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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을 앞두고 옛 기무사터에서 열린 신호탄전, 전수천의 방에 그녀가 있었다. 초겨울의 쌀쌀함과 어두운 실내, 기무사라는 공간이 주는 묘한 긴장감에 압도되어 아직 작품에 몰입하지 못했던 일행에게 서정순씨의 따뜻한 안내는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전시장에서 주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안하고 설명하기 위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관계자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 쪽 방에도 작품이 있어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이리 와서 봐요, 사령관이 쓰던 침실이 그대로 있어요. 이건 전에 군인들이 밥을 해 먹던 솥이었다네요. 참 재밌죠."

즐겁게 얘기해 주던 그녀를 만난 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고 얘기하고 사진을 찍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다른 여러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 명찰을 달고 있던 그녀를 다시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녀의 특별함은 더욱 커졌다. 38년생 서정순씨는 서울시의 자원 봉사 시스템을 모두 체험했을 만큼 오래고 다양한 자원 봉사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일주일에 하루 이상 쉬는 날이 드물 정도로 촘촘히 짜여진 자원 봉사 스케줄로 삶을 채워 간다.

미술은 그녀에게 30년 자원 봉사 끝에 우연히 만난 선물 같은 것이었다. 아래는 지난 11월 말과 12월 초 서정순씨를 만나 인터뷰 한 것이다.

"자원 봉사 30년, 고마워서 시작했어요."

저는 80년대부터 자원봉사를 했어요. 생활이 빠듯한데 애들 다섯을 키우느라 힘들었죠. 그런데 막내가 중학생인가 고등학생 때 새마을 부녀회에서 장학금을 주는 거야.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마을 체육 대회나 청소할 일 있으면 무조건 나가서 열심히 했어요. 자원봉사라기보다는, 받았으니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네 일부터 시작한거죠.

그때는 시에서 보조금도 전혀 안 나와서 동네마다 자체적으로 미역도 팔고 기름도 팔고 액젓 장사도 하고, 자기들 회비 내서 그 돈으로 밥을 사먹었어요. 내가 부녀회장을 할 때도 그렇게 해서 동네에 천 만원을 만들고 그 이자 나오는 걸로 장학금을 주게 했어요. 짠순이라고 구박 받으면서도 내가 돈을 뭉쳐 놓으면 누군가 또 장학금을 받을 거 아니야. 내가 받은 게 있으니까 난 그러고 싶었어요.

머릿돌에 '서정순'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바르게 살기 조형물 머릿돌에 '서정순'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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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자원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올림픽이에요. 거리질서 지키기라고 길에 있는 껌 떼는 것도 하고, 마침 부녀회 총무를 맡고 있어서 부녀들 동원해서 광화문 안내 봉사도 했어요. 그 다음이 월드컵이죠, 상암에 가서 작품 관리를 좀 했어요. 그리고 서울시에 자원봉사 센터가 설치가 된 뒤로는 거기 소속 되어 활동하게 된거죠. 서울시에서 하는 청계천이나 잔디 광장, 어린이 곤충 교실도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원봉사를 했어요.

동네 지역에 대한 봉사도 계속 했는데 바르게 살기 의원직을 끝으로 손을 뗀 지 이제 3년쯤 됐지. 종각에 있는 삼성 건물, 그 앞에 바르게 살기 조형물이 있어요. 바르게 살자고 큰 돌에 새겨 놓은 건데 삼청동 위원장 이름으로 내 이름이 딱 찍혀있어요. 마침 내가 임기할 때 얘기가 돼서 서로 돈 조금씩 걷어서 그걸 만들었거든. 요즘도 일주일에 세 번씩 종각역 자원 봉사 때문에 거길 지나다니면서 남들은 몰라줘도 혼자 흐뭇해 하죠.

"이제는 내가 할 일이 없죠... 자원 봉사 하면서 살아요"

아빠(남편)가 부자유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가내 수공업을 해가면서 아이들을 키웠어요. 결혼하고 11년 동안은 애 다섯 낳고 대문 밖에도 잘 안 나갔는데 배가 고파서 어느 날 뛰쳐 나온 거지. 내가 바깥 일을 보기 시작한 거예요. 손재주가 좀 있어서 학교에서 학생들 수예 하는 나무 수틀, 책꽂이 신문꽂이 같은 것을 집에서 만들어서 학교로 납품했어요.

