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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비담(김남길 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비담(김남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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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의 난을 끝으로 MBC 드라마 <선덕여왕>이 22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뒤늦게 여왕의 진심을 깨닫고 쿠데타를 흐지부지 끝내버린 비담이 정부군 본영으로 달려가 여왕에게 접근을 시도하는 장면이 드라마의 최종 하이라이트였다. 

자신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에서부터 관군의 저항을 뚫고 맹렬히 돌진해 보았지만, 비담은 결국 '덕만이 있는 곳 10보 앞'에서 유신과 알천의 칼을 품고 피를 뿜어내며 "덕만아!"라는 그 한 마디를 끝내 전달하지 못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을 회복하긴 했지만 비담을 저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덕만은 늘 변함없는 유신을 옆에 두고 두 볼에 눈물을 적시며 죽어갔다. '삼천궁녀'도 아니면서 그는 이름 모를 어느 절벽 위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서글프게 생을 마감했다. 

비담 목숨 거둔 건, 선덕이 아닌 진덕여왕

위와 같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선덕여왕> 최종회는, 비담의 난의 전개과정만큼은 비교적 사료에 충실했던 데에 비해, 덕만과 비담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러브라인을 위해 과감한 픽션을 또 한 번 감행했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비담의 난이 개시된 시점은 여왕 16년(647) 음력 1월 1일 이후이고, 권41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이 쿠데타는 최소 10일 이상 계속되었다. 한편, '선덕여왕 본기'에서 여왕이 음력 1월 8일에 사망했다고 했으므로, 여왕은 쿠데타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사망한 것이다.

또 <삼국사기> 권5 '진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비담이 참수형을 당한 시점은 진덕여왕이 등극한 후인 음력 1월 17일이었다. 따라서 비담의 목숨을 거둔 사람은 드라마에서처럼 선덕여왕이 아니라 실제로는 진덕여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드라마 속 덕만은 시청자들에게 최후의 감동을 주기 위해서인지 안쓰러운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살아온 인생과 왕위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인생을 모두 마감하면서 총 62부작의 드라마를 마무리했다.

종래 그 어느 사극에서도 다루어진 적 없는 미실이라는 인물을 파격적으로 '스카우트'해서 덕만과 미실의 대결이라는 가상의 구도를 통해 신라 최초의 여왕이 출현하는 과정을 묘사한 <선덕여왕>은 그렇게 여왕의 눈물을 끝으로 시청자들과 작별을 나누었다.

역사 속 정치가 덕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치가가 무대에서 내려오면 어떤 형태로든 세상 혹은 역사의 평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위치인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정치인생을 마감한 선덕여왕 김덕만(재위 632~647년) 역시 그런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 신라 최초의 여왕인 김덕만은 어떤 정치가였을까? 그 점을 살펴보기 위해 2가지 각도에서 정치가 김덕만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보기로 한다. 하나는 미시적으로 김덕만 개인의 입장에 서서 그가 정치가로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는가에 대한 평가이고(미시적·주관적 평가), 또 하나는 거시적으로 신라 역사나 한민족 역사의 입장에 서서 그가 사회진보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하는 점에 대한 평가다(거시적·객관적 평가).

공주시절 덕만의 모습.
 공주시절 덕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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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지 중에서 거시적·객관적 평가는 제2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제1편에서는 객관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오로지 정치가 김덕만 개인의 입장에 서서 그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얼마나 성취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여성 정치가'를 바라볼 때 '정치가'보다는 '여성'의 측면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들 상당수가 은연중에 범하는 오류일 것이다.

여성 정치가가 유능하건 무능하건 간에 혹은 서민 편에 서 있건 기득권 편에 서 있건 간에, 우리는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어떻게 정치를 했느냐를 엄밀히 따지기보다는 그저 "여자가 그 정도까지 올라갔으면 된 거 아니야?"라거나 "그 여자는 성공했어, 뭘 더 바라겠어?"라는 식으로 끝내고 만다.

