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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무명치마 적삼에 아기 업은

열여덟 어머니가 

양동이 넘치도록

푸른 하늘을 이고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걸어 온다. 

 

사진 찍으면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긴다고 믿던 어머니가

미군이 던져주는 

달콤한 밀크초콜릿 얻어 

어린 자식들에게 주려고

 

찰칵찰칵 얄밉게

미제 군인들 셔터를 누르는

흑백 필름 속으로

꽃다운 열여덟

청춘의 어머니

헤어진 꽃잎 같은

낡은 무명 치맛자락

해풍에 날리며,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등에 업은 아기 물세례 맞을까 

곡예하듯이 조심조심 

허공을 밟듯이 걸어내려오신다.

 

낮에는 물동이에 해를 띄우고

밤에는 물동이에 달을 띄우고…

 

[시작노트]그림은 아는 만큼 본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은 몰라도 다 알려준다. 사진의 기록은 이런 의미에서 그림보다 위대하다고 할까. 40계단에서 부산역 방향으로 약 150미터쯤 되는 곳과 그 곁에 야트막한 언덕 같은 산이 두 곳 있었는데, 이를 쌍산이라 불렀다.

 

쌍산 주변 아래 해안엔 논치어장이라는 정치망(定置網, 자리그물) 어장이 있었다고 한다. 40계단의 윗길은 현재의 초량방면으로 통하는 산길로 영선 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1876년 강제 개항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을사보호 조약 이후 대륙침략을 꿈꾸며 부산항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부산항 확장 공사를 실시하고, 1902년 부산북빈매축공사를 시행한 현장으로 1905년 당시 40계단은, 부산 북항 일대로 해안이었던 셈이다. 

 

6. 25 전쟁의 상흔은 신세대들의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절을 유년시절로 겪는 기성세대들은 이제 그 기억이 흑백사진처럼 희미하다고 한다. 모든 아픔에는 세월이 약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6. 25 전쟁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 역시, 6. 25 전쟁 이후의 세대.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피난시절 이야기 이상하게 세월이 갈수록 선명해 올 적이 있다.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가 있은 이후, 3년 뒤 국제시장 화재로 인해 집을 불태운 이재민들이 40계단 주변에 몰려들어 집단 판자촌을 형성했다고 한다.

 

부산역전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집이, 3천여채나 되었으며, 29명의 사상자에 6천 세대의 이재민을 만들었고, 이듬해는 새벽 용두산에 자리 잡은 피난민촌에 불이 나서 무려 1100세대 가까운 이재민을 내었다고 한다.

 

이때 불타서 민둥산이 된 용두산은 뒤에 용두산 공원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한다.수도 환도 이후, 전쟁의 잔해 같은 판짓집의 연이은 화재로 인해 부산 시민들은 전쟁보다 더 가난과 허기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 많은 전쟁 피난민 중에 가장 힘든 사람은, 총을 멘 군인보다는 아기를 업고, 걸리면서 피난 내려온 엄마들이었으리라….

덧붙이는 글 | * 서정주의 <그애가 물동이 물을...>에서 인용


태그:#피난민, #어머니, #물동이, #6. 25 전쟁, #야곱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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