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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라좌수영 함대의 일원이 되어 혁혁한 전과를 올린 여도진을 방문했다. 여도진은 현 지명으로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소재한다.

 

지명상 고흥이지만 여수 화양면 이목과는 뱃길로 1시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다. 전라좌수영 수군의 주역이었던 5포 중 돌산에 소재한 방답진을 제외한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가 고흥반도에 위치하며 뱃길로 가깝다. 현재 계획 중인 연륙교가 완성되면 여수에서 고흥까지는 이삽심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여도진은 다른 진포와는 달리 진(鎭)의 포구가 북향하여 동·서·북이 바다로 둘러싸인 항구다. 마치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듯한 특이한 모양으로 '연화부수(蓮花浮水)'라 일컬어 왔다. 둥그런 성으로 둘러싸인 연꽃 모양의 성터를 연결하는 줄기 부분은 팔영산을 향하고 있다. 마을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으로 연결되는 남쪽 줄기 부분은 매립공사 전까지 만조 때 물이 넘나들기도 했다. 

 

남쪽에 팔영산을 등지고 북동쪽에 원주도,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내백일도 가까이 우모도, 동쪽에 항도로 에워싸인 천연의 양항이다. 뿐만 아니라 이웃한 사도진과 더불어 순천만일대의 바다를 지키던 군사 요충지였다.

 

본시 이곳은 여말 선초에 걸쳐 극심했던 왜구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라도 수군의 총본거지인 전라수군처치사 밑에 현 무안군 해제면에 소재한 전라우도 선박처와 나란히 전라좌도 선박처가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 여도는 해남에 있던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정점으로 전라좌도에 소속된 만호들을 거느렸던 전라좌도 수군의 총거점이었다. 이후 성종10년(1479)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설치될 때까지 왜구에 대비하는 큰 구실을 했던 곳이다.

 

임란이 일어나기 50여일 전인 임진 2월19일에 이순신 장군이 직접 점고를 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다. 임진 5월 제1차 좌수영함대 출동시에 여도권관 김인영은 서전인 옥포해전에서 좌척후장이 되어 우척후장인 사도첨사 김완함대와 더불어 적정을 탐지하고 신기전으로 보고했다.

 

여도진성의 축조연대는 성종16년(1485) 3월경부터 시작해 6년 후인 성종22년(1491)에 완성됐다. 둘레가 1320척(조선시대 1척은 31~32㎝), 샘이 1개소, 성의 높이가 15척이었다.

 

당시 모습으로는 성터 일부와 나루터만이 남아있고 과거의 버스정류장(초등학교윗쪽) 근처에 역대 만호들로 보이는 신공(申公) 김공(金公) 박공(朴公) 등의 선정비가 한군데 모여 있었다. 어촌계장 강공남씨에 의하면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동네사람들이 한 곳에 모아둔 것이라고 한다.

 

성문은 특이하게 남북 두 군데만 나있고 성내에는 동헌, 객사, 군기고, 장청 등의 관아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성터만이 여호리 북쪽에 잔존하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일제 때 2백여 호에 달했던 동네는 현재 107호이고 주민의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고기잡이가 주산업이던 주민들은 초등학교 뒤쪽에 여호간척지가 생기면서 농사도 짓고 있다. 강공남씨는 간척사업초기에 공사장 흙이 무너져(1970.1.4) 죽을 뻔했다. 일당 500원인데도 서로 먼저 참가하려고 새벽 1시에 차례를 섰고 당시 사고로 5명이 다쳤지만 강씨는 일주일 만에 깨어나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당시는 배고파서 쌀이 필요한 때라 간척에 찬성했죠. 고기 한발때(지게 위에 촘촘히 엮어 물건이 빠지지 않게 만든 운반기구) 지고가면 쌀 몇 되박 주던 시절입니다. 고기는 아주 흔했죠. 지금 생각하면 간척을 하지 않고 뻘밭을 그대로 뒀다면 돈 덩어리가 됐을 텐데…"

 

바다를 보니 항구 약 5백미터 전방에 방파제가 있다. 주민들은 2002년에 시작해 2007년에 완공된 방파제가 해류의 흐름을 바꿔 어패류 채취가 줄었다고 불만이다. 어획고가 줄어 항구에 있는 수협위판장도 폐쇄했다.

 

국가어항인 여호항 물양장은 5각형으로 되어 보기에 좋고 깨끗했지만 작은 태풍인 '나리'가 왔을 때 배를 피항시켰다고 한다. 직벽으로 쌓아올린 시멘트 구조물에 태풍과 함께 온 파도가 당구 치듯이 부딪쳐 배가 파선될까 두려워 다른 곳으로 피난시켰다는 것이다. 모래가 있으면 파도의 힘이 소멸된다는 주민들의 얘기다.

 

 

"왜 성을 다 허물어 버렸습니까?"

"성에 대한 가치를 모르니까 새마을사업하면서 성벽돌을 빼 담을 쌓거나 방파제로 사용했죠. 이제라도 성을 복원하고 어촌체험마을을 만들어 동네가 생기가 돌았으면 좋겠어요."

 

동네 어른들과 사적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집에 가면 오래된 비석이 하나 있는데 보겠냐"는 얘기를 들었다. 이장을 오래했다는 강기열(69)씨 댁을 방문해 벽에 거꾸로 쓰러져 있는 비를 바로 세워보니 여도진 만호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남해바다를 호령하고 일본군을 제압하던 인걸은 간 곳 없고 힘없는 노인들과 거꾸로 처박혀 동강난 비석과 무너진 성벽만 남았다. 돌아오는 발이 안 떨어짐은 왜일까?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여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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