그렇게 애들을 다 대학까지 보내서 지금 세 명은 초등학교 선생님, 둘째는 개인 사업을 하고 막내는 삼성에 다녀요. 손자 손녀까지 봐주고 나니 내가 할 일이 없어요. 이제 애들은 다 괜찮게 사는데 지들 자식 공부가 제일 쩔쩔매는 일이지 뭐.

지금은 나 혼자 지낸 지 10년 좀 넘었는데 힘들다가도 자원 봉사 나갈 시간이면 벌떡 일어나져요. 애들도 좋아하죠. 엄마가 일거리를 찾으니까 일단 저희들한테 안 매달리잖아. 자원 봉사를 하면 점심카드가 나오거나 식사비, 교통비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당당하게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내 생활하니까 너무 좋아요. 이렇게 즐겁게 살아요.

쉬는 날을 안 만들고 가능하면 많이 나가려고 해요. 현재는 화, 목, 토 오전에 종각 지하철 역에 나가고, 용산 중앙박물관, 과천 현대미술관, 신호탄 전시까지 부지런히 다니죠. 나는 뭘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게 신조거든. 시간 꼭 지키고. 우리 애들하고 약속 해도 1분만 늦으면 난 그냥 떠버려요.

매주 화, 목, 토요일 오전에는 종각역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 종각역 봉사하는 서정순씨의 모습 매주 화, 목, 토요일 오전에는 종각역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 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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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에 만난 이 좋은 세계, 미술관"

요즘은 종각역 나가는거 말고는 미술관, 박물관으로 매일 다니며 내 생활을 하는 거예요. 이 좋은 세계를 내가 이제 들어온 거야. 이건 그냥 자원 봉사라고 생각이 안되고 완전히 내가 모르는 거, 너무 즐거운 거야. 작품을 봐도 즐겁고 관객들 보는 것도 즐겁고, 작품들도 그냥 보이지 않아요. 볼 때마다 다르고 좋아요.

미술 쪽으로 자원 봉사를 해야겠다고 특별히 정했던건 아니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용산 중앙박물관 개관하고 나서 쭉 거기 등록해서 기획 전시실에서 일하게 되고, 3년 전부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도 나가고 있어요. 매주 중앙박물관에 한 번, 현대미술관에는 두 번 정도 나가요. 현대미술관은 금년이 3년차 되니까, 이제 오지 말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명찰이 나왔어. 1년 더 할 수 있겠구나, 감사하고 반갑죠. 이것도 지원자가 많으니까 이왕이면 젊은 사람 하는 게 더 곱잖아. 그러니 내가 스스로 뚫고 들어가야지. 내가 제일 고령이거든, 어딜 가도 그래요. 중앙박물관은 돈을 안 줘서 그런지 자기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면 돼서 좋아요. 다른 데는 점심값이랑 교통비 몇 천원은 주거든. 

이번에 여기에 미술관을 짓는다고 신호탄 전시를 하니까, 얼마나 가깝고 좋겠어요. 두 시간 걸려도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데 여긴 걸어서 20분도 안 걸려요. 마침 중앙박물관이 지금 잉카 문명 전시 준비 중이라 안 나가도 돼서, 남는 시간 무조건 다 할 수 있다고 신청해서 여길 자주 나와요. 여기 기무사 건물이 2012년에 미술관으로 완성된다는데, 그때는 할 수 있을까? 내 나이 묻지마(38년생), 나는 너무 하고 싶은데 안 불러 줄까봐, 그만 오라고 할까봐. 그땐 집 가까우니까 구경은 올 수 있겠지...

"삼청동에 살았지만 기무사는 몰랐어요"

삼청동이 제가 시집온 동네예요. 종로5가 8번지에서 태어나서 삼청동 23번지로 시집을 왔지. 남편은 삼청동에서 6대째 사는 집이었어요. 계속 이 근처에서 살았고, 그 동안 이 일 저 일 하면서 종로 바닥을 누비다시피 했죠. 전에 텔레비전에서 촬영도 해가더라구. 삼청동에서 오래된 집이라고.

따로 시간을 내서 전시를 보러 가진 못하고 삼청동에 갤러리들이 많으니까 오다가다 구경을 해요. 그림을 보면 전과 달리 보이고 그렇게 반가워요. 그동안 미술관 박물관 자원봉사를 해서 이제는 미술이 다정하게 느껴지지. 그냥 지나치려면 아까워요.

