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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새 1년. 지난해 말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지난 9일 장례도 치렀지만, 서울 곳곳에 아직 '용산'이 있다. 3년째 철거사업이 진행 중인 상도동의 눈 덮인 산동네에도, 밀어붙이기식 개발에 항의하며 주민이 자살한 마포구 용강동에도, 우여곡절 끝에 이주협상을 타결해 뿔뿔이 동네를 떠나는 왕십리에도 있다. <오마이뉴스>는 참사 1주기를 맞아 2009년 대중문화에 드러난 '재개발' 코드를 분석했다. [편집자말]
2009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 현장미술가들은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주변 레아 갤러리 밖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등 600개를 걸었다.
 2009년 마지막날인 12월 31일, 현장미술가들은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주변 레아 갤러리 밖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등 600개를 걸었다.
ⓒ 권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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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은 파주 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고, 양익준은 용역 깡패였다. 김강우는 온갖 모략으로 재개발사업을 밀어붙였고, 이준기는 철거민들의 현실을 취재했다. 유재석과 박명수는 철거촌 아파트를 배경으로 뛰어다녔다. YB밴드는 앨범 '공존'을 통해 철거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상업영화와 드라마·예능 등 방송 프로그램, 가요까지, 지난해 한국 대중문화예술에는 '철거'가 빠지지 않았다.

문학인들이 철거민들의 구술집을 내고, 사진작가들이 용산참사를 다룬 사진전을 열고, 미술가들이 남일당과 레아 현장을 설치미술 전시관으로 삼은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신기한 일은 아니다. 문화예술은 원래 사회현실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고, 철거문제는 70년대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나왔다.

그러나 지난해 특이한 점은 상업영화와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 대중문화에까지 철거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작품의 주요 소재로 또는 촬영 배경으로 재개발지역의 무너진 집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영화] 이충연 위원장, 왜 그런 일을 하세요?

우선 철거가 영화계에서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영화제를 개최해도 될 정도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씨네21>에서 "올해 일 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정리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고 '삶의 크기'다.

지난해 개봉한 상업영화 중 철거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온 영화는 <파주>다. 남자주인공인 김중식(이선균 분)이 파주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 나온다. 그에게 여주인공인 최은모(서우 분)가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던지는 질문이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올해의 대사로 회자되기도 했다.

대학물을 먹고 운동권으로 활동하다가 철거민운동을 하게 됐다는 '출신' 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현재 구치소에 있는 이충연 전 용산4구역철대위원장을 연상시킨다. 그는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영화 속의 답변은 "처음엔 멋져 보여서 시작했는데, 그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였고, 지금은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박찬옥 감독이 철거반대투쟁을 염두에 두고 이 시나리오를 쓴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도 영화를 만들던 도중에 터진 일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철거반대투쟁이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전에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주거는 기본적 인권'이라는 말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영화 <파주>의 여주인공 최은모(서우 분)는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 나오는 남자주인공인 김중식(이선균 분)에게 묻는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영화 <파주>의 여주인공 최은모(서우 분)는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 나오는 남자주인공인 김중식(이선균 분)에게 묻는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 TPS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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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까지 생각하면, '철거'는 아예 트렌드로 보인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독립 장편영화의 올해의 경향은 '88만원 세대와 철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용산참사를 직접 다룬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은평구 응암2동 철거상황을 기록한 <호수길> 등이 눈에 띈다. <사당동 더하기 22>는 사당동 철거민 가족의 4세대를 담았다. 무려 22년 동안이다. 조은 사회학과 교수가 카메라를 잡았다.

아직 개봉은 못 했지만 <특별시 사람들>은 타워팰리스 뒤 판자촌 구룡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재개발 소문이 돌면서 가족들은 갈등을 겪는다. 박철웅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의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은 현재진행형이다,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철거민이 아니라 용역깡패나 동네 양아치가 주인공이 되어 변두리의 구질구질 질긴 삶을 표현한 경우도 있다.

<똥파리>에서 주인공 상훈(양익준 분)은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낙타는 말했다>의 주영광(김낙형 분)은 어머니의 유산으로 재개발 예정 지역에 땅을 샀다. 재개발만 기다리면서 하루를 버티는데 사업이 물 건너갔다는 소문이 돈다.

[방송] 누리꾼들이 찾아낸 철거촌 <무한도전>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의 촬영장소였던 오쇠동 마을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의 촬영장소였던 오쇠동 마을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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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무한도전>이 시청률과 인기를 이용해서 현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의 만화를 만들었다. "버라이어티 프로를 통한 MBC의 교묘한 술책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무한도전>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장면은 '여드름 브레이크'. 인기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패러디했지만 개그맨들이 추격신을 찍으며 뛰어다닌 촬영지는 김포 오쇠동·연예인아파트·남산시민아파트 등 철거 지역이었다.

제작진은 이같은 배경에 대해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눈썰미 있는 누리꾼들은 <무한도전> 속 철거를 찾아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젝트의 우승상금 300만 원이 오쇠동 주민들이 받게 되는 이주비와 같은 액수라는 것도 재개발코드로 해석했다.

