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어 가슴에 병이 되었다는 주삼순 할머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어 가슴에 병이 되었다는 주삼순 할머니
ⓒ 김혜원

관련사진보기


"나처럼 모진 인생 살아온 사람 없을 거야. 살면서 모진 걸 너무 많이 보고 살아서 몸도 마음도 병이 들었어."

예순여덟 주삼순 할머니.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한숨부터 쉬신다.

"고향은 서울 창전동. 서울 토박이지. 우리 어릴 적 이야기가 뭐 있겠어. 전쟁통에 정신없이 지나온 날들이지. 아홉살 먹고 6.25가 터졌는데 제주도까지 피난을 갔어. 참 이상한 건 제주도는 인민군이 쳐들어 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그렇게 잡아다 죽이더라구. 이집 저집 들이닥쳐서 숨어있는 사람까지 찾아다 산비탈에 모아놓고 죽이는데... 지금도 생생해. 산비탈에 피가 낭자한 시신들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그때 놀란 가슴이 지금까지 병이 됐나봐."

당시, 아홉 살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건 제주도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사건(1950년 8월20일). 전쟁을 피해 들어간 제주도에서 전쟁보다 더한 양민학살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전쟁통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어.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폭격을 맞아 학교고 뭐고 모두 폐허가 되어 버렸거든. 그땐 교실이 없어서 교회나 공터에 천막을 치고 공부하고 그랬어. 워낙에 난리 속이라 '가갸거겨' 뗀 것도 다행이지 뭐."

한국 동란 중에도 목숨을 부지했던 할머니는 열여섯에 죽음의 고비를 맞는다.

"그때는 마포나루에 새우젓배가 들어오고 그럴 때야. 마포나루 옆에 빨래터가 있었거든. 한강물에 빨래를 해서 뜨거운 모래사장에 널어놓으면 잘 마르고... 여자들이 모여서 빨래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밥도 해먹으면서 놀기도 하고 그랬지. 나도 그날 아침 일찍 빨래감을 이고 가서 부지런히 빨래를 다 해놓고, 머리를 감으려고 허리를 숙였는데 나도 모르게 휘청하더니 물에 빠져 버린 거야. 본 사람이 그러는데 내가 세 번이나 물에 들어갔다 나오더래."

열여섯 어린 나이에 물에 빠져 처녀귀신이 될 뻔 했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할머니. 그때 물에 빠진 할머니를 구한 군인들도 너무 어리고 예쁜 처녀가 물에 빠진 걸 보고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할머니를 구했단다.

갓 피어난 목련꽃처럼 고운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니 할머니를 구하러 물에 뛰어 들었다는 군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목련꽃처럼 고왔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목련꽃처럼 고왔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 김혜원

관련사진보기


"열예닐곱이나 먹었을까. 친구를 따라 사진관에 갔는데 사진관 아저씨가 날 보더니 사진 좀 찍고 가라는 거야. 한복도 입혀서 찍고, 해군복도 입혀서 찍고. 그때 찍은 사진이야. 다른 옷 입고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었는데 겨우 이거 한 장 남았네."

처녀시절 제약회사에 다니며 약 포장 일을 했다는 할머니는 스무살 나이에 여섯 살 많은 신랑과 결혼을 한다.

"그땐 자동차도 많지 않았고 운전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택시운전사라면 알아주던 때였지. 택시운전사가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해서 그런지 여자가 그렇게 꼬이더라구. 바람을 어찌나 피우는지..."

결혼 생활의 고난은 그 뿐이 아니었다. 가난한 시댁에 들어가 살면서 시어머니는 물론 손위동서에게까지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해야 했다.

"시댁이 흑석동이었는데 그 동네는 이상하게 물이 짜서 밥을 해도 맛이 없고 빨래를 해도 비누가 일지 않아. 그래서 물지게로 물을 져다 밥을 해먹었어. 동막(지금의 용강동)이나 효창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까지 가서 물지게를 져왔지. 공동수도에서 수돗물 한 지게에 5원인가 받았었거든. 지금은 흔하고 싼 게 물이지만 그땐 물도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

바람피는 남편, 혹독한 시집살이 중에도 할머니는 사남매를 낳았다.

"낳기는 넷을 낳았지. 아들 셋, 딸 하나. 첫 아들을 얻고 좋아했었는데 두 살 먹던 해에 잃었어. 큰 동서가 업고 나갔는데 데려와 보니 애가 죽은 거야. 애를 업고 나가다 머리를 부딪힌 것 같은데 그냥 업고 돌아다니다 데려와 보니 이미..."

