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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8일에 문을 연 '왕산 기념관'입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지요. 우리 마을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나셨다는 게 퍽 자랑스럽습니다.
▲ 왕산 기념관 지난 9월28일에 문을 연 '왕산 기념관'입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지요. 우리 마을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나셨다는 게 퍽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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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허위 선생님은 온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네? 정말 대단하시다. 그나저나 참 뿌듯하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나셨으니 무척 자랑스럽다."
"그러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저런 훌륭한 분이 나셨는데 모두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또 더욱 많은 사람이 선생님이 하신 일을 잘 알고 그 정신을 받들었으면 좋겠다."
"맞아. 구미시에서도 좀 더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아마 허위 선생님 이름은 들어봤어도 제대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걸?"

우리 마을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

구미시 임은동 앞산에 우뚝 솟아오른 '왕산기념관'은 지난 9월 28일에 문을 연 곳이랍니다. '왕산'은 허위 선생의 호이고요. 허위 선생은 1854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나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6년 '을미의병' 때 '김산'(지금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나중에 '13도창의군'의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8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신 구한말 대표되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는 구미에 살면서도 몇 해 앞서만 해도 허위 선생을 잘 몰랐지요. 그것도 일터를 오가는 길에 선생의 생가 터를 날마다 지나다니면서도 말이에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처음 알게 된 건 <오마이뉴스>에서 박도 기자님이 왕산 허위 선생의 발자취와 그 후손들의 삶을 써주신 기사를 보면서 알았답니다. 그 뒤로 생가 터에 새롭게 자리 잡은 '왕산기념공원'을 세우면서 더욱 마음을 쓰게 되었답니다.

구미시 임은동 선생의 생가 터에 자리 잡은 허위 선생의 기념공원입니다. 지난 2007년에 선생의 후손이 이 땅을 기증하여 세운 곳이지요.
▲ 왕산 허위선생 기념공원 구미시 임은동 선생의 생가 터에 자리 잡은 허위 선생의 기념공원입니다. 지난 2007년에 선생의 후손이 이 땅을 기증하여 세운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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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훌륭한 분이 이 마을에서 나셨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우리도 그때 박도 기자님의 기사를 보지 않았다면 선생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요. 지난 2007년에 왕산기념공원을 만들고 이번에 생가 터 맞은편에다가 '왕산기념관'을 세우고 지난 9월 28일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기뻤답니다.

이 땅에 훌륭한 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적어도 여기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찾아가보고 선생의 업적이나 나라를 구하려고 애쓰다 돌아가신 그분의 얼을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새로 세운 기념관은 산 밑 우뚝 솟은 곳에다가  지하1층, 지상2층으로 되어 있고 돔처럼 지붕을 둥그렇게 만들어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지요. 기념관까지 가는 길은 조금은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짧아서 손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13도 창의군' 의병대장 허위 선생

허위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뒷날 나라에서 내린 건국공로훈장이 전시관 가장 앞에 전시되어 있어요.
▲ 건국공로훈장 허위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뒷날 나라에서 내린 건국공로훈장이 전시관 가장 앞에 전시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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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간 때(12월6일)엔 하필이면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었어요.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서려는데, 기념관 한가운데에 허위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반겨줍니다. 눈매도 날카롭고 곧은 의지가 돋보이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마침 안에서 일을 보시던 직원 한 분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줍니다. 영상자료를 보고난 뒤에 둘러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네요. '영상추모관'에서 50대 부부로 보이는 분들과 네 사람이 앉아서 함께 봅니다.

짧은 영상기록이지만, 허위 선생이 하신 일과 나라를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이 온몸에 그대로 전해집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뒤, 경북 김천(옛 김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다가 고종임금의 밀서를 받고 해산한 뒤에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관직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고 온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알리는 '배일격문'을 돌리다가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하고 협박하는 일본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지요.

그 뒤에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본에 우리 나라의 권리를 빼앗기게 되자 선생이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온 나라의 의병부대가 함께 일제의 통감부를 치려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치지만 일본군에 밀려 그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끝내 경기 북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던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08년9월27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그것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집행한 교수형1호라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도 칭찬한 허위 선생

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기에 앞서 유서로 남긴 글이 전시되어있었는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선생의 올곧은 마음씨가 그대로 드러나 있더군요.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했고 효도도 하지 못했으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말씀)

선생이 순국하시기 앞서 남긴 유서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선생의 마음씨가 잘 엿보이는 글이지요.
▲ 유서 선생이 순국하시기 앞서 남긴 유서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선생의 마음씨가 잘 엿보이는 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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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심산 김창숙 선생과 곽종석 선생이 허위 선생의 순국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라는 글 두 편에서도 선생을 우러르며 높이 칭찬하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안중근 의사가 선생을 칭찬한 이야기인데,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 몸만 알고 나라를 모르는 자가 많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제일의 충신이라 할 수 있다."(안중근 의사)

