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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정신대가다 돌아온 이야기 들어 볼래? 기가 막힌 이야기야."
 "정신대가다 돌아온 이야기 들어 볼래? 기가 막힌 이야기야."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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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정신대 할머니들 나오잖아. 그거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나도 그 할머니들처럼 정신대로 붙잡혀가다가 돌아 왔거든. 우리 어머니 아니었다면…아이구 말도 마."

경북 성주가 고향이라는 여든 한 살 성말용 할머니.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끔찍했던 종군위안부 이야기부터 꺼내신다.

"일본 놈들이 총알 만든다고 집안에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다 뺐어갔지. 밥그릇, 수저, 인두, 요강까지 놋으로 된 거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싹다 쓸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처녀공출까지 해가는 거야."

1944년 여름.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같은 나이 열네살에 종군위안부 소집 영장이 나왔다.

"우리 동네에만도 열네살 동갑네가 열일곱명이나 있었는데 모다들 한날에 정신대로 가게 된 거야. 가는 날 면사무소에 모였는데 우리 어머니가 내 딸은 보낼 수 없다면서 면서기랑 죽기 살기로 싸우셨네. 그러는 바람에 출발이 많이 늦어졌지. 면서기를 따라서 성주읍까지 20리길을 걸어서 가 보니 벌써 군용 도라꾸(트럭)에 처녀들을 콩나물처럼 실어서 출발을 하더라구."

면서기와 어머니가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출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지 못한 할머니 일행은 천만다행으로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하고 2차 징집을 위해 귀가조치가 된다.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지혜로우셨던지 몰라.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 밤으로 날 두메산골 깊은 곳에 살고 있는 고모네 집에 숨겨 두시는 거야. 해만 지면 집이 그리워 울고 그랬는데 한 달 만엔가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셨더라구."

당시 처녀가 종군위안부 공출을 피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혼인신고를 해서 법적 처녀가 아니라는 증명을 가지면 되는 거였다.

"나를 숨겨 놓고 백방으로 사윗감을 구하러 다녔던 모양이야. 그땐 정신대가 무서워서 혼인만 할 수 있으면 사람은 보지도 않고 시집을 보낼 때였거든. 어머니가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혼례식 바로 전날 고모네 집으로 나를 데리러 오셨더라구. 그래서 친정집에서 하룻밤 자고는 바로 산 넘어 남편 집으로 시집을 갔지."

종군위안부 공출을 피하기 위해 열 네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 할머니. 지독하게 가난해 먹을 것이 없는 시댁이었지만 죽기보다 싫은 종군위안부를 피했기에 가난쯤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몇 년 동안 지독하게 흉년이 들었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배를 곯던 시절이었지. 봄이 되면 동서하고 나하고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물을 해다가 식구들 죽을 끓여 먹이는데 죽 속에 쌀이, 쌀 속에 뉘 들어 있듯 했어. 멀건 나물죽 속에 밥알이 희끗 희끗 눈에 띨 정도였으니까. 그나마도 며느리들은 그릇에 담아 먹지도 못하고 식구들 다 먹고 난 솥에다 물을 조금 부어서 솥에 붙어있는 나머지를 설거지 하듯 휘휘 둘러 물처럼 훌떡 마시면 그만이고."

밥은커녕 제대로 된 죽 한 그릇도 구경하지 못했던 배고픈 시절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소도 안 먹는 밀기울에 개울물 마시면 그게 점심인 거야"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이라 터졌지만 그래도 하나 먹어봐."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이라 터졌지만 그래도 하나 먹어봐."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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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기울 알아? 그거 소도 안 먹는 건데. 그래도 어떻게 배가 고프니 뭐라도 배는 채워야겠고. 쑥이랑 밀기울을 디딜방아에 찌어서 축축하게 되면 그걸 밥할 때 구석에 넣고 쑥 버무리처럼 쪄. 그거 한덩어리 싸가지고 나가서 하루 종일 나물하다가 개울가에 앉아 한 조각 떼어 먹고 개울물 마시면 그게 점심인 거야. 들판에 나물도 없으면 수양버들 이파리까지 뜯어다 삶아 먹고 살았다니까."

그렇게 가난을 견디며 거친 땅을 일구어 소도 한 마리 들여놓고 형편이 조금 나아질 무렵 한국동란이 발발한다.

"우리 동네가 워낙 외진 곳이라 피난을 가지 않고 산에 방공호같은 굴을 파고 살았어. 난리가 터졌다는 소문을 듣고 쌀도 닷 말씩 묶어서 지고, 가다가 먹으려고 백설기도 한 시루 해서 싸고, 그렇게 피난을 나가려는데 가지 말라고 붙잡더라고. '동무들, 동무들' 하면서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그냥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구실리더니 동네 앞잡이들이 구찌비끼(뽑기의 일본말)를 해서 우리집 황소를 뺐어가지 뭐야."

그렇게 할머니네 집 소를 몰아간 지 일주일 만에 북한군들은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를 거듭한다.