김태호 PD는 당시 "처음부터 메시지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아이템을 정하고 현장을 답사하다가 촬영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해석은 온전히 시청자의 몫으로 남겼다.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는 "과민반응이 좀 있었는데 목적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당시 큰 이슈 중 하나였고 대중들이 관심있는 것은 저희도 관심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성을 강조한 드라마에서도 철거 장면을 찾을 수 있다.

MBC 드라마 <히어로>의 한 장면을 보자. 재벌이 조합원들에게 뇌물을 써서 경쟁업체를 탈락시키고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에서 주민들을 협박한다. 결국 한 철거민이 용역업체 직원에 시달리다가 자살한다. 그의 아들은 기자 진도혁(이준기 분)을 만나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재벌회사에서 폭력을 썼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KBS 드라마 <남자이야기>도 정면으로 재개발을 다뤘다.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은 주민들이 없는 사이 집을 부수고 노인과 학생들을 잡아간다. 여기서도 재벌 2세 채도우(김강우 분)는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갖은 술수를 부리고 신문사 편집국의 관련 기사를 삭제하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철거촌은 가상의 지역인 '명도시'에 있다. 유명한 도시인지 명도소송이 이어지는 시(市)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모로 보나 이 시대 서울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가요] 참으로 평범한 사람의 깃발

YB밴드의 8집 '공존'에 대해 가수 윤도현씨는 "2009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YB밴드의 8집 '공존'에 대해 가수 윤도현씨는 "2009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 YB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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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가 아닌 대중가요에도 용산은 빠지지 않았다.

YB밴드의 8집 '공존(共存)'은 철거민 문제와 청년 실업 등 다양한 사회 현실을 노래했는데, 이 중 철거민을 다룬 '깃발'은 '힘없는 자들의 아우성 속에서 들끓는 나의 뜨거운 피를 느꼈다, 고맙다 형제들이여, 깃발을 들어라, 승리를 위하여'라는 비장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윤도현씨는 이같은 8집에 대해 "2009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하고 싶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깃발'은 참사가 일어나기 전 곡의 80%를 만들었다가, 참사 이틀 뒤 바리케이드로 막힌 남일당 건물 근처에 머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지난해 아이돌 스타들을 제치고 2주간 음반 판매량 1위를 차지했던 루시드 폴의 4집 <레미제라블>에는 '평범한 사람'이 귀에 들어온다. 지극히 서정적인 가락에 담긴 가사는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하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중략)…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연극] 배우들은 망루에서 뛰어내렸네

최근 막을 올린 연극 <리스트>는 용산참사 1주기 기념 문화프로그램의 하나로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의 협력을 받았다. 용산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을 관객들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위해 "강제철거 현장에서 할아버지를 잃고 철거용역 깡패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자의 복수 과정"을 그렸다.

<야메의사>에서는 용산 철거민을 연상시키는 다섯 배우가 누더기 차림으로 무대를 떠돌며 "이승이든 저승이든 가게 해달라"고 부르짖으며 쓰러진다. 이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배우들은 남일당 현장을 참배했다.

아예 '용산'이 제목으로 들어간 연극도 있다. 지난해 9월 공연된 <용산, 의자들>은 용산 망루에 오른 50대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현대 부조리극으로 유명한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을 각색한 터라 다소 난해하지만, 이 작품이 고발하고 싶은 부조리는 명확하게 용산 참사다. "작품의 주제가 고립과 소외인데 용산참사 망루가 떠올랐다, 연극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연출가 기국서씨의 설명이다.

[SF] 분명히 외국영화인데, 왜 자꾸 한국 같지?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는 공무원이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고 외계인 세입자를 찾아가 일방적인 퇴거명령을 내린다.
 영화 <디스트릭트 9>에서는 공무원이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고 외계인 세입자를 찾아가 일방적인 퇴거명령을 내린다.
ⓒ 소니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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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재개발이나 철거가 나오기 어려운 SF에서도 용산을 읽을 수 있다. 영화 <아바타>나 <디스트릭스9>이 대표적이다.

<아바타>에서는 판도라 행성을 탐험하던 기업이 원주민 나비족을 강제로 쫓아내고 값비싼 에너지원 언옵타늄을 파내려 한다. 이 철거 과정에서 불도저와 전투기, 기관총이 등장한다. <디스트릭트 9>에서는 공무원이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고 외계인 세입자를 찾아가 일방적인 퇴거명령을 내린다.

물론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나 <디스트릭트9>의 닐 블롬캠프 감독이 한국 재개발 상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한국의 관객들은 이 영화들에서 용산참사를 떠올렸다. 인간에게 강제이주 당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이 용산 유가족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배명훈씨의 첫 소설집 <타워>는 지상 최대 빌딩이자 도시국가인 빈스토크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곳에서도 재개발 구역 주민들이 죽어나간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요즘이 작가로서는 역설적으로 좋은 때"라고 말했다. 현 정권이 무한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뮤즈'와 같다는 것이다.


태그:#용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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