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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문제는 극적인 협상 타결로 일단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그러나 용산의 철거 지역은 1년 전 참사가 벌어진 한강로 일대만은 아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마지막 미사가 열리는 6일 저녁, 용산구청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신계동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신계 철대위) 소속 철거민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구청 앞에는 천막은 보이지 않고 컨테이너 박스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신계동 철거민들은 천막에서 쫓겨나 작은 봉고차 안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강정희 신계 철대위원장과 이 지역 철거민 김영자(61)씨가 앉아 있었다. 김씨는 "처음엔 구청 직원들이, 그 다음에는 재개발조합 사람들이 천막을 철거했다"면서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됐는데 나중에는 아예 (천막을) 못 만들게 그 자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뒀다"고 설명했다.

'봉고차 농성'이라서 천막보다 편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차 안쪽은 잡동사니와 이불 탓에 몹시 좁았고, 창문엔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었다. 이날 기온은 영하 13도. 철거민들은 난로 대신 플라스틱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천막조차 칠 수 없어 봉고차 농성

김주환 전 위원장이 구속 수감된 지금, 신계동 철대위는 사실상 두 명이었다. 왼쪽이 강정희(43) 위원장, 오른쪽이 김영자(61) 할머니.
 김주환 전 위원장이 구속 수감된 지금, 신계동 철대위는 사실상 두 명이었다. 왼쪽이 강정희(43) 위원장, 오른쪽이 김영자(61) 할머니.
ⓒ 허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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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실질적으로 지역에 남아서 투쟁 중인 신계동 철거민은 이 두 사람뿐이다. 지난해 이맘 때까지 신계 철대위원장이었던 김주환(46)씨는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함께 망루에 올랐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혐의로 구속되어 6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 뒤 강정희씨가 위원장을 맡았다.

감기에 걸린 강 위원장은 이날도 병원에 갔다 기자를 만나기 위해 봉고차로 돌아왔고, 인터뷰 도중에도 여러 번 마른 기침을 했다. 외롭고 추운 이들의 투쟁은 벌써 햇수로 3년째다.

남일당 분향소와 용산구청은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다. 강정희 위원장과 김영자씨는 주로 이 두 곳의 농성장을 오가면서 크고 작은 철거민집회 현장에 나가고 있다. 이날 오후에도 남일당에서 다른 지역 철거민들을 만난 뒤 봉고차로 돌아왔다.

용산4구역 철거민은 주로 상가 세입자들이고 두 사람은 주거 세입자지만, 두 지역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보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버티다가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위협을 당했고, 임시·임대 주거시설(상가 세입자의 경우 임시·임대상가)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강정희 위원장은 "결혼 전 아가씨 때부터 2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용산은 내게 제 2의 고향"이라고 강조했다. IMF 위기 이후 휘청휘청 하던 식당이 결국 문을 닫으면서 집값이 싼 동네를 찾아 그의 가족은 2004년 다시 신계동으로 이사왔다. 낙후된 지역이고 판자촌이 많아 다른 곳보다 집값이 훨씬 쌌던 것이다.

신계동으로 들어오면서 강 위원장은 원래 3500만원이던 전세금을 대폭 깎아 500만원으로 하는 대신 집 수리비를 떠안았다고 했다. 재개발 소문이 심심찮게 나왔지만, 예전부터 있던 이야기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수리비가 1200만원 들었지만 다른 곳 전세나 월세보다는 낫다 싶었다.

그러나 2008년 봄부터 신계동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 위원장은  다급한 마음에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을 찾아갔고,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가 보상을 요구하고 나서자 재개발조합은 세입자들을 '해당자'와 '비해당자'로 분류했다. 지역에 산 지 5년이 지나면 보상을 받는 '해당자'였고, 5년에서 한 달이라도 모자라면 한 푼 보상받지 못하는 '비해당자'였다.

해당자와 비해당자 세입자 간에 갈등의 골도 깊어졌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라 모이기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해당자들이 빠져나가면서 세입자대책위는 와해됐다. 남은 세입자들끼리 다시 철거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비해당자'인 강정희 위원장은 지역에 남았다.

"당장 보증금 꼴랑 500만원 가지고 어딜 가냐고요. 여기 집값이 폭등해서 월세를 살아도 50만~60만원을 내야 할 지경이었어요. 아무도 이주대책을 세워 주지 않으니까 전철연에 다시 갔죠." 

