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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으로 쓰러져 10년 넘게 고생하던 셋째 매형이 향년 74세를 일기로 아쉬운 생을 마감(11월29일)했다. 지난 2월23일 또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때 의식이 없고, 호흡이 어려운 걸 보고 예상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셋째 매형은 1959년 늦가을 고향집 앞마당에서 셋째 누님과 사모관대 차림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니 올해는 결혼 50주년(금혼식)으로 자녀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제주도도 가고 외국여행도 다녀오는 해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해 더욱 안타깝고 짠하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는데 온갖 상념들이 버스 유리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매형과는 애틋한 추억들이 많은데, 셋째 누님과 백년가약을 맺고 50년을 사는 동안 처가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관심이 지나쳐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셋째 매형이 처세를 잘했는지, 자녀를 잘 둬서인지 많은 조문객이 다녀갔고, 발인(12월1일)과 삼우제까지 상(喪)을 원만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삼우제를 지내고 형제들이 점심을 먹고 헤어진 지 일주일 가까이 되는데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대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고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무리지어 공중을 비행하는 철새들 울음소리가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하면서 셋째 매형과 있었던 이런저런 추억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한 장면씩 바뀌어 나타난다. 

 

지난 11월15일 집에서 조촐한 저녁상을 마련하고, 형제들이 모여 병상에 외롭게 누워있는 매형을 생각하며 셋째 누님의 금혼식을 축하했는데, 필자와도 인연의 끈이 50년 넘게 이어져 왔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셋째 매형과의 인연

 

셋째 매형과의 인연은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열 살 때 시작되었는데, 실비가 내리는 어느 봄날 셋째 누님과 약혼 사진을 찍으러 갈 때 따라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철부지였지만, 식객이 많은 것을 좋아했던 터라 새로운 식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열아홉 살이었던 셋째 누님 보호자로 동행했던 큰 누님을 따라 다녀왔는데, 그때는 처음 보는 아저씨가 큰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처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신기했고, 재미도 있었다. 필자는 어른이 되도록 '셋째 매양'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셋째 매형은 기대했던 대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집에 초대되어 저녁을 먹었고, 결혼 후에도 사흘이 멀다 할 정도로 자주 왔다. 누님이 시장을 보러오면서 집에 들르는 날은 어김없이 저녁을 먹고 갔는데, "일이 끝나면 집으로 오셔서 식사하시래요"라는 말을 전하는 심부름은 필자가 도맡아 다녔다.

 

아버지·어머니는 친자식처럼 허물없이 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형도 꼬박꼬박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71년으로 기억하는데, 비가 새는 건물을 신축해서 신장개업을 하는 날도 친모와 장모를 나란히 초대해서 테이프 커팅을 하도록 하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는 셋째 매형 고향집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혔고 지금도 잠들어 계신다. 43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어디로 모실지 몰라 고민할 때 매형이 장지를 소개했고, 10년쯤 후에는 지관을 불러 전망이 좋은 부근 산을 사들여 이장을 마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인연의 한계를 넘어 필연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모 같기도 하고, 큰 형님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친구 같기도 했지만,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칠 때는 맞수로 다투기가 일쑤였던 셋째 매형은 함께 여행도 다니고, 가족이 단체로 여름휴가나 야유회를 다녀오기도 해서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들을 많이 남기고 떠나갔다. 

 

만감이 교차했던 장례식장 분위기

 

장례식장에 들어서니까 빈소를 지키던 조카가 다가오더니 "아버지는 화장해서 임피에 있는 승화원 추모실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접수는 삼촌이 좀 봐주셔야겠네요"라고 하기에 어려운 결단인데 잘했다면서 발인하는 날까지 사흘을 접수대에 앉아서 보냈다.

 

얼추 따져보니까 15년 만에 상가에서 부의금 접수하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저녁이 되니까 눈이 침침해지면서 눈물이 나오고 약간의 통증까지 느껴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흘을 꼬박 밤새워도 괜찮던 눈이었는데. 

 

평범하게 살다가 혈압으로 쓰러져 병상에서 운명했으며, 부고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형조화가 장례식장 입구를 가득 메웠고, 조문객이 6백 명 가까이 다녀갔다. 줄지어 분향 차례를 기다리는 조문객 행렬을 보며 "처음 보는 사람은 '맘 존 도지사가 죽었데유?'라고 묻겠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매형이 필자에게 했던 탄식이 엊그제 들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이곳저곳으로 2만-3만 원씩 나가는 경조사비가 한 달을 합하면 몇십만 원은 될 것이라며 고민하던 모습이 그려졌고, 젊었을 때 뿌려놓은 이승의 열매를 저승으로 가면서 가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지켜본 장례식장 

 

셋째 매형과 셋째 누님은 가족·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지나가던 사람도 들어와 음식을 먹고 가는 동네잔치였는데 친구들이 만든 말에 올라탄 신랑이 집안으로 들어와 혼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대문 앞으로 모여들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썩은 권력이 발버둥치던 자유당 말기여서 신랑·신부와 부모, 상객(上客)들이 타고 갈 택시를 한두 대 대절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귀한 택시를 일곱 대나 불러 신작로에 대기시켜놨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 집에서 대사를 치르느냐고 물어봤을 것은 뻔하다. 듣는 사람은 골목에 있는 '할로네 집' 아니면 '째보선창 쌀집'이라고 했을 것이고, 아는 분은 들러 구경도 하고 국수와 막걸리를 마시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신혼생활은 단칸방, 그것도 2년에 이사를 네 번씩 다닐 정도로 궁했고, 내 집이라고 장만한 집이 화장실도 없는 좁은 건물이어서 100m 넘게 떨어진 동네 공동변소를 10년 가까이 이용해야 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안방과 부엌에 물동이와 함지박을 대여섯 개씩 받혀놓아야 할 정도로 허름해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생했는데, 심부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기억들이다.

 

그래도 살림을 억척스럽게 하면서 견뎌낸 보람이 있어 71년에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건물을 새로 지었고, 자식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착하게 자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큰아들은 세계적인 전자회사 부장이 되었고, 작은아들도 그에 버금가는 자리에 있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효자 소리를 듣고 있으니 삼촌인 필자 눈에도 부럽게 보일 수밖에.

 

지천명을 앞둔 큰 조카와 사십 대 중반을 넘긴 작은 조카에 조카사위까지 셋이서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는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좋았다. '저래서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빈소에 걸린 사진 속의 매형도 흡족해 하는 것 같았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든 딸 하나가 세월이 흐를수록 외롭게 보여 더욱 관심을 두고 지켜봤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셋째 매형의 영면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그날의 장례식장을 스케치해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셋째 매형, #셋째 누님, #장례식장,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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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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