수십 년을 여기 살고 지나다니면서도 여기 기무사 건물을 전부 병원으로 알았어요. 우리 막내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병원에서 군생활을 했는데도 이 건물이 기무사라는 걸 몰랐어요. 옛날 정권 때에는 동네 사람들도 조용히 뒷골목으로 다니고 그랬어도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는 몰랐다니까.

기무사가 이렇게 미술작품과 함께 공개되니까 나부터가 너무 흥미가 있죠. 여기가 이런 곳이었구나 이제야 보는 거예요. 또 작가들이 단순히 자기 작품만 갖다 놓은 게 아니라 궁리를 해서 원래 공간에 대한 내용으로 표현을 했어. 무섭고 으스스한 작품도 있고. 여기 전시 보러 오시는 분 중에도 기무사라는 공간이 궁금해서 보러 오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38년생 서정순씨는 일주일에 3~4씩 신호탄展 자원봉사를 했다.
▲ 서정순씨 38년생 서정순씨는 일주일에 3~4씩 신호탄展 자원봉사를 했다.
ⓒ 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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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탄展, 어찌나 재밌는지 입을 못 다물어요."

중앙 박물관에 있던 버릇대로 관객이 오면 자꾸 설명을 하고 싶어서 큰일이에요. 거기선 우리도 자료 가지고 다 배우고 설명도 하거든. 페르시아 전시 할 때도 자료 가져다 놓고 미리 공부 열심히 했어요. 큰 딸이 인터넷으로 자료를 뽑아 주면 나는 나이가 많으니까 못해도 무조건 더 열심히 하는 거지. 자원 봉사하면서 내가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쟁쟁하신 분들이 하는 것도 보고 노력해서 이제는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겠다,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전시가 끝나더라구.

신호탄 전시 자원 봉사자는 설명에 대한 허용이 안되어 있어요 원래 도슨트가 따로 있어서 우리는 작품이 훼손되지 않게 관리만 하면 되는 거죠. 사진 찍으면 안되는건 안된다고 하고. 그런데 사람들한테 내가 아는 걸 막 알리고 싶고,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오디오 가이드를 가져오신 분은 설명 안 해도 되지만 그냥 오신 분한테는 자꾸 설명을 하고 싶어요. 우리 같은 연령대, 아직 미술관에 익숙치 않은 분들 오시면 이건 이렇다고 얘기해 드리면 좋잖아요. 전수천 방에서 그 밥솥, 그게 기무사 사람들이 밥 해먹던 밥솥이라는거 알고 가시는 분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 밥솥 중에, 오른쪽에 있는 것은 설경 같이 보이고 그 옆에 하나는 제주도 유채꽃 같아요. 그걸 작가님 의도대로 알고 느끼고 가면 얼마나 재밌겠어요.

자원 봉사자들 담당 위치가 매일 바뀌어서 그게 참 좋아요. 두루두루 다 볼 수 있잖아. 나도 신기하니까 작품을 보다가 오디오북 듣는 관람객한테 물어보기도 해요. 뭐라고 하냐고. 그럼 그 사람도 나한테 설명해 주려고 더 열심히 듣는 거예요. 그리고 도슨트가 사람들 데리고 설명할 때면 나도 열심히 듣죠. 들으면 얼마나 재밌는지, 그 다음에 관람객이 들어오면 내가 입을 못 다물지. 어떻게 느끼냐고 물어봐요, 내가. 그리고 쑥스러워 하면 내가 설명을 해준다고.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공감하는 거 보면 너무 즐거워요.

그런데 자꾸 그러다가 지적을 받아요. 작품 얘기 안하셔도 돼요, 작품관리만 하시면 돼요, 하고 말이죠. 그럼 또 얼마 동안은 가만히 있어요. 나는 순종파거든. 자원 봉사자는 지시에 따라야 되는 사람이니까.

한 달에 한번씩 만나는 내 친구들은 내가 자원 봉사 안하는 날 끌고 와서 내 나름대로 설명을 쫙 해줬죠. 그냥 지나가면 모르고 갈 테니까 내가 얘기해주면 어머 그러냐고 좋아하지.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수준에는 거기 맞게 얘길 해줘야지 거창한 얘기는 안먹히는 수가 많아. 뭐든지 하나라도 알고 가면 흥미를 느끼는데 아무것도 건진게 없이 그냥 가면 재미 없지. 난 여기 있는 작품, 정말 하나 하나 전부 다 좋아요.

