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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 63%, 18대 총선 투표율 46%, 서울시 교육감 선거 투표율 15.5%. 작년과 올해에 치러진 17대 대통령 선거와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지난 7월 30일에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의 당선자는 서울시민의 15.5%가 참여한 선거에서 40.09%의 표만을 얻었으니, 전체 유권자의 6.2%의 지지만을 받고 당선된 셈이다.

시민들의 저조한 정치참여율만이 문제가 아니다. 잡코리아에서 2006년부터 일 년 동안 국내 중소기업 1218개사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신입직원 채용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중소기업들이 신입직원들에게 지적하는 문제점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노동조합의 조직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005년 노동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97년 12%를 기록한 이후 계속해서 하락하여 05년도에는 10.3%까지 떨어졌다. 이미 많은 수의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건강한 노조문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로 짚어왔다.

하지만 이 같은 통계수치 앞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와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대학생들이 얼마나 있을까. 대학 입학 때부터 각종 자격증 획득과 학점관리로 바쁜 친구와 선후배들을 보아오면서 우리는 이미 '개인주의'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오히려 '자기실현'을 위해 속세를 등지고 고시와 공채준비에 매진하는 사람에게 동경어린 시선과 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세시대에는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 최고의 미덕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개인의 자기실현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진실성'의 문화에 빠진 현대 사회

ⓒ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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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인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이다. 개인의 자기실현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은, 자기의 이상을 위해 다른 것들을 '배제'해 버리는 그 과정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한다. 2급 한자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투표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다.

<불안한 현대사회>의 저자인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자기 진실성'의 문화에 흠뻑 젖어 있다. 테일러는 독일의 철학자인 '헤르더'의 사상을 빌려와 자기진실성의 개념을 설명한다.

헤르더에 따르면 인간은 각자 자기 고유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 과거 '목적론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신에 의해 주어졌다면, 오늘날 인간이 인간적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나는 내 인생의 요점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라고 테일러는 말한다.

이 같은 사상의 흐름은 포스트 모던적인 사상의 확대 속에서 점차 우리 사회 일반으로 퍼져가고 있다. "가치란 선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관념은 우리들의 모든 선택권을 정당화 해주는 이론적 틀이 된다.

개고기를 먹든 달팽이요리를 먹든, 일부일처제든 일부다처제든, 각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이 다를 뿐 그 선택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대학교 졸업이라는 명함만을 따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나 교양과 지식을 배우기 위해 다니는 학생 모두 자기실현의 목적이 다른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옳은 것'이다.

현대 사회의 3가지 불안 요소

찰스 테일러는 이러한 사상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소외와 상실감과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야기하는 세 가지 불안 요소를 설명한다. 첫째가 바로 '개인주의의 확장'이다. 개인들의 삶의 초점이 자기에게로 쏠리면서, 사람들은 보다 넓은 '우주적 지평'을 상실하고 마음의 시야가 좁아지게 되었다.

오늘 사랑이라는 문화가 그 어느 세기보다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랑이 개인들의 삶과 갖는 밀접한 연관성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의 지평은 점점 더 협소해지고 있다. 화이트데이, 100일과 같은 각종 기념일과 데이트 코스 등이 늘어남에 따라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선택권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 현대인들의 사랑은 개인들 특히 연인들 간의 사랑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 양식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좆아가고 있다. "돈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냐"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면 오직 연인들 간의 뜨거운 사랑밖에 떠올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희생·헌신·봉사·진리의 탐구 같은 사랑의 본연적 의미는 잃어버린 셈이다.

둘째, '도구적 이성의 확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응용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도구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전인교육을 지향해야 할 공교육이 대학진학률과 시험 성적만으로 평가받고 서열화 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상의 두 가지 요인인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의 확대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세 번째인 '정치영역의 무관심'이다. 테일러 자신이 말하듯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만 갇혀 있는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치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정치에 참여하는 조직은 쇠퇴하게 되고 사회에는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이상'을 찾아서

그렇다면 자기 진실성의 문화에 빠져 개인의 자기실현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대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든 것을 '해체'하여 동등한 것으로 환원해 버리는 포스트모던의 사상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상을 논해야 하는 것인가.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의 문화인 개인주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절충안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자기 진실성의 문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의 자기실현에는 '이상'의 상정이 필수적이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주변과의 단절을 통해 이 이상의 추구만을 극대화 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상이란 결코 사회와의 단절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은 친구, 애인, 부모 등 과 같은 주변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구체화 되고 발전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계속해서 주변과 부대끼며 소통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공교육의 발전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신과 자녀들의 성적향상에만 몰두했을 때 돌아오게 되는 것은 결국 사교육 시장의 팽창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사교육 시장에서 돈 없는 서민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추구는 개인의 이상과 권리마저 제약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해체하여 각각의 선택권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포스트 모던적인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치와 이상의 추구를 거부하는 사상은 자신의 입장마저 뒤집어 버리는 '자기 파괴적인 논리'이다. 모든 선택권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좋은 삶'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없어지게 된다.

개고기를 먹고 달팽이 요리를 먹는 식습관이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어떤 선택이든 동등하다는 입장 때문이 아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서 개고기에 대한 식문화가 오랫동안 발전해 왔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개고기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념적인 전환을 끌어냈다고 해서 현대인들의 의식과 행동이 곧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원자주의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이는 현대사회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실현의 완성은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

모든 것을 '상품가치'로 환원해 버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개인들은 끊임없는 경쟁구조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피라미드 형태의 대학 서열구조와 직업 위계를 바꾸려 하는 것보다, 좋은 대학을 가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빠르고 용이하기 마련이다. 테일러의 말처럼 함께 행동한 경험의 결핍은 타인과의 공감대를 약화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하게 되고, 공감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느낌은 그런 시도 자체를 시간 낭비로 보게 만든다.

도구적 이성의 학습과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들은 '개인의 실천적인 힘'을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교복, 단발머리, 높은 교단에 익숙했던 우리들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우리들의 힘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이미 만들어진 교육제도에 맞춰서 수능을 보고 점수에 따라 대학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공부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현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 한 반에 35명이 넘는 인원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국·영·수 중심의 주입식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어떻게 사회문제의식을 가지고 변화를 꿈꿀 수 있을까. 사회와 학교가 요구하는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취업하는 꿈만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은가.

학문과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가의 정신'이 들어선 대학들은 '돈 안 되는 학과'를 구조 조정하고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개설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여성학과, 비주류 경제학과 등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 보인다.

사회 전체가 '효율성'과 '경제성'으로 재단되는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비판의식을 가지고 테일러가 말하는 "민주적 행위를 통한 실질적인 공동목적의 형성"을 이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지금 보다 더 높은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은 바로 보다 넓은 '지평'을 확보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를 바꿀 힘과 능력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우리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 해답도 마찬가지다. 다만 해답을 푸는 과정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는 무관하며 그저 남 좋은 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실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한 표가, 교육과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우리들의 미래를 더욱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코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이학사(2001)


태그:#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개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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