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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단락된 용산참사와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는 여러 모로 닮았다. 우선, 먹고 살 길이 끊긴 가난한 이들이 자신들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철거민은 상가 옥상으로, 노동자는 공장 굴뚝과 지붕 위로.

그곳을 최후 보루 삼아 자신을 삶터에서 내쫓으려는 이들과 싸웠다. 마지막 순간에는 양쪽 모두 컨테이너 박스에 태워진 경찰 특공대가 투입됐다. 용산에서는 철거민과 경찰 등 6명이 죽었고, 평택에서는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자살과 뇌출혈 등으로 6명 사망했다.

다른 게 있다면 용산참사는 가장 추운 한 겨울에 벌어졌고, 쌍용차 사태는 가장 더운 7월과 8월에 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다시 "쌍용차에서 제2의 용산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로 메워지곤 했다.

어쨌든, 두 사태는 이 땅에서 가진 건 몸뚱이 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닮은 꼴 용산 참사와 쌍용 자동차 사태

2009년 8월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사측직원들이 농성 노동자들을 향해 새총을 발사하고 있다.
▲ 새총 쏘는 쌍용차 사측 직원 2009년 8월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사측직원들이 농성 노동자들을 향해 새총을 발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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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는 거의 1년 만에 일단락됐다. 그렇다면 이제 겨우(?) 6개월 지난 쌍용차 사태는 어떻게 됐을까. 정답은 '아직 진행중'이다. 77일간의 옥쇄 파업만 끝났을 뿐 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은 여전히 법정과 공장 밖에서 싸우고 있다.

77일간의 파업을 마지막으로 접던 지난 2009년 8월 6일. 당시 한상균 쌍용차 노조위원장은 끝까지 함께 싸운 '동지'들을 모두 안아줬다. 마지막 동지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을 때, 한 위원장과 노조 집행부는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집이 아닌 유치장으로 직행한 한 위원장과 집행부의 근황이 궁금했다.

11일 오후 수원지법 평택지원 23호 법정 제1형사부(재판장 오준근)에서 작년 여름 옥쇄파업을 벌인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 등으로 구속 기소된 한 지부장 등 쌍용차 노조 관계자 22명에 대한 4차 공판이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피고인들을 상대로 약 4시간 넘게 신문을 진행했다.

쟁점은 노조의 '다연발 화포'의 사용 여부, 화염병과 쇠파이프 등 시위용품을 누구의 지시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이었다. 그리고 변호인단은 노조의 저항은 국가폭력에 대한 맞대응이었다는 점을 동영상 자료를 통해 입증하려 노력했다.

한상균 전 노조위원장은 "다연발 화포는 저항을 하는 우리의 결의와 대화 의지를 위해 제작한 일종의 '시각용 퍼포먼스'였을 뿐이지 경찰이나 용역 직원들을 향해 발사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사진을 보여주며 "다연발 화포에서 연기가 나는 등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추궁했으나, 한 위원장은 "위험 물질을 넣지 않고 시험용으로 사용해 본 적은 있지만, 사람을 향해 쏜 일은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한 위원장은 노조의 파업 결정과 화염병, 쇠파이프 등 시위용품 사용에 대해 "모든 결정은 조직의 위임을 받아 내가 직접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다연발 화포 둘러싼 공방... 투쟁 동영상에 눈물도

2009년 8월 6일 저녁 7시 쌍용자동차 노사 합의가 이뤄진 후 농성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도장공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한상균 지부장이 77일간 함께 농성을 벌인 조합원들과 일일이 악수한 후 떠나는 조합원과 포옹을 하고 있다.
 2009년 8월 6일 저녁 7시 쌍용자동차 노사 합의가 이뤄진 후 농성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도장공장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한상균 지부장이 77일간 함께 농성을 벌인 조합원들과 일일이 악수한 후 떠나는 조합원과 포옹을 하고 있다.
ⓒ 사진제공 <노동과 세계> 이명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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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단은 작년 6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촬영된 동영상 자료를 바탕으로 용역업체 직원들도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새총과 쇠파이프 등 무기를 사용했고, 경찰이 스티로폼 등도 녹이는 최루액을 투하하는 등 노조원들의 폭력을 유발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또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에게 "해고 이유와 근거를 알고 있느냐"고 물으며 사측의 부당 해고를 지적했다. 한 노조 관계자는 "나는 해고 직전에 우수 노동자로 뽑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는데, 해고를 당한 근거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한 노조 간부는 "나는 해고자가 아니었지만, 동료들의 직장과 가족을 지켜주고 싶어 파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렇게 하는 게 노조 간부의 당연한 책임이었다"고 말했다.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온 이종탁 산업노동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쌍용차는 꼭 구조조정을 했어야 했나'라는 제목의 프리젠테이션 문건을 통해 "쌍용차 사태는 투자도 하지 않고 기술도 개발하지 않은 채 기술만 빼간 대주주(상하이자동차)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심리가 이어지는 동안 법정에서는 탄식과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작년 옥쇄파업 기록이 담긴 동영상이 법정에서 틀어졌을 때 일부 노동자들이 눈물을 참지 못해 법정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이날 한 전 위원장은 수염이 길고 얼굴은 다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구속된 다른 노조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휴정시간에 법정을 찾은 가족들과 동료 노동자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주먹을 쥐어 보이기도 했다.

가족들 역시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나타냈다. 특히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 여러 명도 법정을 찾아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기도 했다. 일부 피고인들과 가족들은 가까이 다가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법원 쪽은 이들을 제지하긴 했지만, 매몰차게 가로막지는 않았다.

현재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대다수는 대리운전, 일용직 건설 노동자 등을 전전하고 있다. 또 약 30%는 특별한 수입 없이 약 110만 원의 실업급여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정리해고 특별위원회(정특위)'를 꾸려 원직 복직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영호 정특위 위원장은 "쌍용차 사태의 진정한 해결은 3000여 명에 이르는 해고자들이 다시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라며 "작년 한 해 동안에만 6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사망하는 등 모두들 최악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육대웅 변호사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은 이미 세상이 평가를 했고 앞으로 역사가 또 평가를 해줄 것"이라며 "지금은 최대한 노조원들의 형량을 줄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는 18일에는 5차 심리와 검찰의 구형이 진행된다. 법원은 이달 안으로 재판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용산 사태는 발생한 지 거의 1년 만에 희생자들이 흙으로 돌아갔다. 이제 '겨우' 6개월 지난 쌍용차 사태. 다시 6개월이 지나면 해고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태그:#쌍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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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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