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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김원용할아버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김원용할아버지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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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어머니 홀로 4남 2녀 책임져

서울 강서구 화곡시장 입구 쪽방촌에 살고 계시는 김원용(67) 할아버지.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굴처럼 어두운 북향 반 지하 방. 바닥은 언제 난방을 했는지 불기운이 없어 방석을 깔지 않으면 발이 시려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왜 난방을 하지 않으세요? 지병도 있으신데 이렇게 추운데서 주무시면 몸이 더 아프지 않으세요?"

"난방을 어떻게 해? 영하 5도나 10도나 되면 조금 할까 이런 날씨는 참고 지내야지. 난방비를 누가 주나. 수급자라면 난방비도 지원되고, 생활비도 지원되지만 나는 그런 지원이 안 되니 보일러를 안 때고 사는 수밖에 없지."

할아버지 고향은 충남 논산. 부모세대부터 논 한 뙈기 가져보지 못했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그나마도 아버지는 3년을 병석에 누워계시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4남 2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어머니가 우리 6남매 데리고 사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 나도 안 해 본 일이 없지만 우리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신 분이야.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 보고 치마만 둘렀지 장부가 따로 없다고 했거든."

할아버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 입학을 앞두고 한국전쟁이 나는 바람에 열두살이 다 되어서야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사업을 하던 형이 실패를 하는 바람에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둔 채 고향을 떠나 대천으로 이사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공사장으로 돌기 시작했어. 처음엔 중장비 기사 조수로 들어가서 잔심부름도 하고, 옆자리에 앉아 후진도 봐주고 그랬지. 그러다 어깨 너머로 운전을 배워서 열여덟에 처음 불도저 운전대를 잡아 봤어. 그땐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워서 운전하던 기술자들도 많았어. 나도 면허는 스물에 땄거든."

60, 70년대 건설현장에 바친 청춘, 경부고속도로 공사에도 투입

열여섯 어린나이에 공사판에 뛰어든 할아버지는 착실하고 부지런한 성격 탓에 남들보다 먼저 운전기술을 익히고, 면허를 취득해 나이 스물에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내가 동아건설 3기야. 초장기 멤버지. 동아건설 들어가서 우리나라 전국에 길 닦는데 댐 쌓는데, 둑 쌓는데, 다리 놓는데... 안 다녀 본 데가 없어. 공사 현장을 따라 이사도 수태 다녔고... 대한민국 큰 공사란 큰 공사는 다 해 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야. 대한민국 큰 공사는 현대건설, 동아건설이 다 하던 때니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전 국토가 건설현장을 방불케 했던 60,70년대. 공사 현장은 많았지만 중장비와 기술자 수는 그에 미치지 못해 높은 임금을 받을 때였다.

"그때 공무원 월급의 3배를 받는다고 했지. 하지만 벌어서 한 푼도 내가 써 본 일이 없어. 전부 어머니께 드렸지.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고."

소위 말하는 노가다판에서 잔뼈가 굵은 할아버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사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니 스무살 무렵했던 부안 계화도 간척사업이라고 한다.

"불가능하다는 일을 해낸 거야. 해양청과 수시로 무전으로 통화를 하면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철수하고 나가면 다시 흙을 쏟아 붓고 하기를 반복하는데, 바닷물이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쏟아 부은 흙의 3분지 1은 쓸려 나가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지만 그래도 계속하니까 메워지더라구. 지금도 지나다 보면 마음이 뿌듯해."

보람도 있었지만 끔찍했던 순간도 많았던 건설현장. 경부고속도로의 초입부인 말죽거리 구간 건설에도 투입됐었다는 할아버지는 당시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공사 때문에 근로자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다른 현장에서는 폭파사고나 추락 사고가 많이 난다지만 우린 중장비를 하니까 교통사고가 많았어. 장비가 워낙 크다 보니 후진하다가, 회전하다가 미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곤데. 그땐 워낙 사고가 많아서 그랬는지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어도 돈 몇 십 만원 주면 그만이고 그랬어. 공사장 인부들이 워낙에 배운 것도 없고, 힘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회사에 뭘 어떻게 할 줄도 몰랐던 거지."

1968년 2월 착공해 2년 2개월만인 1970년 7월 개통한 경부고속도로. 2년 2개월의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7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공사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확인된 인원이 77명일 뿐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사현장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한강에서 모래를 퍼다 압구정동을 매립하는 공사도 했어. 그땐 황량한 그 땅에 뭐가 들어설까 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파트를 잔뜩 지었더라구. 지금은 그 동네가 제일 부자라며?"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할아버지도 한때 불도저 위에 올라앉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 같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불도저 에서 본 세상과 땅을 밟고 본 세상은 사뭇 달랐다고.   

"대통령을 불도저라고 하던데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좋은 게 아니야. 나도 한때  불도저위에 올라가 봐서 아는데 밀어붙이면 될 것 같지만 무리하게 하다보면 꼭 사고가 나는 법이거든. 요즘 4대강 사업도 그래. 내가 댐도 막아보고 다리도 놓아보고 해서 아는데 보를 설치하면 깨끗한 물은 위로 넘쳐 나가지만 아래 고인 물은 썩어 버리거든. 난 배운 게 많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냥 공사를 해 본 사람으로서 4대강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 해."