남자 정치가를 평가할 때는 단순히 그가 대통령에 올랐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일을 했는가를 냉정히 따지면서도, 여성 정치가를 평가할 때에는 그저 대통령에 올랐다는 사실 하나에만 매몰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남자 정치가가 불법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거나 혹은 대통령으로서 국난을 초래한 경우, 우리는 그에게 '실패한 정치가'라는 비판을 서슴없이 가한다. 하지만, 여성 정치가를 평가할 때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가 불법 쿠데타의 혜택을 입었거나 혹은 대통령으로서 국난을 초래했더라도 "여자가 그런 자리에 오르다니!"라며 '성공한 인생'이라는 호평을 던지기 쉽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결코 여성에 대한 우대라고 할 수 없다. 공동체의 삶을 책임지는 정치가를 두고 성별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무책임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것이 여성에 대한 비하의식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정치가 김덕만을 냉정히 평가하려면, 그가 여자였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일단 해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라는 '네임밸류'를 그에게서 떼어내고, 오로지 '정치가 김덕만'의 각도에서 공주 시절의 김덕만과 국왕 시절의 김덕만을 엄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형부와 선의의 경쟁에서 승리한 덕만공주

그럼, 공주 시절과 국왕 시절의 김덕만은 각각 어떻게 정치를 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정치행태(political behavior)를 선보였을까? 술주정꾼을 연상시키는 '행태'라는 표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정치행태'는 인간의 객관적 정치행위를 가리키는 정치학 용어로 사용되는 학술적 표현이다. 국왕이 되기 전과 된 후에 김덕만이 어떤 정치행태를 선보였는가를 분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가 김덕만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는 게 이 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공주 시절의 김덕만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자료는 위작 논란이 진행 중인 필사본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이다. 이 자료에서는 그가 진평왕의 제2공주에서 제1공주 즉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화랑세기> 속 덕만은 두 인물과의 정치투쟁을 거쳐 왕위계승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처음에 겨룬 상대방은 덕만의 오촌당숙이자 형부인 김용수(진지왕의 장남)였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이 용수를 자신의 사위로 만든 다음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기 때문에, 가슴에 야망을 품은 덕만으로서는 일단 형부를 상대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덕만이 가슴에 야망을 품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역사적 인물의 주관적 심리는 그가 남긴 객관적 행위를 통해 추적될 수밖에 없다. 덕만의 경우도 그러하다. <화랑세기> 김용춘 편에서는 '어린 덕만공주가 점차적으로 제왕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고 말했다. 왕자가 아닌 공주가 점차적으로 제왕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볼 때 덕만이 왕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야심을 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 진평왕은 사위이자 천명공주의 남편인 용수를 버리고 친딸인 덕만을 후계자로 교체했다. 그래서 천명-용수 부부는 출궁했고, 덕만이 제1공주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김용춘(진지왕의 차남)을 핵심참모로 삼고 용수마저 끌어들여 대권행보를 계속 이어나갔다.

등극 후 10년간은 무난했던 김덕만의 정치인생

그런데 대권을 향한 덕만의 행보를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또 다른 복병이 등장했다. 성골남진(聖骨男盡) 덕분에 후계자가 된 덕만의 입장에서는 성골 남자의 출생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덕만에게 어느 날 남동생이 태어났다. 죽은 마야왕후를 대신해서 새엄마가 된 승만왕후가 아들을 덜컥 낳아버린 것이다. 참고로, 승만왕후(僧滿王后)와 승만공주(勝曼公主, 진덕여왕)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성골 혈통을 이어받은 그 왕자가 그대로 성장할 경우에는 덕만의 등극이 무산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주 뜻밖에도 우연한 사건이 발생했다. 왕자가 갑작스레 사망한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분노에 치를 떤 승만왕후는 덕만의 최측근인 용수·용춘을 지목했고, 용춘이 지방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신라왕자 의문사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고 말았다. 

최측근인 용춘이 왕자 살인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면, 이는 덕만도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었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는 덕만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아주 비정한 수단도 서슴없이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와 같이 '당돌하게' 형부를 상대로 선의의 경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데에 이어, 왕자 살인사건과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는 오점을 남기며 덕만은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덕만이 당차고도 냉혹하게 정치투쟁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공주 시절의 덕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순풍에 돛 단 것 같은 김덕만의 정치인생은 공주 시절을 지나 국왕이 된 후에도 한동안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진평왕 24년(602) 이후 계속된 고구려·백제의 공격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지만, 양국에게 각각 1개씩의 성을 빼앗긴 것과 건강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등극 이후 처음 10년간의 정치인생은 비교적 무난한 편이었다.

김덕만은 여왕 1년(632)에는 곡식 무상지급으로 극빈계층의 환영을 받은 데에 이어, 여왕 2년(633)에는 1년치 잡세를 면제해줌으로써 납세자들의 환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도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진전되었다.

