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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혹한 속에서도 벽두의 태양은 여지없이 붉은 위용을 드러냈다. 이 새로운 시간, 우리는 당연히 희망을 말하고 싶어 한다. 비록 어제가 절망적이었던 사람일지라도 오늘만큼은 희망을 입에 담고 싶어할 것이다. 과연 2010년 새해에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드러낸 호랑이의 이빨처럼 주권 한 번 제대로 행사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드러낸 호랑이의 이빨처럼 주권 한 번 제대로 행사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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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0년 전 우리는 유례없이 낯선 절망을 체험했다. 제국주의 침략에 나라와 자존심을 송두리째 내 준 경술국치로 인해 우리는 식민지라는 처참한 이름의 절망을 강요당한 것이다. 잠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8·15해방과 남북분단은 기실 식민지로 인해 찾아든 불청객이었다.

60년 전 터진 한국전쟁은 다시 한 차례 우리에게 낯설고 처참한 절망을 요구했다. 이후 냉전분단체제는 고착되어 갔고, 이를 빙자해 발호한 독재정치는 우리를 여전히 절망의 늪지에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을 모색하는 저력이 있었다. 50년 전의 4·19혁명과 30년 전의 5·18항쟁, 그리고 10년 전의 6·15남북공동선언은 하나같이 우리가 '분단과 독재'라는 절망을 거부하고 '민주와 통일'이라는 희망을 부단히 모색해 왔다는 것을 실증해 준 사건들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절망의 사건들이건 희망의 사건들이건 2010년 우리의 시점과 과히 먼 거리에 있지는 않다는 점일 터이다.

2010년은 이명박 정부가 집권 3년차로 접어드는 해이다. 지난 2년 동안 이 정부가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명박 정부는 희망의 역사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의 역사를 파고 있는가. '우리가 과연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모두(冒頭)의 질문은 이것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2년은 반동의 계절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19일 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지지자들과의 행사에서 부인 김윤옥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19일 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지지자들과의 행사에서 부인 김윤옥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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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한나라당만큼 합법적으로 많은 권력을 장악한 사례는 없다. 우리 국민은 이미 2006년부터 한나라당에 권력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2006년 6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국민은 호남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지방 권력을 한나라당에 넘겼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 16명 중에서 12명이 시도지사에 당선됨으로써 그들은 삽시에 지방권력을 거머쥐었다.

우리 국민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이른바 '대권'이라는 최고 권력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불과 넉 달 후인 2008년 4월 총선에서는 과반수의 의회권력을 한나라당에 몰아주었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지방권력과 대권에 이어 의회권력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자신감을 배경으로 출범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전횡에 가까운 정치 행태를 선보였다.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부정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은 데 이어 권력기관 도처의 '사람 전봇대'를 뽑아냈다. 그들은 김대중의 6·15선언과 노무현의 10·4선언을 백안시했다.

결국 비대한 권력의 지나친 자신감이 위험하고도 굴욕적인 대미 쇠고기협상을 낳았고 더 이상 비대권력의 전횡을 방관할 수 없다고 느낀 시민들은 촛불을 들어 놀라운 저항력을 과시했다. 이 대통령은 두 번에 걸쳐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고 자신의 상징이던 한반도대운하를 포기한다고 말해야 했다.

이처럼 2008년 한 해 이명박 정부의 전황이 더 이상 난폭해질 수 없었던 것은'촛불'때문이었다. 그들은 촛불을 거칠게 탄압했으며 촛불 비슷한 것만 보여도 마구잡이로 일망타진하는 공권력을 과시했다. 용산참사는 촛불에 덴 공권력이 성급하고도 무모하게 대처하여 자초한 비극이었다.

한편 대기업과 부자를 위한 경제 정책은 세계금융위기와 맞물려 대다수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산층의 기반이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서민들은 IMF 환란 직후보다 심화된 양극화로 고통이 가중되었다. 경기 부양책으로 기업의 매출은 증가했지만 고용은 감소하는 이상 현상 속에서 젊은이들은 방황하며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법 불법 통과와 KBS MBC 등의 방송장악 그리고 4대강사업 강행 등을 지켜보면서도 폭력적인 공권력이 두려운 시민들은 그리고 하루 생계가 절박한 서민들은 촛불을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3년만 지나면 물러나게 되어 있다는 방임의식 또는 패배주의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희망인가 절망인가