"남편도 그때 왜관에서 탄피를 나르는 일을 했는데 낙동강쯤 와서는 도망을 한 거야. 낙동강에 와보니 인민군이고 국방군이고 시신이 말도 못하고, 강물은 피로 시뻘겋고... 아무래도 이러다가 죽을 것 같더래. 그래서 사과밭에 숨었다가 밤에 몰래 몰래 걸어서 도망을 왔더라구. 동란 이전엔 낙동강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며 놀기도 했는데 낙동강 전투이후엔 모래사장이 피로 덥혀 몇 년간 모래찜질은 꿈도 꾸지 못했을 정도야."

종군위안부가 될 위기를 넘기고 배고픔의 시절을 견디고 총탄이 난무했던 한국동란마저 겪어낸 할머니는 1955년 남편과 함께 서울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엔 공덕동 형무소 후문 쪽에 월세방을 얻어서 살고,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도 좀 살다가, 숭문고등학교 근처에 살다가 나중엔 이대 후문 쪽에서도 살다가... 남편이 장사를 나가면 나도 집에서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돈을 벌러 다녔어. 내가 돈을 벌면 남편 번 돈은 그만큼 여축이 되는 거잖아."

아현동 마루터기에 있던 찐빵 공장에서 찐빵을 떼어다 팔았다는 할머니. 한 개에 10원짜리 찐빵을 100개 받아다 팔면 200원이 남았다.

"찐빵을 받아다가 마포나루터에서 빨래하는 아줌마들에게도 팔면 제법 잘 팔려. 거기서 팔다 남으면 거리에 앉아서도 팔고, 이고 다니면서도 팔고... 10원이면 꽁치를 다섯 마리 줄 때였으니 200원 남으면 이문이 적은 게 아니야."

20살에 낳은 첫 아들을 병으로 잃고 몇 년 후 얻은 둘째 아들마저 남편의 입대 날 병으로 잃은 할머니는 서울 생활을 하면서 세 번째 아이를 얻는다,

"내 나이 서른셋에 낳은 아들이지만 먹고 사는 게 어려워 공부도 많이 시키지 못했어. 남편이 나이 마흔다섯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보상도 못 받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후유증으로 30년을 방바닥에 누워보지 못하고 앉아서 지내다 돌아가셨거든. 영감 돌아가시고 나서 이혼 한 아들의 두 아이들을 맡아 키우게 되었지."

"아들이 이혼 충격으로 눈이 안보여"

재개발로 밀려나게 될 예정인 성말용 할머니 집. 이 자리에서 45년을 사셨다고.
 재개발로 밀려나게 될 예정인 성말용 할머니 집. 이 자리에서 45년을 사셨다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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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병수발 끝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니 엄마 잃은 어린 두 손주가 눈에 밟혔다.

"아들이 이혼의 충격으로 병을 얻어서 눈이 안 보여. 그러니 애들을 어떻게 키워. 취로사업을 나가면서 매일 과자를 세 봉지 씩 샀어. 한봉지는 집에 있는 큰 손주에게 쥐어 주고, 두 봉지는 업고 간 작은 손주에게 오전에 한 봉지, 오후에 한 봉지 이렇게 주고... 어떻게 키웠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그래도 저렇게 잘 커줘서 고맙지 뭐."     

남편 병수발과 어린 두 손주를 키우느라 파출부며 막노동이며 취로사업이며 여든이 넘는 지금까지도 일을 쉬어 본 날이 없다는 할머니. 공공근로로 한 달에 20-30만원을 벌어들인다지만 그것도 겨울 석달은 쉬어야 하는데다가 중3, 고3이 된 두 손주와 함께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우리 영감님이 남겨주고 간 이 손바닥 만한 집(16평 정도) 때문에 정부에서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데. 이 집에서 산 지 벌써 45년이야. 이거 팔아서 어디 월세로 가면 도움을 줄 수 있다지만 여기 오래 살아서 그런지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아. 지난 여름방학 때까지는 도시락 배달도 해주고 애들 학교에서 급식표도 줬는데 여름방학 끝나고는 그것마저 딱 끊네."

엄마있는 아이들만큼 잘 해주지는 못해도 손주들이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고 나갈 때가 가장 기쁘시다는 할머니.

"나야 이렇게 살다 가면 되지만 우리 손주들은 잘 되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착하게 잘 자라주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지들 말대로 돈 많이 벌어서 할미 호강시켜주면 좋고, 그러지 않아도 나처럼 고생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뭐."

성말용 할머니는?
마포구 연남동 16평짜리 단독주택에 45년째 살고 계시며 도시가스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음. 공공근로로 할머니가 버는 20-30만원의 수입과 고3인 큰 손자가 아르바이트로 버는 약간의 돈이 수입의 전부. 중3인 작은 손자를 고등학교까지만 잘 마치게 하면 좋겠다고 하신다.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에도 후원을 보내주세요.



태그:#독거노인, #성말용할머니,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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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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