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꽁꽁 언 검은 강물 위로 내리는 함박눈

 

흰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함석지붕에 눈이 내립니다. 연필 깎는 소리처럼 사각사각 들려옵니다. 되새떼들이 대숲을 흔들며 날아갑니다. 함박 눈이 내려 산과 들과 강을 하얀 광목천으로 덮은 것 같습니다.

 

연이는 아까부터 펑펑 쏟아지는 눈에 지워지는 산길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버지는 탄광에서 늦을 모양입니다. 흰눈은 지우개처럼 마을의 집들을 자꾸 지워버립니다. 가르마처럼 좁은 길도 밭도랑을 끼고 도는 외길도 눈에 덮입니다. 또랑을 건너는 외나무 다리 밑으로 흐르는 탄광에서 내려오는 검은 강물도 꽁꽁 얼어서 함박눈에 덮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눈에 반사된 빛이 밀려오는 어둠을 힘껏 밀어내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눈을 밀가루처럼 뿌려 검은색뿐인 탄광촌을 온통 흰색으로 색칠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연이는 생각난 듯이 그제야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아랫목에 누운 아기를 들여다 봅니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자장가였나 봅니다. 새록새록 잠이 든 아기의 날개같은 작은 두 팔이 이불밖으로 나와 꿈틀거립니다. 연이는 아기의 팔을 포대기에 조심스레 넣어주고는 가만가만 아기가 깨지 않게 발뒷꿈치를 들고, 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쪽문을 밀고 부엌으로 나옵니다.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보물상자

 

부엌은 어둡고 낮습니다. 부엌의 천장은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은 연이에게 놀이방과 같은 곳입니다. 할머니랑 함께 살았을 때 할머니가 쓰시던 받짇고리며 경대며 대바구니 상자들이 쌓여 있습니다. 아버지가 버리고 싶어하는 것을 돌아가신 엄마가 깊이 간수해 온 것들입니다. 대바구니 상자안에는 연이의 돌잔치 사진이며, 떨어진 단추 따위 할머니가 쓰시던 골무며 비녀며 가락지 참빗 등이 들어있습니다.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보물상자같습니다. 연이는 심심하면 다락방에 올라가서 혼자 소꼽놀이를 합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밥그릇 세개와 국그릇 세개가 얹어진 시렁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습니다. 연이는 고드름 줄줄 매달린 시렁밑에서 쌀항아리를 열고 고개를 넣고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쌀이 바닥에 깔려 퍼내기가 힘이 듭니다. 다시 고개를 항아리 속으로 깊이 집어넣고 남은 쌀을 손바닥으로 빗질하여 양푼이에 옮겨 놓습니다. 물을 붓고 몇 번씩 씻은 후에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붙이려 합니다. 아궁이에는 아침에 다독여 놓은 불씨들이 별처럼 반짝입니다.

 

연이는 가물거리며 빛나는 불씨에다 호호 입김을 붑니다. 연이의 입김에 불씨들은 이글

거리는 작은 불꽃들이 꽃불이 됩니다. 마른 솔가지를 꽃불 위에 얹습니다. 꽃불들은 점점 많아지고 어두운 아궁이 속으로 꽃불들은 꽃뱀처럼 고개를 들이밀며 들어갑니다.

 

따뜻한 꽃불들은 방안을 데워줍니다. 연이는 부뚜막에 있는 무 한 개를 집어 채를 곱게 썰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가마솥에 넣습니다. 무죽이 맛있게 끓습니다. 쌀이 너무 작기도 하지만, 무죽은 달싹해서 아기가 잘 먹습니다. 무죽 끓이는 법은, 탄광마을 아주머니가 연이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엄마젖이 없는 아기에게 무죽은 엄마 젖입니다. 연이의 얼굴엔 검불이 가득 묻어 있습니다. 땀방울들은 얼굴에 묻은 검불들을 낙서하듯이 얼룩을 만들어 버립니다. 무죽이 끓는 소리와 솔가지를 피운 솔향이 부엌에 가득합니다.

 

아버지는 진폐증에 걸려도 일을 합니다

 

연이는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문득 아버지가 걱정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석탄을 캐면 정말 안 됩니다. 진폐증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의사선생님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아직도 탄광에서 석탄을 화차로 나르는 일을 합니다.

 

 

연이네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탄광 사무실 옆에 살았습니다. 연이는 그곳의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면 아버지는 탄광 사무실에 딸린 방에서 광부 아저씨들이랑 함께 주무십니다. 막장에서 일하시는 광부 아저씨들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쉬는 시간에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태웁니다. 