이명박 정부는 희망의 역사를 쓸 수 있는가. 그래서 국민으로 하여금 희망을 말하게끔 할 수 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중도실용'을 내세우곤 한다. 소설가 황석영도 이명박 정부는 중도실용정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그들은 '중도'라고 할 수 없으며 '실용'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명백히 보수권력이다. 물론 '희망'이라는 것이 진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보수권력이 희망의 역사를 쓴 사례가 더 많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정상적인 보수'인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체험에 갇혀 있는 자, 자신의 과거를 형성시킨 가치관을 현재의 기준으로 삼는 자, 변통을 모르는 자, 이들을 일러 반동(reactionary)이라고 부른다. 보수는 반동이 아니라 신중(prudence)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현 정권은 보수와 반동을 혼동하고 있다.(도올 김용옥 <계림일기> 중에서)

우리에게는 절망의 과거와 희망의 과거가 함께 존재했다. 식민지와 한국전쟁과 독재정치가 절망의 과거라면, 4·19와 5·18과 6·15를 통해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모색한 것은 희망의 과거였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이 두 과거 중 어느 편과 친화하고 있는가? 요컨대 그들은 절망의 편인가 아니면 희망의 편인가.

'현 정권은 반동과 보수를 혼동하고 있다'는 도올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희망의 역사를 쓰리라는 기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보수 아닌 반동이 희망의 역사를 만든 예는 인류 역사에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신자유주의로 치닫는 이명박 정부는 '경제정의실현'이라는 새로운 희망마저 거스르고 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중죄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사면했다. 한나라당은 2009년 마지막 날에도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예산안을 변칙으로 처리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거기에는 개발독재의 유물에 불과한 4대강사업비도 포함되어 있다. 

잔인했던 2년,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강한 법

고 김 전 대통령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옛 전남도청 앞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론이었던 '각성된 시민'과 고 김 전 대통령의 지론이었던 '행동하는 양심'이 적힌 펼침막이 함께 걸려 있다.
 고 김 전 대통령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옛 전남도청 앞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론이었던 '각성된 시민'과 고 김 전 대통령의 지론이었던 '행동하는 양심'이 적힌 펼침막이 함께 걸려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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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2010년 새해에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위임한 권력을 환수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올 6월 2일 치러지는 지방선거의 중요성은 차기 대선 못지않은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지방선거는 말이 '지방'일 따름이지 사실상으로는 전국 선거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의 승리는 차기 대선 승리로 이어져 왔음을 감안할 때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95년 국민회의 조순의 서울시장 당선과 김대중 집권, 2006년 한나라당 오세훈의 서울시장 당선과 이명박 집권에는 보이지 않는 함수관계가 있다.

이처럼 2010년 6월의 지방선거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의 '리트머스'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말하고 싶다면 지방권력에서부터 의회권력에 이어 대권을 반동적 보수로부터 환수하는 대역사에 기꺼이 동참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민의 투표가 중요하다. '행동하는 양심',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투표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정당의 후보이다. 국민은 모든 진보개혁세력에게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념이나 노선 차이를 무시하는 합당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선거 연합을 하라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해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내라는 것이다.

87년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김영삼과 김대중은 패자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둘로 쪼개져 있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87년 양김씨의 분열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2002년 노무현· 정몽준의 단일화가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진보언론들의 각성과 실천도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는 작년 한 해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차례로 여의었다. 특히 노무현에게 가해진 야비한 언론공작과 불법수사는 (시대 차를 감안할 때)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당한 수모에 버금갈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진보인지 아닌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최소한 반동적 보수는 아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강대국이 전시작전권을 쥐고 있는 분단국의 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세계 역사상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길한 예감이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이 집권했던 기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른다. 반동적 보수들의 구호로 해서 '잃어버린 10년'이야말로 오히려 우리가 희망을 되찾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불길한 예감에 동조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강한 법이다.

덧붙이는 글 | 덜컹, 해운대를 떠난 기차가 짙고 푸른 바다를 끼고 돌아 한식경이면 고도 경주에 이르는 동해남부선을 아는지요? 2009 연말 생계를 위해 하향한 나는 이 아름다운 이름의 철길에서 2010년 처음 떠오르는 해를 치어다보았습니다. 차가운 해풍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범상치 않은 희망의 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태그:#이명박, #보수, #반동, #희망,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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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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