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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운동 = 박정희' 라는 도식을 깨뜨리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새마을운동 하면 우리 국민 열에 여덟, 아홉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아니면 이 노래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은 새마을운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에서 '그들은' 일반 민중이다. 이 책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실제로 농촌사회를 이끌고 바꾸어간 민중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한 '조용한 은둔자'들을 역사의 표면으로 이끌어내어, 실재로 농촌을 바꾸어 나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마을운동을 평가하자는 것이다.
대중역사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근현대사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는 대안교과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그들의 새마을운동 대중역사화를 표방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근현대사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하는 대안교과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알라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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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사 연구자로서 대중의 역사화를 시도

책머리에서 저자는 역사학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대중의 역사화'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대중의 역사화란 소외되어 있던 대중들의 삶을 드러내고 그것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는 국가정책사, 민족사 위주였기 때문에 정작 민중들의 삶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사 연구자로서 저자의 목표는 '대중의 역사화'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히 농촌운동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대중의 역사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가 활용한 사료 역시 국가정책사 위주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정책사 위주의 연구라면 국가기관의 문서나 권력자들의 글, 연설 등이 주요 사료로 이용될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생활세계와 경험세계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저자가 주로 활용한 사료는 일반 민중들의 구술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쓴 <구술사료선집>(김영미, 국사편찬위원회, 2005)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또한 구술사료는 '역사 대중화'의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역사 대중화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풀어써서 역사에 대한 사회적 소비를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술사료는 딱딱한 역사연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어느 자립마을의 내면풍경 - 민중사 연구라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다.

먼저 저자가 택한 민중의 생활세계는 경기도 이천의 '아미리마을'이다. 아미리마을의 자발적인 농민운동을 추적하기위해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계속 진행되어온 자발적인 농민운동은 책의 주제를 탄탄히 뒷받침해준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사료가 마을 주민들의 구술을 토대로 하고 있고, 그들의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진정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아미리마을에 대한 분석은 일반적인 구가사 연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국가사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연구방법을 아미리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적용시킨다. 이를테면 장등 개간 사업에서 신성성의 해체 및 근대화의 수용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포착한 것은 대한제국의 덕수궁 석조전 건축을 연상케 한다. 공회당과 근적비를 통해 마을 개혁에 앞장선 최장환 구장의 업적을 살피는 방식은 탕평비와 화성으로 영·정조의 업적과 통치철하을 유추해내는 방식과 일치한다.

또한 저자는 해방 이후 전쟁을 거치면서 소수 성씨에서 이장이 선출되고 이장권의 잦은 교체가 일어난 사건을 두고, 이장권과 마을구심점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는 신라 말 불안정했던 왕권과 혼란했던 사회상을 떠올리게 한다. '최씨가는 결혼을 통해 임씨가와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신씨가를 누르고 수적으로 다수가 되어 강력한 권력 기반을 마련한다'는 부분도 국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구장권과 씨족갈등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이다. 국가행정력의 약화 - 구장권의 약화 - 씨족갈등의 심화라는 유기적 연결은 중세 서유럽에서 왕권과 교황권의 역학관계 및 이에 따른 영주 및 기사 계급의 권력 지형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내용은 대중의 역사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국가사의 주요 연구 대상이 왕이었다면, 민중사에서는 이장으로 연구 대상이 바뀐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일제시기~1950년대 아마리의 구장을 나열한 표는 마치 사기(史記)의 연표를 떠올리게 한다.

새마을을 만든 진짜 주인공은 국가가 아니라 민중이었다.

3부의 대상인물 이재영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기도 이천, 음성, 안성을 기반으로 농촌운동에 투신하였다. 3부에서는 해방과 분단,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을 이재영 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경험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돋보인다. 동시에 반대로 농촌운동과 관련된 이재영 개인의 생애를 확대하여 역사화 하는 것도 매우 뛰어나다. 이재영은 농촌운동가로서 활약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박정희는 이재영에게 매료되고 그를 '새마을의 기수'로 내세우기에 이른다.