 

의사 선생님이 진폐증에는, 담배도 술도 다 안 좋다고 말씀했는데도,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연이는 어서 아버지가 빨리 집에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밤에 아기와 둘만 자는 것은 무섭습니다. 바람에 무섭게 우는 뒷뜰에 대숲소리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시퍼런 칼을 가는 소리처럼 들려 정말 싫습니다. 

 

연이는 아주 어릴 때 열병을 앓았는데, 그때 할머니가 댓가지로 연이의 몸을 발가벗겨 놓고 빗자루처럼 쓸어주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하면 열병이 씻은 듯 낫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할머니의 말씀처럼 열병은 나았지만, 연이는 대숲 소리가 무섭고 싫습니다.

 

연이 엄마는 아기를 낳은 얼마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탄광촌 의사선생님은 아버지에게 화를 냈습니다. 왜 병원에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고, 아기를 낳으면서, 엄마는 피를 많이 쏟았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기를 키울 사람이 없자, 아버지는 연이에게 힘없이 말했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학교에 다닐 수 없으니, 당분간 집에서 아기를 돌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연이는 종종 할머니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돌아가신 엄마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올지도...

 

연이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엄마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올꺼라고 믿습니다. 이제 연이는 엄마가 하는 일들을 혼자 다 합니다. 물을 긷는 일, 빨래 씻는 일, 밥하는 일, 방청소 하는 일까지 바느질까지 잘 합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탄광 마을은 땔감 걱정이 없었지만, 얼마전 이사 온 산마을에는 연탄이 배달되지 않아서, 산마을 사람들은 솔가비나 나무 땔감으로 겨울을 납니다. 연이는 연탄 냄새보다, 솔향기 나는 솔가비 땔감이 좋습니다.

 

산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감자나 옥수수 따위를 심어서, 그 곡식으로 살아가는 화전민입니다. 탄광촌보다 깨끗해서 좋긴 합니다. 그러나 산마을 아이들은 연이만 보면 놀러댑니다. 검둥이 검둥이하며 놀려댑니다. 아주 듣기 싫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탄광에 일을 해서 얼굴이 까맣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아버지의 얼굴은 연이의 눈에도 검둥이 같습니다. 아무리 씻어도 하얗게 되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연이는 하얀 눈이 아버지의 얼굴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산마을 아이들이 연이를 검둥이라고 놀려 댈 때마다 거울을 들여다 봅니다. 거울 속의 연이의 얼굴은 눈이 부시게 하얗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산 마을 아이들은 연이보고, 검둥아 ! 검둥아 ! 하고 놀려댑니다. 

 

어느새 무죽이 다 끓었나 봅니다. 연이는 무죽을 그릇에 옮겨퍼서 가마솥을 씻고 그 안에 물을 다시 붓고 그릇 채 무죽을 넣어두고, 아기 먹을 무죽 그릇만 가지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프지만, 아버지와 저녁을 먹기 위해서 아직 아기에게만 무죽을 먹일 생각입니다.

 

방안에는 아기가 깨어서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방안은 온통 오줌과 아기 똥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연이는 한숨을 푹 쉽니다. 그래도 연이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매일 오줌싸고 똥을 싸는 것이, 아기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연이는 얼른 부엌으로 나가 따뜻한 물을 가지고와 아기를 씻깁니다. 그리고 무죽을 먹입니다. 아기는 세살이 되었는데도 걷지도 못하고 잘 앉지도 못합니다. 아기가 어서 자라야 연이는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통 자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산마을 아기들보다 키도 작고 세살인데도 걷지도 못하고 앉혀 놓아도, 인형처럼 힘없니 툭 옆으로 쓰러집니다.

 

그래서 연이는 아가가 더 가엽습니다. 무죽을 다 받아먹은 아기는 연이의 품에 안겨 새끈새끈 잠이 들었습니다. 연이는 아기가 깰까봐서 엄마처럼 조심스레 아기를 안고 같이 눕습니다. 연이의 뱃속에는 자꾸 귀뜨라미 한마리가 들어간 듯 찌르르 울어댑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우니 자꾸 졸음이 밀려옵니다.

 

아버지의 발소리를 기다리다 잠이 들다 

 

연이의 엷은 꿈 속으로 개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발자국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연이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쪽집게처럼 알아 맞춥니다. 크게 길을 끌고 오는 소리같으면, 아버지의 발소리입니다.

 

그러나 연이는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연이의 꿈속에는 하얀 구름 궁전 속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날개달린 옷을 입고 연이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연이는 아무리 뛰어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정말 답답한 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엄마 !하고 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안은 가물거리는 석유 등잔 하나가 등대처럼 방안의 어둠을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새근새근 아기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컹컹-멀리서 들려오던 개짓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습니다. 함박눈이 점점 가는 눈발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태그:#검은 땅, #소녀, #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