645년, 덕만을 바보로 만든 사건이 일어나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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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0년 같은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었다면, 김덕만의 정치는 후세에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김부식이 '선덕여왕 본기' 끝에다가 사견을 전제로 '신라가 여자를 왕위에 앉히고도 멸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는 비상식적인 막말을 써넣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10년 즉 632~641년 기간의 '지지율 40%'에는 중대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실, 이 시기에 신라가 비교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저돌적인 당태종(재위 626~649년)이 중앙아시아 쪽에 관심을 집중한 탓에 동북아시아 쪽의 정세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지지율 40%'는 덕만의 역량 덕분이라기보다는 역내 국제환경의 안정 덕분이었던 것이다.

'팍스 시니카' 건설을 기치로 내건 당태종이 중앙아시아 쪽의 돌궐·토욕혼·고창국·토번을 상대하느라 고구려·백제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동북아시아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덕만이 다스리는 신라도 별 탈 없이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41년에 당나라가 토번 즉 티베트와 화친을 맺은 뒤에 칼날을 동북아시아 쪽으로 돌리면서부터 덕만에게는 급격히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동북아시아를 향한 당나라의 동방정책에 맞서 641년 이후 백제·고구려에서 연달아 강경파 정권들이 출현하고 그 와중에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안겨줌에 따라 덕만의 리더십은 급격히 추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당나라마저 "우리가 도와줄 테니 너는 하야하라"며 압박을 해오는 통에 덕만의 처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 그 자체가 되었다. 이로 인해 덕만이 더욱 더 당나라에 의존함에 따라,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욕하게 될 나당동맹의 씨앗이 서서히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한참 강해지는 속에서 덕만을 그야말로 바보로 만든 사건이 서기 645년에 발생했다.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3만 명의 군대를 무리하게 차출하여 고구려 협공에 내보냈다가 그 사이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일곱 개의 성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신라 국왕이 신라 군대를 신라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없었을 정도로 신라의 자주성이 이미 상당부분 훼손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당나라에 바짝 다가갔다가 도리어 당나라를 위해 신라 군대를 내준 이 사건은, 덕만이 정치적 판단력과 능력을 이미 상당히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집권 말기,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국왕' 덕만

이런 상황 속에서 덕만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서기 647년 비담의 난이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상대등 비담이 먼 곳도 아닌 서라벌에서 '여왕은 무능하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반군이 10여 일 이상이나 정부군과 백중세의 대결을 펼치고 한때는 우세까지 점한 것을 보면, 비담이 여왕 밑에서 불과 14개월 만에 참으로 많은 준비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말년의 덕만이 국정 전반을 제대로 체크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레임덕에 시달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덕만은 문제의 '비담의 난' 와중에 운명하고 말았다. 물론 여왕 5년(636) 이래의 불치병도 한몫을 했겠지만, 결정적으로 쿠데타로 인한 심리적 쇼크가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백제에 시달리고 당나라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 신하의 하극상 와중에 허무하게 죽음으로써 덕만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국왕에게 중요한 것은, 재위 기간 동안에 소신껏 정치적 목표 즉 국정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덕만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물론 서민 지향적인 복지정책을 편 점이나 김춘추-김유신 콤비의 등장을 도운 점은 적어도 신라의 입장에서는 유익한 일이었지만, 국왕의 권위와 나라의 체면을 지키지 못하고 신하의 반란을 예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미처 진압하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는 점에서, 국왕으로서의 그의 정치는 '실패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돌하고 냉혹하기는 했어도 자신의 목표를 기어이 달성해낸 공주 시절의 김덕만과 비교할 때, 계속되는 악재 속에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국왕 자리를 유지하기에도 꽤 벅찼다는 점에서 집권 10년 이후의 김덕만은 사실상 '실패한 국왕'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집권 10년까지의 김덕만은 그럭저럭 무난한 국왕이었지만, 그때까지의 성과는 집권 10년 이후의 실패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성공한 공주'였는지는 모르지만 '실패한 국왕'이 되어버린 김덕만. 공주 시절에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과단성 있게 쟁취했지만, 정작 국왕이 되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당나라에 치여 살다가 결국에는 신하에게 배신을 당한 채 인생을 허무하게 마감한 김덕만. 이것이 정치가 김덕만에 대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여러 평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비담, #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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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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