첫아이를 잃고 얻은 둘째 아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엄마 마음을 무던히도 많이 아프게 했던 아들이란다. 둘째와 얼마 차이나지 않게 태어난 셋째 아들도 일찍 엄마 품을 떠났다.

"입학통지서 받아놓고 학교도 못가보고 죽었어. 시어머니가 애를 때려서... 가게 앞에서 남 먹는 거 쳐다본다고 궁둥이를 몇 대 때려줬다는데 뭐가 잘못 됐는지 애가 일어서질 못하더라구. 애를 데리고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돌아다니다가 결국엔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을, 그것도 피지도 못한 어린나이에 둘씩 떠나보내고 더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할머니. 그 후로 딸을 하나 더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상처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인생이었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 집에 돈이라고는 갖다 주지 않지, 애들하고 나는 살아야겠지. 고생도, 고생도 죽도록 하고 살았네. 한강다리 놓을 때 거기 가서 몇 년 노동일을 했어. 리어카 끌고 돌도 나르고, 또 여기 마포천 둑 쌓을 때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개천은 바닥이 진흙이라 삽질도 잘 안되거든. 무겁긴 얼마나 무거운지."

바깥으로 도는 남편 덕에 가장 아닌 가장 노릇을 해 온 할머니. 슬하에 남아 있는 딸 하나 와 아들 하나를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다.

함께 여행을 갔었던 친한 친구 할머니도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함께 여행을 갔었던 친한 친구 할머니도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 김혜원

관련사진보기


"우리 며느리가 몸이 약했어. 결혼 전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도 했지만 결국 결혼하고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세 살 먹은 녀석이랑 돌 된 녀석이랑 손주 둘만 남기고 가버렸잖아."

남은 두 자녀를 키우며 어린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간신히 잊어 갈 즈음 며느리를 앞세우게 된 할머니. 남겨진 어린 두 손자와 절망감에 망연자실해 있는 아들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돌을 갓 넘긴 작은 손자마저 엄마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지 애미 49제 날. 작은 녀석이 지 애미를 따라 가버렸어. 살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더라구. 어린 것이 불쌍하기도 하지."

이런저런 충격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아들은 병을 얻어 눕게 되었고 남겨진 손자의 뒷바라지는 할머니 몫이 되었다.

"애 업고 다니면서도 꽤 안 부리고 일 다 했어. 망치질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오죽하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도 그냥 나왔을라고. 애가 전화로 '할머니 빨리와~' 하면서 우는데 도저히 병원에 누워있을 수가 있어야지. 의사가 그러면 안 된다는데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버렸어. 애가 눈에 밟혀서 도저히 안되겠더라구."

그때 충분히 치료받지 못해 매일 한주먹씩 약을 먹어야 할 만큼 후유증에 시달리는 할머니. 하지만 잘 자라준 손자를 보면 역시나 그때 퇴원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단다.

"아들도 살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몇 년 전에 사고로 고막과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나도 이젠 늙어서 손주 하나 있는 거 온전히 뒷바라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착하게 잘 자랐는지 몰라. 주변에서 다들 도와주셨으니 이렇게 키웠지 나 혼자서 어떻게 키웠겠어. 올해 고3이라 수능을 봤는데 학교 선생님이 알아서 원서도 다 써주시고..."

돌아보면 그 폭폭하고 고단했던 시간들을 어찌 버텨왔던가 한숨만 나오지만 의젓하게 자란 손주를 보면 마음 한구석이 푸근해 진다.

"우리 손주가 월급타서 할머니 손에 쥐어 줄 때까지 건강하게 살라고 해. 엄마 없이 자란 것도 가슴 아프고 형편이 좋지 않아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 뒷바라지 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그래도 할미가 고생했다면서 어린것이 철든 소리를 하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내 소원? 다른 거 없어. 우리 손주 저 녀석 하나 잘 되는 거만 보면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주삼순 할머니는?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임대아파트에 몸이 불편한 아들, 고3 손주와 함께 산다. 일반수급대상자로 국가로부터 매달 40만원의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으나 임대아파트 관리비와 임대료로 20만원을 지출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음.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손자가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하는 좋겠단다.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후원은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 부탁드립니다



태그:#주삼순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조손가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