"현대미술, 이런게 창작이구나 싶고 생동감 있고 기발하죠"

그동안 현대미술을 많이는 못 봤어요. 중앙박물관이랑 현대미술관 작품을 주로 보다가 여기 작품 보니 너무 화사한 거예요. 이런게 창작이구나 싶고 생동감 있고 기발하죠. 현대미술관에는 평면적인 미술, 동양적인 미술이 많지. 무게감도 좀 있고. 그런데 현대미술관 작품들이 여기 신호탄 전시에도 많이 와있는걸 보니 반갑기도 해요.

그린 사람의 속 마음을 표현한 그림도 있고, 사실대로 똑같이 잘 그린 작품도 있죠. 지금은 옛날과 달리 삼면, 사면을 다 보면서 생동감 있게 표현을 하더라구요. 예전의 작품들은 좀 딱딱한 느낌이 나는 대신 깊은 맛이 있지만, 젊은 사람들 작품은 아무래도 그 때 우리의 세상하고 지금이 다르니까 밝고 화려하고 광대한 느낌이 들어요.

미술 작품이란 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 다른 것 같아요. 작가님은 작가님 의향이 있겠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게 다 다르잖아. 어떤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보고 이해를 못하겠다고 작가들이 정신병자 같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공들여서 자기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떤 작품이 되게 어둡고 철로에 남자가 옷을 다 벗고 있는데, 계속 바라보니까 내가 보기에는 철로에 있는 남자는 너무 힘들 때 자기 힘든 표현을 한거고 또 저 쪽에 성당이 있는데 그건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낸 것을 말하는 것 같더라구요. 정답은 아니고 그냥 내 느낌대로 얘기해 보면, 그 작가의 심리를 내가 나름대로 느끼는거지.

우리가 사는 생활도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게 돼 있고, 강약은 있겠지만 어느 누구나 다 같을 거에요. 저 사람도 저렇게 힘들고 죽고 싶은 심정으로 그렸구나, 그럼 또 뭘로 그렸나 알고 싶고, 내 생각이 맞나도 알고 싶고.. 그래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30년 동안 모은 자원봉사자 명찰들은 그녀의 보람된 자산이다.
▲ 서정순씨의 이름표들 30년 동안 모은 자원봉사자 명찰들은 그녀의 보람된 자산이다.
ⓒ 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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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러 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계속 하고 싶어요"

그동안 그렇게 여기저기 다녔으니 70이 넘어도 지탱하고 있죠. 노동의 대가로 건강을 얻은 거라고 생각해요. 건강할 때까지 자원봉사 하고 그만 오라고 하면 나 혼자 그림 같은 거 그리고 싶어요. 아이들 학교 다닐 때 집에서 미술 그리면 내가 옆에서 메꿔 주고 그렇게 같이 해주는 거 참 재밌었어요. 불조심 포스터도 하고 이런 저런 숙제가 많았는데, 손주들 보면 요즘 초등학교는 그런 것도 잘 없나봐요. 

얼마 전에는 애들 따라서 민화를 좀 배운 적도 있는데 염료가 비싸요. 수강료도 좀 비싸고. 사실 그거 배울 때 보다 미술관 자원 봉사 하면서 미술에 도취돼 버린 거죠. 그러니 나 불러 줄 때까지는 언제까지라도 미술관 자원 봉사를 계속 하고 싶어요. 얼마나 좋아요.

Epilogue

결국 그녀의 특별함은 작품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포용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인터뷰 중간에 혼자 온 관람객의 요청에 따라 사진을 찍어 주던 그녀는 아쉬운게 있는지 "다시, 다시 한 번 찍어 볼께요!" 를 외치며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는 "이번엔 제대로 나왔을까?" 하며 그 청년과 함께 사진을 확인한 후에야 "오케이, 됐죠?" 하며 기분 좋게 카메라를 건넨다. "이렇게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말을 걸어주면 너무 좋아요. 내가 뭔가 도움이 되는 것 같잖아"라는 그녀에게서 아이 같이 밝은 미소를 보았다.

70 이후의 삶이 무료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우리에게 미술이 있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까페 '아티스트팬클럽' (cafe.naver.com/artistfanclub)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미술, #자원봉사,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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