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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한국사회에 정도와 중도는 없었다. 특히 정치에선 더욱 그랬다. 정도보다는 샛길과 굽은 길로 치달은 한 해였다. 부끄럽게도 권력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을 싫어하고 있음이 학자들 사이에 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교수신문>이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교수신문> 필진, 일간지 칼럼니스트, 주요학회장, 전국대학 교수(협의)회 회장 등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응답자 216명 가운데 43%가 '방기곡경(旁岐曲逕)'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올해를 원칙보다 편법이 횡행했던 해로 정리한 것. 지난해부터 논란을 빚어온 4대강 사업 강행부터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세종시법 수정문제까지 굵직한 정책들이 절차적 정당성에 많은 의문을 남긴 때문이다.

 

 "올 한 해 억지 횡행"... '방기곡경(旁岐曲逕)' 사자성어 선정

 

'방기곡경'은 사전적 의미로 '샛길과 굽은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이 아니다'는 뜻을 의미한다. 바른 길을 좇아서 정당하고 순탄하게 추진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추진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야비한 방법이다. 누구보다 국민을 업신여기며 공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정치권을 빗댄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데 올 한 해 '방기곡경'의 사례는 너무 많다. 지금도 4대강 사업 강행은 대운하 전 단계가 아니냐는 물음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 세종시 계획 수정도 반발이 거셌다. 그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진행형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2년차를 맞아 '개혁'에 속도를 낸 한 해였지만 정책의 결정과 추진 과정은 부적절했다는 평가다.

 

2009년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가 어지러운 세밑을 더욱 우울하게 한다. '정도'가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이라는 뜻의 사자성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대한민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를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유사한 뜻을 지닌 사자성어들이 후보로 올랐다. 얼마나 억지가 횡행한 한 해였는지를 방증해 준다.

 

올해의 사자성어 설문조사 결과 '방기곡경(旁岐曲逕)' 다음으로 학자들은 '중강부중(重剛不中, 삼중으로 겹친 강이 서로 옳음을 주장하지만 중도를 얻지 못한다는 뜻)을 꼽았다(19%). 이밖에 갑론을박(甲論乙駁, 서로 논란하고 반박한다는 뜻) 12%, 서자여사(逝者如斯, 가는 세월이 물과 같다는 뜻) 10%, 포탄희량(抱炭希凉, 목적과 행동이 다른 경우에 사용하는 말) 1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일을 정당하고 순탄하게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주로 쓰이는 '방기곡경'에 가장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 것뿐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 율곡 이이가 '동호문답'에서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소인배는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표현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정치사에 옮겨 붙었다.   

 

"정치가 올바르고 큰 길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 반영"

 

'방기곡경'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정치권과 정부에서 세종시법 수정과 4대강 사업, 미디어법의 처리 등을 비롯해 여러 정치적 갈등을 안고 있는 문제를 국민의 동의와 같은 정당한 방법을 거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해온 행태를 적절하게 비유한다"면서 "한국의 정치가 올바르고 큰 길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반영한 사자성어"라고 이유를 밝혔다.

 

다른 응답자들도 정부가 굵직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과 국정운영 방식에 아쉬움을 지적하면서 '방기곡경'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했다. 손주경 고려대 교수(불문학)는 "긴 안목으로 진정 국가와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연 모든 이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물리적 이익을 취하려다 정신의 풍요로움을 이룰수 있는 요소를 버리지 않았는지를 성찰하지 않았던 한 해"라고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조상식 동국대 교수(교육학)도 "정부의 신뢰를 저버리는 정책 추진으로 인해 현재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영석 광주대 교수(영문학)는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등 여러 현안들을 진솔하고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임기응변 식으로 모면하려는 인상이 강했다"면서 "올해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혼란은 정부와 집권 정당의 이런 자세 때문에 심화됐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올해 가장 안타까웠던 일로는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꼽았다. 그러나 정책 결정과 추진 과정에서 '원칙보다 편법'이 앞섰다는 따가운 지적이 우세했다. 올 한 해 한국 사회를 달궜던 논란과 갈등이 정치·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판단한 응답자가 많았다.