"네 딸 조심하라"던 용역업체 직원... 흩어진 가족들

용산구청 앞에 재개발조합 측이 천막 대신 가져다 놓았다는 컨테이너 박스. 신계동 철대위는 원래 이 자리에 천막을 짓고 농성했다고 한다.
 용산구청 앞에 재개발조합 측이 천막 대신 가져다 놓았다는 컨테이너 박스. 신계동 철대위는 원래 이 자리에 천막을 짓고 농성했다고 한다.
ⓒ 허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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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희 위원장은 "재개발조합이 사업시행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용역부터 풀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용역'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치를 떨었고, "용역 깡패는 공포 그 자체"라고 말했다.

강 위원장은 심지어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네 딸 조심하라"는 식의 협박도 당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재 강 위원장네 식구는 이산가족이 됐다. 아들은 시골 할머니 집에, 딸은 외할머니 집에 있고, 남편은 전자상가에서 장사를 한다.

결국 세입자대책위를 구성했던 30여명의 주민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나마 전철연 소속으로 세입자대책위에서 활동하던 '해당자'들은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전에 미리 용역의 행패에 겁을 먹은 세입자들은 빈손으로 떠났다.

강 위원장은 끝까지 이주를 하지 않고 버텼지만, 집을 비운 사이 용역업체 직원들이 집기들을 몽땅 치우고 집을 철거했다. 그는 이 때 없어진 아이들 교복이 어디 있는지 아직까지 모른다고 한탄했다. 이주를 거부했기 때문에 보증금 500만 원도 돌려받지 못했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걸 요구해요. 이거 공사 끝날 때까지 임시 주거시설 해달라. 짓고 나면 임대아파트 달라. 이게 우리 기본적 요구사항이에요. 살 곳이 없으니까 살 곳을 달라는 거죠."

그는 법을 믿지 못했다. 그에게 닥친 모든 폭력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고, 헌법이 보장하는 주거권과 생존권이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사법부에 대해서도 "썩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용산참사 1심 재판 때 방청성에서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의미로 X자가 그려진 마스크를 하고 있다가 법정모독죄로 감치되었다.

용산참사 이야기를 하면서 강정희 위원장은 목소리가 높아졌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갔는데 하루 만에 특공대를 투입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망루투쟁을 하게 만든다"며 "정부가 세입자에게 주거권·생존권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제2, 제3, 제4의 용산참사는 계속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일부 보수신문이 "용산참사는 전철연의 개입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데에도 할 말이 많았다.

"내 권리를 국가는 알려주지 않아요. 그래서 전철연에 가입하게 된 거예요. 전철연은 철거민들이 모여만든 단체니까 내가 바로 전철연이에요. 다 철거 현장에서 고통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내가 내 발로 찾아가 가입을 했던 거죠. (전철연이) 폭력성을 띤다고 하잖아요. 피부로 느끼지도 당해보지도 않고서 말해요. '똑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싶어요."

이 편한 세상 앞, 철거민에겐 불편한 세상

강정희 위원장과 김영자 할머니가 생활하고 있는 봉고차.
 강정희 위원장과 김영자 할머니가 생활하고 있는 봉고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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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뿐인 대책위에서 강정희 위원장은 연대투쟁을 다니고 김영자씨는 매일 집회신고를 해서 봉고차를 지키는 역할 분담을 한다. 컵라면·빵·우유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의식주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건설사 측에 업무방해죄로 고발당해 벌금 30만원형을 받았지만, 이조차 내지 못해 2박3일 유치장에 살고도 아직 벌금은 15만원이 남았다.

두 사람이 생활하는 봉고차는 공사현장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다. 그들이 살던 자리에 지어질 아파트 이름은 기막히게도 '이편한세상'이었다. 강정희 위원장은 철거민에게도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결코 지금의 투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정말 막막해요. 또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다 빼앗겼으니까요.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차에서 사는 게…… (한숨).

저도 옛날에는 투쟁의 '투' 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어, 저 사람들 데모하네. 왜 그러지?' 그리고 그게 길어지면 욕했던 사람이 나예요. '시끄럽게 그냥 주는 대로 받지, 더 달라고 저런다' 그렇게 욕했죠. 그런데 투쟁하면서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느꼈죠. 투쟁하면서 더 확고해졌어요. 절대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 아이들에게 이런 대물림을 해주면 안 되잖아요. 철거민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끝을 봐야죠. 승리해야죠."

덧붙이는 글 | 허진무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대학생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철거민, #용산참사, #신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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