선생이 일본군에 잡혀 돌아가신 뒤, 안중근 의사가 선생의 업적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 정신을 높이 칭찬한 말입니다.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에요. 이렇게 훌륭한 분이 우리 마을에서 나셨다는 게 퍽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올해로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1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이런 때에 선생의 소중한 정신을 받들며 이곳에 기념관을 세운 게 얼마나 값진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듯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가신 왕산 허위 선생의 이야기를 전시해놓은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우리 남은 후손들한테 얼마나 값진 가르침인지 몸소 배우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어요. 아마도 이곳을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거예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도 존중해주었으면...

선생의 업적을 높이 사며 뒷날 나라에서 내려준 건국공로훈장을 비롯하여 교지, 칙명, 선생이 쓰시던 물건들과 여러 가지 전시물을 둘러보면서 새로운 걸 알았는데, 허위 선생의 집안 사람들도 이와 같이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란 걸 알았지요. 선생의 큰형인 방산 허훈은 땅 3천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으로 대고, 셋째 형 허겸, 허위 선생의 아들 허학, 종손자 허종까지도 함께 나라를 구하려고 애쓴 분들이었어요. 그야말로 온 집안이 모두 독립 운동가였답니다.

여러 가지 전시물이에요. 교지, 칙명...
▲ 왕산기념관 여러 가지 전시물이에요. 교지, 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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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문서
▲ 왕산기념관 여러 가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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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과 시청각실, 도서열람실까지 모두 둘러본 뒤에 다시 내려오니 아주 남다른 사진이 눈에 띕니다. 바로 얼마 앞서 개관식 때 찍은 기념사진인데, 왕산 기념관 사무국장님인 이길수씨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마침 오늘 이 사진을 내걸었다면서, 바로 사진 속 어른들은 모두 허위 선생의 후손들이라고 했어요.

언젠가 기사를 읽으면서 선생의 후손들이 지난날 의병장의 집안이라며 추적하던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와 러시아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걸 알았지요. 지금도 키르키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곳곳에 흩어져서 지내는데, 기념관 개관식 때 초대되어 와서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9월28일 왕산기념관 개관식 때에 여러 나라에서 흩어져서 살던 선생의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때마침 우리가 찾아간 날, 이 사진을 내걸었다고 하시더군요.
▲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들 지난 9월28일 왕산기념관 개관식 때에 여러 나라에서 흩어져서 살던 선생의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때마침 우리가 찾아간 날, 이 사진을 내걸었다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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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기사를 쓰려고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건데, 바로 이분들이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그 과정이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는 거였어요. 온 집안이 모두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몇몇이 우리 나라로 귀화하게 되기까지도 매우 힘든 일이 많았다고 하네요.

할아버지 나라로 가려고 한국대사관을 여러 번 찾아갔지만 그 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중국에 살던 몇몇은 불법으로 들어와 공사판 잡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사기와 폭행에 시달리며 임금도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란 것 때문에 다시 쫓겨나기도 했답니다.

허위 선생의 손자들이 이런 힘든 일 끝에 100년 만에 국적을 받고 '한국사람'이 되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막노동을 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다시 그들이 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나라를 구하려고 애쓰다 가신 분들의 후손이 정작 아버지의 나라, 할아버지의 나라에 와서도 제대로 살 수 없어 다시 돌아갔으니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디 이런 훌륭한 일을 하신 어른의 후손들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부디!

지금까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빗돌마다 빼곡히 한문글자로 써놓은 걸 많이 봐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허위선생 유허비에는 참으로 반갑고 고맙게도 한글로 씌어진 것이었어요. 아마 틀림없이 어린 학생들도 이 빗돌의 글귀를 읽으면서 선생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며 되새길 듯합니다.
▲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지금까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빗돌마다 빼곡히 한문글자로 써놓은 걸 많이 봐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허위선생 유허비에는 참으로 반갑고 고맙게도 한글로 씌어진 것이었어요. 아마 틀림없이 어린 학생들도 이 빗돌의 글귀를 읽으면서 선생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며 되새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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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곁 언덕에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를 세웠어요. 지난날엔 구미 금오산에 있던 것을 기념관을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기념관 곁 언덕에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를 세웠어요. 지난날엔 구미 금오산에 있던 것을 기념관을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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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왕산기념관, #왕산 허위, #구미시, #독립운동가,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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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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