대기업 성패가 갈릴 것이니까.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이다."

현 대표는 책에서 "우리 사회는 분유를 먹고 자란 아기 같다"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를 다시 다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 기초가 중소기업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어떤 지원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끝으로 던졌다. 현 대표는 자신의 답을 모두 '(인터뷰에) 실어 달라'고 청했다. 기꺼이 응한다.

"대한민국에서 히든 컴퍼니가 잘 안 나오는 이유가 뭔가. 중소기업 전용운동장이 없어서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들어올 수 없는 고유업종이 있었다. 그게 없어졌다. 우선은 마음놓고 뛸 수 있는 마당이 필요하다. 가업 승계 문제도 중요하다. 관련 세금이 너무 많아 아예 매각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실정이다. 일본이나 유럽처럼 가업 승계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조세 차원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셋째, 대출 금리가 낮아야 한다. IMF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신용도와 연결하여 금리가 결정되는 체제로 굳어졌다. 그러다 보니 신용도가 낮고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대상 금리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해결방법은 기금을 활용하는 것이다. 정부 운영 기금 많지 않나. 중소기업 전용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럼 중소기업 대출 금리는 낮아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중소기업에 잘 안 가려고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에 대한 각종 세제 혜택, 주택 우선 공급, 자녀들에 대한 장학금 등을 특례로 지원해줘야 한다. 이들 문제에 있어서는 범국민적인 확산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태그:#현병택, #기업은행, #IBK, #중소기업,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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