땅장사 집장사로 돈 모으던 시절, 잘못된 보증으로 빚쟁이 신세로

난방을 하지 않아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앉아 있기가 힘든 할아버지의 반지하방.
 난방을 하지 않아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앉아 있기가 힘든 할아버지의 반지하방.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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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저 열심히 일만 한다는 김원용 할아버지. 가족과 일밖에 모르던 순박한 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한다. 지금은 이혼한 상태라 30년 남짓한 결혼 생활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 하시지만 그래도 처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그때를 소중한 추억으로 가지고 계신다.  

"나보다 다섯 살 적은 아가씨였는데 참 이쁘더라구. 재미는 뭐. 그저 남들처럼 그렇게 살았지. 나는 돈 벌고 아내는 아이들 키우고... 그런 게 재미지 뭐가 재미야. 아이들 낳고 살다가 동아건설에서 나와 다른 건설회사에도 들어갔었고, 나중에는 이런 저런 사업도 했지."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흔 무렵에는 번듯한 집도 하나 장만했던 할아버지. 한창 부동산 열풍이 불 때는 건설회사에서 나와 땅장사 집장사로 돈을 좀 모아보기도 했었다.

"프라이드 처음 나왔을 때 그거 사서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부동산 사업을 좀 했지. 나야 워낙 자본이 많지 않으니까 작은 거를 사서 팔고 그랬지만. 그래도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부자는 아니어도 단란하게 살아가던 할아버지가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십 몇 년 전. 사업을 하던 친구에게 보증을 서 주면서부터였다. 때마침 찾아온 IMF는 꺾인 다리를 한 번 더 꺾어 앉혔고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빚쟁이들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런 소용돌이를 겪으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내와는 이혼을 했다.

"내 잘못이니 할 말이 없지 뭐.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도,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 다만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것이니 내가 혼자 감당하면 되는 거지."

이혼을 한 후 혼자 살며 설비나 공사판 잡부 등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할아버지. 나름대로 돈을 모아 작지만 방도 한 칸 얻고 조금씩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할 즈음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2001년 설비일을 다니던 중에 오토바이 사고가 났어. 그래서 지금도 척추랑 목, 허리에 모두 인공뼈가 심어져 있어. 다리도 온전치 않아서 바닥에 앉기가 어렵고, 한쪽 다리는 아예 감각도 없어. 의사가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더라구. 그 사고로 지체장애 2급을 받았어."

오토바이 사고로 인한 병원비로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 상태에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2002년 폐암이 발견되어 또 다시 큰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스무살에 조수 노릇하면서 배운 담배니 수십년을 피운 거지. 사업 실패하고 난 후에도 하루 두 갑씩 피웠으니까..."

오토바이사고에 폐암수술까지. 더 이상 몸을 움직여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태였던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상황이 반영되었는지 2003년에는 수급자로 지정되어 몇 년간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끊겨 버린 상태.

"수급자일땐 나라에서 생활비도 나오고 병원비도 모두 무료니까 몸만 얼른 나으면 살겠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그것도 3년 주더니 딱 끊더라구. 어느 날 구청에서 조사를 나오더니 내 호적에 자식이 있어서 수급자가 될 수 없다는 거야. 몸이나 성해야 일을 해서 먹고 살지."

오토바이 사고 후유증으로 올 7월 또 한번 허리 수술을 받았다는 할아버지. 그때 들어간 병원비 500만원 중 200만원은 긴급지원 도움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갚아야 할 빚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서 수급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왜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좀 서운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다니면서 보면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데도 수급자가 돼서 돈을 타먹는 사람이 있어. 실제로 내가 봤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나 같은 사람은 자식 있다고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또 왜 해주나? 나처럼 힘없고 빽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가나 설움을 받아. 그러니까 내가 서운하다고 하는 거지..." 

지난 7월 허리뼈에 이상이 와 수술을 받은 이후로 목뼈까지 문제가 있는지 이제는 고개도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할아버지. 하지만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아파도 괴로워도 무조건 참을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막막하다, 답답하다 하시면서도 할아버지는 부끄러우신지 자꾸만 얼굴을 붉히며 웃으신다. 원래 웃음이 많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이렇게 누구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어색하기만 하신 모양이다.

김원용 할아버지는?
화곡동 쪽방촌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8만원 반지하방에 거주한다. 매달 정부로부터 장애수당 16만원,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 부터 쌀 7kg을 지원받고 있지만 월세와 병원비, 생활비를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할아버지는 수급자 지정을 원하고 있지만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돼 생활이 막막한 상황이다.
"이거 참. 뭐 좋은 이야기라고. 난 정말 누구 원망할 마음도 없고, 누구 미워하지도 않아. 다만 자식에게 미안하지. 애비가 잘못해서 이렇게 어렵게 되었으니 말이야.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식한 애비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다 날리고 거지가 되었으니 참 미안해. 이런 애비 도와주지 못하는 애들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겠어. 자식들 어렵게 사는 거 아는데 애비라고 도움도 되지 못하고 부담만 주니 미안하지... 정말 뭐라도 있으면 우리 애들 도와주고 싶어. 부모 맘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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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원용할아버지,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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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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