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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 학생들 모습.
 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 학생들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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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생이 되던 첫 해, 우리 반에는 참 성실한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내 주는 숙제를 꾹꾹 눌러쓴 글씨로 정성껏 해오곤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인터넷에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글을 그냥 긁어 인쇄해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급식비는 학교에서 지원했지만 현장학습을 갈 때마다 날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그 아이는, 집에서 맏딸이었다.

이듬해, 나는 그 아이의 동생을 맡게 되었다. 3월 첫주, 학부모 상담을 하기엔 이른 시기에 아이들의 어머니가 교실을 찾았다. 그녀는 지난겨울, 집에 가스가 끊긴 이야기를 하며 조카뻘인 내게 눈물을 보였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는 걱정마시란 말만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가스비 이야기를 하러 학교에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녀가 학교에 온 이유는 셋째아이를 조기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맡은 둘째 아이도 만5세 조기입학아였다. 그 집은 6남매를 두고 있었고 어려운 가정형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 한 사람이 6남매를 다 챙기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계속 아이들을 조기입학시켰고 또 셋째를 조기입학시키기 위해서 심사를 받으러 학교에 온 것이었다.

만 5세아 담당해 본 내 경험에 비춰보면

아이들이 줄줄이 다 우리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 가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기입학에 긍정적인 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만 5세아가 조기입학을 할 경우, 사실 더 많은 학부모와 가정의 손길이 필요한데 그 어머니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3월이면 코피가 터지는 아이들, 몸살이 나는 아이들, 토하는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 학교에 적응하고 거기에 살아남기 위한 힘겨운 싸움에 몸이 버텨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더 힘겨워한다.

수업이 너무 어렵거나 하는 건 둘째 문제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대규모의 사람들, 조직생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40명의 사람들, 혹은 학년전체, 학교전체가 움직일 경우에는 몇 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하는, 자신의 인간관계의 급속한 확장에 대해 혼란스러움과 압박감을 느낀다.

모든 학부모들은 학교 입학이 아이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며 생애 첫 도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3월 내내 학교에 데리러도 오고 수업을 참관하기도 하며 아이들을 평소보다 더 주의깊게 보살핀다. 만약 아이가 더 어리다면 어떨까? 더 많은 학부모의 손길과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만 5세 조기취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차라리, 유아교육을 공교육화 하는 게 적절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무지개지역아동센터를 찾아와 친구들과 놀고 있다.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1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무지개지역아동센터를 찾아와 친구들과 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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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유로, 만5세 조기입학에 대한 심사는 학생에 대한 심사뿐 아니라 학부모가 얼마나 학생에게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사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조기취학아에게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6남매들은 모두 기초학습부진학생이었다.

지난 11월 25일 미래기획위원회에서 발표한 만 5세 조기취학은 새로운 게 아니다. 지금도 학부모와 학생의 희망에 따라 만 5세아는 초등학교에 조기취학할 수 있다. 다만 미래기획위원회에서 말하듯 만 5세 조기취학이 출산장려정책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취학연령을 한 해 낮춘다는 것은 단순히 학교가 한해 먼저, 하루에 4시간씩 아이들을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교의 시설과 모든 교육과정의 변화, 교사들의 재교육, 가정과 사회의 추가적인 노력들을 의미한다. 고3 교실에서 고3수업을 고2가 듣는 것과 갓난아이에게 돌잡이의 옷을 입히고 이유식을 먹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모두 알지 않는가. 아이들은 어릴수록 한해한해가 다르다는 것을.

준비되지 않은 학교와 준비되지 않는 가정에서 조기취학은 출산장려는커녕, 오히려 가정의 부담과 교육비용을 증가시킨다. 게다가 그 교육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정의 아이들을 경쟁에서 도태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아이를 가진 가정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미래기획위원회의 취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 취지에는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낮추는 답보다는 유아교육의 공교육화가 더 적절한 대안같아 보인다. 이미 해당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제도를 정비하여 기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도 적게 들고 혼란도 적지 않을까. 언제까지 유아교육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교육제도의 사각지대로 남겨놓을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태그:#만5세, #조기취학, #초등학교, #유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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