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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용문역 앞 길가에 세워져 있는 볼랫길 안내표지판
 양평군 용문역 앞 길가에 세워져 있는 볼랫길 안내표지판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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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 목적지는 중앙선 원덕역 앞에 있는 추읍산인데 등산만 하기엔 너무 짧은 코스야, 그래서 용문에 새로 만들어졌다는 볼랫길 한 번 걸어보고 산행까지 하려고 하는데 어때?"

"그거 좋겠는데, 그런데 볼랫길이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 걸, 제주 올레길이나 변산의 마실길처럼 호젓하고 아름다운 길인지 모르겠네?"

지난 1월 26일 산행은 양평군 원덕역 앞에 있는 추읍산으로 정했다. 그런데 산행정보를 살펴보니 코스가 너무 짧았다. 산도 높지 않은 데다 겨우 2시간 남짓한 짧은 거리였다. 그래서 중앙선 용문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일행들에게 코스를 늘려 잡자는 제안을 했는데 모두 좋다고 반긴다.

짧은 산행코스 때문에 덤으로 잡은 볼랫길, 처음부터 헷갈리다

일행들은 우선 볼랫길이라는 낯선 이름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전철종점인 용문역에서 내려 용문 시가지와 반대 방향인 오른편 광장으로 길을 나섰다.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썰렁한 광장을 벗어나자 길가에 '볼랫길'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판에는 볼랫길은 '보고 또 봐도 다시 가보고 싶은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볼랫길은 1코스와 2코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리들이 찾아 나선 추읍산 코스가 제1코스였다. 2코스는 반대편인 용문산 쪽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그런데 볼랫길은 시작부터 헷갈렸다. 볼랫길 시작지점인 이곳에는 방향표지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표지판으로 보았을 때는 표지판 앞에서 원덕역 방향인 오른편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길가 논에 있는 볏짚의 두 가지 모양
 길가 논에 있는 볏짚의 두 가지 모양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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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침 용문역으로 나오는 주민에게 물으니 왼편으로 가라고 한다. 예상했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제법 넓었다. 조금 걷자 뒤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와 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간다. 길가 논에는 추수할 때 사료용으로 갈무리 해놓은 둥그런 볏짚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저 앞에 무슨 표지가 보이는 걸."

앞장서 걷던 일행이 멈춰선 곳은 '다문8리' 마을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표지석 옆에는 볼랫길 표지판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길도 제법 넓어 자동차들이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어서 몇 번인가 길 한쪽으로 비껴주어야 했다.

"제주 올레길하고는 많이 다른 걸. 올레길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데..."

얼마 전에 제주 올레길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일행이 조금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길이 어디 모두 같을 수 있겠는가? 지역에 따라, 또 지형과 주민들의 이용편의에 따라 길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주의 올레길 걷기는 지난 2007년 9월부터 시작됐다. 올레라는 말은 제주사투리로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뜻한다. 그래서 제주 올레길은 도로에서 집 앞 대문까지 이르는 고샅길 같은 모습이 대부분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안전하고 호젓한 길, 그래서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이 길을 평화의 길, 자유의 길, 공존의 길, 행복의 길, 배려의 길이라고 말한다. 온전히 걷기만을 위해 만든 길이다.

용문면 다문8리 마을입구 표지석과 볼랫길 표지판
 용문면 다문8리 마을입구 표지석과 볼랫길 표지판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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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밭에서 자라는 소나무 묘목들
 길가 밭에서 자라는 소나무 묘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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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이 생긴 이후 둘레길도 많이 생겼다. 둘레길은 어느 산이나 지역의 바깥 언저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을 말하며, 요즘은 지방마다 이 둘레길을 많이 개발하여 여행상품으로 내놓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이며 대표적인 둘레길은 아무래도 지리산 둘레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둘레길에 이어 등장한 이름이 마실길이다. 마실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방의 방언으로 마을이나 이웃집에 놀러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니 그만큼 소박하고 정다운 길이라는 뜻일 것이다, 전북 부안의 변산 마실길이 대표적이며 특히 그 길에서 만나는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길이다.

그런데 최근에 양평군이 전철개통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볼랫길은 처음부터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자동차가 씽씽 달려 결코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가 한쪽은 텅 빈 논배미들이 겨울철의 황량함을 드러내고 다른 한쪽에는 숙주나물만큼 자란 작고 어린 소나무 묘목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나마 정겨움을 한껏 풍겨주고 있었다.

다문8리 마을에 접어들자 길은 마을 집과 집 사이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좁은 골목길 처마 밑에 놓여 있는 옹기 항아리 몇 개도 정답다. 마을길을 지나자 둔치에 마른 갈대밭이 쓸쓸한 개울이 나타났다. 흑천이라고도 불리는 삼성천이었다.

개울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바윗돌들이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성큼성큼 뛰어 건너자 나지막한 야산자락으로 접어든다. 길은 바로 이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마을 안길을 통과하는 볼랫길
 마을 안길을 통과하는 볼랫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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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 산길에는 쉼터가 만들어져 있고 작은 골짜기엔 앙증맞은 나무다리도 놓여 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응달이어서 얼어붙은 길이 많아 아이젠을 착용하고 느긋하게 걸어 능선에 당도하니 섬실고개 쉼터다. 길은 세 갈래, 어느 쪽으로 가야 추읍산을 오를 수 있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일단 왼편 능선길을 타보기로 했다. 그런데 30여 분을 걸어 뒤돌아보니 사진에서 보았던 추읍산이 뒤쪽으로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잘못 든 길에서 헤매고, 길 없는 추읍산을 어렵게 오르다