 

김주식 서울시립대 교수(환경공학)는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올해 세종시법 수정문제, 4대강 사업 전환, 미디어법 통과 등은 기존에 합의를 도출했거나 또는 합의로 도출돼야 할 사안인데 결과적으로 정도가 묻히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 많은 학자들은 지금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표적 수사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의혹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최근 검찰이 한명숙 전 총리를 체포한 것을 두고도 표적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교육계에서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재임용 탈락, 황지우 총장을 겨냥한 한예종 표적 감사 의혹, 연구지원사업에서 진보성향의 교수들이 잇따라 탈락한 것도 석연치 않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전직 대통령 죽음으로 몰아간 표적수사, 방기곡경 행태 보여준 것"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올해 사자성어 선정과 관련해 실시한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대리투표는 했지만 미디어법은 유효하다'는 법해석, 교사들이 시국선언했다고 해직하는 교육과학기술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표적수사 등은 방기곡경의 행태를 보여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경 성신여대 교수(지리학) 역시 "말 그대로 과정이야 어찌됐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식의 행태를 헌법재판소마저 용인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고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릇된 방법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는 데도 이를 부인하는 정부의 태도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올해의 사자성어 후보로 오른 '중강부중'과 '포탄희량' 등에서 읽힌다. 모두 중도를 얻지 못하고 목적과 행동이 다른 경우에 사용하는 사자성어들이다.

 

응답 교수들은 대부분 "미디어법 강행처리, 4대강 개발사업, 세종시 해법 등 불신만 조장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구국 애민 정책이라고 자위하는 대통령과 여당을 비유하기에 적절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대립만 있고 대화와 타협은 없었다는 지적도 많았다. 밀어붙이기식 정책 추진과 그로 인한 불신이 정치권의 갈등으로 나타난 때문이리라.

 

한 해 동안 사사건건 각을 세워 온 여·야 정치권에서 생산적인 토론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예산안을 놓고 대치하고 있는 연말 정국은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방기곡경' 다음으로 많이 응답한 '중강부중'은 이처럼 서로 옮음을 주장하지만 중도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오수형 서울대 교수(중문학)는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중강부중의 의미처럼 대립만 있고 절충이 없는 상태가 유난히 극명하게 드러난 해"라고 정리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도 "현실정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이견이나 정책 충돌에서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 조정과 통합이 필수적"이라면서 "성숙하고 균형적인 중도세력이 두터워지고 3각을 이룬 주요 정치 세력도 중간층의 요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종시법 수정, 4대강 정비사업, 미디어법 편법처리 가장 큰 사례"

 

이처럼 올해 한국사회를 돌아볼 때 '방기곡경'이란 사자성어는 주로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비판적 시각과 의구심을 적절하게 표현한 어휘로 선택됐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정파와 세력의 이익을 얻기 위해 타협과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편법과 독선이 자행됐다는 점에서 정부와 국회, 여당과 야당을 가릴 것 없이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특히 정부 여당의 돌연한 세종시법 수정시도, 대운하사업의 4대강 정비사업 전환 의혹, 미디어법의 편법 처리와 같은 문제는 올해 한국 정치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첨예한 갈등을 나은 이슈들이다.

 

<교수신문>은 "이러한 정책의 수립과 추진 과정을 지켜보며 지식인들은 한국이 추구해야 할 정당하고 큰 길을 놔두고 샛길로 빠지고, 굽은 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의 정치가 올바르고 큰 길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반영한 사자성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교수신문> 선정 역대 '올해의 사자성어'

 

▲2003년: 우왕좌왕(右往左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이 종잡지 못함.

▲2004년: 당동벌이(黨同伐異), 옳고 그름의 여하간에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

▲2005년: 상화하택(上火下澤),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 불이 위에 놓이고 못이 아래에 놓인 모습으로 사물들이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을 상징.

▲2006년: 밀운불우(密雲不雨), 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고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

▲2007년: 자기기인(自欺欺人),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까지 속이는 사람을 풍자함.

2008년: 호질기의(護疾忌醫),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음. 문제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는 뜻.

한편 '올해의 사자성어'는 한문학을 비롯한 관련 교수들의 추천, 사전 조사, 본 설문 세 차례 과정을 거쳐 확정됐다. <교수신문>은 지난 11월 20일부터 12월 2일까지 김상홍(단국대, 한문학), 김혈조(영남대, 한문산문), 김풍기(강원대, 고전비평), 안대회(성균관대, 한시), 임동석(건국대, 중국어학), 유권종(중앙대, 한국유가철학), 송기채(한국고전번역원, 한문산문), 정우락(경북대, 고전비평) 등 관련 전공 교수 8명으로부터 사자성어 18개를 추천받았다.

 

설문조사에 앞서 <교수신문> 논설위원과 편집기획위원 14명을 대상으로 사전조사를 거쳐 후보 5개를 추렸다. 설문은 올해 <교수신문> 필진과 일간지 칼럼니스트, 주요 학회장, 전국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을 대상으로 실시, 모두 216명이 응답했다.


태그:#방기곡경, #사자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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