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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노찾사'멤버이자, 지난 7월 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 [내 마음의 상록수]에 참여해 무대에 오른 '김은희'
 전 '노찾사'멤버이자, 지난 7월 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 [내 마음의 상록수]에 참여해 무대에 오른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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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부산 메리놀 병원 큰길 앞에서 터지던 매캐한 최루탄의 향과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버스에서 눈물 흘리던 사람들에 대한 80년대의 기억은 지금도 꽤 강력하다.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 한편에는 화염병을 든 사람들과 시커먼 몽둥이를 든 사람들 간의 대치된 그 간극만큼이나, 기다란 시절 나에겐 파편처럼 남아있는 노래들이 있다.

듣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웬일인지 눈물을 주룩 흘리는 노래. 씻지도 않은 지저분한 옷을 입고 더벅머리 대학생 형들이 무언가 머나먼 곳을 보며 부르던 노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노래는 사실 그게 전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 기억의 음악들이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의 노래임을 알게 된 건 시간이 조금 지난, 그러니까 더 이상 거리에서 새까만 철가면과 시뻘건 마스크의 사람들의 핏기어린 다툼이 보이지 않고 서서히 잦아들 바로 그 시기였다. 그래서 그렇게 잊혀져 갔나 보다. 나랑은 상관없는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노래. 사람이란, 아니 나는 그렇게나 비겁한 동물이다.

하지만 기억은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오는 방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가슴 한편에서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서 나온다. 독한 담배나 술 없이는 견디기 힘들만큼 울컥 이면서 가슴 안에서 기억이란 놈은 그렇게 까맣게 퍼진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왈칵하고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김은희의 '동인동 이야기'

공연 [마루 끝에 내린 꽃잠노래]에 올려지는 창작곡들을 모아둔 한정판 CD
 공연 [마루 끝에 내린 꽃잠노래]에 올려지는 창작곡들을 모아둔 한정판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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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매된 노찾사 4집 '진달래'라는 곡에서 처음 우리들에게 기억되었던 김은희의 음색을 다시 만난 건, 희망을 닮은 어른 한분이 바위 속에 몸을 던지고, 그 허망한 상실의 시간 속에서 서거 49일을 맞이하여 그들이 다시 공연으로 뭉칠 때였다.

그들은 거기서 <내 마음의 상록수>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시작했고, 그렇게 초대받지 않은 기억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김은희는 앞서 말한 '진달래' 그리고 '동인동 이야기'라는 곡을 부른다. 우리에겐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노찾사의 음악들은, 알다시피 서슬이 퍼렇게 섰던 그 시절 차마 다 펴지 못한 기지개마냥 응축되어있던 그들의 1집 이후, '솔아 솔아 푸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가 담겨져 있던 2집 때 들어서 완전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 이야기들은 언제나 비장했고, 결연했고 그리고 서글펐다.

그녀가 기타리스트 서창원과 함께 한 '진달래'는 그런 곡이다. 우리가 기억했던 그 분의 죽음처럼 한스럽고 또 처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인동 이야기'에서 그녀는 완전히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어오르던 뱀 같은 기억은, 이 새로운 이야기에 완전히 묻혀 땅군을 만난 뱀 마냥 저 먼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밤 깎아서 가져오는 피아노 회비
그 회비 오르던 날, 피아노 건반이 너무 무거워
아빠는 일요일에도 공장에 나가시는데
월급은 하나도 안 오르나봐 베토벤 엄만 뭘 깎았을까.

어제부터 보이지 않는, 눈이 아주 큰 열 살짜리 민정이
글쎄 민정이 아빠 그저께 밤에 갑자기 돌아가셨대.
신문 귀퉁이에 난 걸 새끼손가락만 하게
지하철 공사장 무너져 인부 두 명 사망.

동인동 낡은 골목길 하얗게 모기약 뿌리는 차 뒤를
좋아라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저 동인동의 아이들.
그래, 저 독한 모기약 속에 진짜 모기만 죽고
너희는 모질게 살아 남거라 아침이 올 때까지.

동인동 해는 저물고
낡은 골목길 어둠 속에 잠겨도
사람들 모두 아침을 기다리네.

노래가 끝나고 눈을 뜬 뒤, 그것은 다른 모양의 저항이라 난 감히 생각했다. 철가면과 마스크만 없어졌을 뿐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짓눌려 있었다. 딱히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랬다. 다만 과거 최루탄과 화염병 대신 희망과 슬픔이 음색에 담뿍 담겨져 있는 음악만이 남았다. 하지만 담배가 필요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그 끝은 언제나 희망

꾸준한 공연활동, 그리고 내년 정식 발매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그녀의 노래들은 그렇게 희망을 기다린다.
 꾸준한 공연활동, 그리고 내년 정식 발매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그녀의 노래들은 그렇게 희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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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기획집단 '그림자놀이'의 일원이자 '김은희와 친구들'이라는 공연제목으로 신현정, 박승원 등과 함께 노래하던 그녀의 음악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감성적이었다. 90년대 중반 김지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알려지거나 발표되지 않고 덮여버린 이 '동인동 이야기' 역시 저 처절한 가사에도 예의 가벼운 리듬과 즐거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5월 대학로에서 공연했던 <마루 끝에 내린 꽃잠노래>에서 부르던 그들의 어른을 위한 동요들도 분명 과거 노찾사의 그것과는 다르고 또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 순수함으로 무장된 깨끗한 저항은 빙빙 둘러말하거나 화려한 수사를 붙일 필요가 없음을 듣는 이나 노래하는 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정식발매는 아니지만 그들의 창작곡들을 접할 수 있는 샘플러 CD의 '먼 길', '우리언니 시집가던 날'의 그 고요한 울림도 그래서 그토록 크게 들린다.

새벽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이 왔다고 그 누군가 말했다. 그러한 희망이 더 이상 고문이 되지 않는 세상. 그래서 동인동에 살던 민정이도 이제 어엿하고 어여쁜 숙녀가 되어있음을 꿈꾸는 세상. 부드러운 항변과 꿈결 같은 속삭임이 어둠을 쓸어내는 세상.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꿈꾸며 먼저 노래하는 이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동인동 이야기'를 직접 듣고, 수록곡의 정보와 기타 작업에 대한 소식은 '꿈휴의 하늘여행 블로그 http://blog.naver.com/f5138'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태그:#김은희 , #음반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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