다시 섬실고개로 되돌아와 고개를 넘었다. 삼성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고개가 높지 않아 곧 삼성리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을 지나자 골짜기를 따라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들이 넘어온 나지막한 산과 추읍산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추읍산을 오를 수 있는 길안내 표지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오른편 길을 따라 걸어가 보기로 했다. 곧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났지만 산으로 안내된 이정표는 찾을 수가 없다. 일단 다리를 건너 다시 오른편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응달이어서 눈과 얼음이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길은 추읍산 앞에 있는 작은 산과 추읍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얼어붙은 흑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얼어붙은 흑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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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짜기 끝 즈음에서 벌목공사장이 나타났다. 벌목은 지난 가을까지 계속되었던 듯 제법 넓은 공터에 벌목 운반용 차량과 컨테이너 두 개가 놓여 있었지만 여전히 등산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근처 양지쪽에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다시 등산로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벌목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듯했다. 등산로를 찾지 못해 산행을 포기할까 하다가 벌목 차량들이 드나든 흔적이 있는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추읍산 7부능선 쯤에 어렴풋이 길이 있어 보인다.

그 길을 목표로 잡고 벌목으로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는 산을 막무가내로 올랐다. 다행이 산이 그리 험하지 않아 위험하진 않았다. 그렇게 허위허위 7부 능선쯤에 오르니 멀리서 바라보았던 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뭐람, 이 길도 등산로가 아니라 벌목길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높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들은 다시 같은 방법으로 길 없는 산을 계속 올라 추읍산 능선에 도달했다. 능선에는 희미하긴 했지만 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길은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능선을 넘어가는 길이 아닌가.

섬실고개, 이 고개에서 길을 잘 못들어 1시간을 헤맸다
 섬실고개, 이 고개에서 길을 잘 못들어 1시간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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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읍산 정상에 오른 일행 서상규, 서진석씨
 추읍산 정상에 오른 일행 서상규, 서진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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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단 길이 확실하게 보이는 산을 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올라올 때 길 없는 산을 넘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 조금 내려가자 등산로 4거리가 나타났다. 이정표도 세워져 있고 옆에는 작은 샘도 보였다. 질마재 약수터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그냥 내려갈까? 아니면 정상에 올랐다 내려갈까?"

이정표엔 정상 0.9km, 내리 원덕역 3.44km라고 적혀 있었다.

"정상까지 900미터밖에 안 남았는데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게 좋지 않겠어?"

일행 한 사람이 선뜻 앞장을 선다. 왕복 1시간 동안의 능선길 헛걸음에, 길 없는 추읍산을 오르느라 지쳐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랐는데 정상에 오르지 않고 내려갈 수는 없었다.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산길은 매우 가팔랐다. 곧 숨이 턱에 차오른다. 정상까지 900미터의 길이 왜 이리 멀기만 할까. 그렇게 헉헉거리며 한참을 걸어 헬기장에 당도했다. 헬기장 주변은 군 훈련장이었다. 헬기장을 지나자 곧 정상이다. 해발 583미터.

정상에서 바라본 개군면 일대와 향리 저수지
 정상에서 바라본 개군면 일대와 향리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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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툭 트인 시야가 시원했다.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용문 시가지가 손바닥만큼 좁아 보인다. 조금 멀리 양평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용문산의 우람한 산줄기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추읍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한 쪽을 날카로운 칼로 베어낸 듯한 모습이 용문산을 향해 읍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저마다 다른 사연이 깃든 세 개의 산 이름

추읍산의 또 다른 이름은 칠읍산, 정상에 올라 둘러보면 지평, 양근, 여주, 이천, 양주, 광주, 장호원 등 7개의 읍이 바라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양평읍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산 아래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예쁜 모습으로 바라보이는 저수지가 개군면 향리저수지다.

추읍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은 주읍리, 이 마을 이름과 함께 추읍산도 얼마 전까지는 주읍산이라 불렀다. 사연은 이랬다. 일제시절인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였다. 당시 일본인 주사급 관리가 추읍이라는 발음이 안 되어 주읍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 아직도 토지대장에는 주읍산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본래의 산 이름을 찾자고 해서 요즘은 추읍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정상에는 그 흔한 표지석도 세워져 있지 않고 바로 아래 송신탑과 함께 안내판 하나가 덩그렇다. 정상에서 주변조망을 하며 땀을 들인 후 곧 하산길로 나섰다. 하산길도 여간 가파른 길이 아니었다. 다행이 양지쪽이어서 눈이 모두 녹아 보송보송하여 미끄럽지 않았다.

거의 70도에 가까울 것 같은 산길을 내려서자 경사가 약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은 곧장 추읍산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삼성천으로 뻗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볼랫길 안내판이 다시 나타났다. 볼랫길은 역시 얼어붙은 개울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원덕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원덕역으로 가는 다리 끝에서 뒤돌아본 추읍산
 원덕역으로 가는 다리 끝에서 뒤돌아본 추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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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가게가 보이는구먼, 목이 컬컬해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야겠어. 겨우 500미터급 산행이 이렇게 힘들다니."

"볼랫길도 등산로도 이정표가 부실해서 우리들이 고생한 거야, 안내 표지판을 적절한 곳에 더 많이 세워야 되겠어."

일행들은 낮은 산이라고 얕보고 오른 산길에서 고생한 것이 조금은 억울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산행시간은 5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힘든 산행의 피로를 막걸리 몇 잔씩으로 해소한 일행들은 가뿐한 기분으로 서울행 전철에 올랐다.


태그:#추읍산, #볼랫길, #용문역, #이승철, #원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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