이러한 개략적 상황만을 놓고 보면, 이재영의 농촌운동이 국가에 의해 흡수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재영 개인의 삶을 보다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오히려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와 동원이 자율적인 농촌운동을 방해하였음을 확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칠분도시책에 대하여 끝까지 반대했던 일화, 임의로 농지 개간을 허락하였다가 구속수감된 사건을 들 수 있다. 또한 조합원들에 의해 군조합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공화당의 지원을 받은 후보에 밀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조합장에 임명되지 못한 사건은 이재영 스스로의 농촌운동과 국가 주도 새마을운동의 괴리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처럼 저자는 한 개인의 생애사를 철저히 연구함으로써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역사 동인을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농촌 근대화를 이루어낸 실제 동력은 이재영과 같은 무명의 농촌운동가였음을 증명한다. 이는 비단 새마을 운동이라는 국한된 주제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중사, 그리고 대중역사화라는 패러다임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이책은 진정한 역사란 과연 무언인지 생각해보게끔 한다.

새마을운동의 기원에 대한 탐구, 그리고 역사적 평가

새마을운동의 기원을 탐구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에서 저자의 깊이있는 연구를 느낄 수 있다. 새마을 운동은 일제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이하 농진운동)에서 기원하였다. 일제가 농진운동을 추진한 근본적인 이유는 벼랑 끝에 몰린 농민들의 경제적 몰락을 막음으로써, 급진적인 저항운동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사회구조에 의해 초래된 농촌의 위기를 농민들의 정신 계몽과 생활 개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성을 거세하고자 한 것이었다.  저자는 지배자의 측면에서 볼 때는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평가한다. 대공황으로인해 자칫 무너질 뻔한 식민지배체제의 위기를 타개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논의일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농민의 관점에서 평가한 농진운동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농민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정책에 '동원'된 존재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동원된 존재인 농민은 권력에 지배당했느냐 저항했느냐라는 이분법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정부권력에 의해 끌려다니기만 한 농민들은 그저 우매한 선택을 한 것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저자는 농민들도 정부 권력의 통치 수단을 '활용'한 주체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장 먹을 음식조차도 없었던 농민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생존전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일제의 농진운동에 참여하여 약간의 '빵'이나마 얻어내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 역시 같은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새마을운동 역시 '농민의 자발성과 정부의 강제성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체제 유지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였고, 대중동원 메커니즘이라는 관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농민사회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새마을운동은 결코 성공한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권력유지수단으로서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농촌사회의 자율성과 다양성, 그리고 삶의 질은 고려되지 않았다. 슬레이트 지붕과 포장된 길로 대표되는 마을 환경의 근대화는 성공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농가부채는 급증하였고, 도시 소비문화 유입으로 인해 농민의 생활비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또한 수익성 높은 단일작물로의 전환이 오히려 농가소득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대중역사화 그리고 역사일반으로의 확장

대중역사화를 추구하는 민중사 연구자로서 저자의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민중들의 경험세계와 생활세계로 직접 들어가 얻은 살아있는 사료들은 책의 주제를 탄탄히 뒷받침해준다. 연구대상을 한 마을과 한 인물로 제한시켰기 때문에 세밀한 분석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역사화의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진정한 대중의 역사화를 위해서는 개별 민중들의 사례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이른바 '전도된 성공'을 역사일반으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아미리와 이재영 이외에도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하다. 저자도 이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자생적 농촌운동가가 새마을운동에 동원되었던 것을 이재영의 특수한 경험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역사가에게 주목받지 못한 수많은 무명의 농촌운동가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한 농지회 사무장의 글은 자못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농민생활>에 실린 독자난의 기사들도 전국에 산재한 무명의 농촌운동가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사례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주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은 역사학계의 주류라고 하기는 어려운 민중사 연구의 한계일수도 있다. 더 많은 역사학자들이 민중사 연구에 뛰어들어, 또 다른 아미리마을과 이재영을 발굴해내야 역사의 진짜 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한 대중의 역사화 작업이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

근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대안교과서

이재영을 비롯한 새마을의 기수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들의 가슴에는 애국심이 치솟았다. 그들은 '대통령 각하가 지붕 개량에서부터 닭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송구스러울 정도로 일일이 캐물으실 떄는 그분의 집념이 곧 우리의 집념이 되고 신념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새마을의 기수들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농민운동이 국가권력으로 전유되고 통합됨을 경험하였다. 그렇다면 왜 새마을운동은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인가? 그 답은 책 속에 모두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힘을 자율적이고 민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체제 유지를 위한 '동원'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아니라 농촌 사회의 진짜 주인공인 농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었어야 한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은 민중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새로운 역사지침서이다. 동시에 주류 역사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민중사를 지향하는 대안교과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민중은 결코 역사를 움직이는 열두 번째 선수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새마을운동 - 한 마을과 한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운동 이야기

김영미 지음, 푸른역사(2009)


태그:#새마을운동, #민중사, #구술사,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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